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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58화 (58/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58화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폐허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클로이는 몸가짐을 단정히 했다. 괜한 기대감과 흥분이 몰려왔다. 드디어 당신을 만나 대화할 수 있다니, 전생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계단을 걸어오고 있다. 천천히, 다급하지 않은 일정한 기사의 발걸음 소리에 클로이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이윽고 진희의 모습이 보였다. 정리가 되지 않은 검은색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와 빈틈이 보이지 않는 태도를 한 그녀가 클로이의 앞까지 걸어왔다.

전장에서 보았을 때의 바제트는 클로이보다 컸지만, 지금은 클로이가 진희보다 키가 컸다. 시야의 위아래가 뒤바뀐 상황임에도 어째서인지 내려다보는 건 진희처럼 느껴졌다. 클로이는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라노이드 경, 오랜만이에요.”

* * *

진희는 카온에게 폐허의 입구를 지키라 말한 후, 2층으로 올라갔다. 카온이 따라가고 싶단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2층에 올라가자 보인 것은 백금발의 소녀였다. 진희보다 반 뼘 정도 큰 키의 소녀는 밝은 푸른색 눈동자로 호를 만들며 웃었다.

“드라노이드 경, 오랜만이에요.”

드라노이드. 바제트의 가문 이름. 다시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단어였다.

진희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클로이는 엷은 미소를 띤 채 진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는 크지만 시영의 또래로 보이는 외모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분위기는 시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가장 놀라운 점은 클로이의 마력 수준을 진희조차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마력 감응력, 마나홀의 크기는 이미 A급 이상이란 뜻이다. 과거와 비교하자면 클로이는 이미 까마귀파의 두목보다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누구야, 넌?”

“역시, 절 기억 못 하시는군요?”

“내가 어떻게 알아?”

진희가 삐딱한 자세로 말하자 클로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진희의 말투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기에 진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바제트’를 기억하는 그녀라면 진희의 말투엔 익숙할 수 없겠지.

“제 이름은 클로이 루. 전생의 이름은 ‘루아 라바다’였습니다.”

“라바다라고?”

익숙한 이름이었다. 제국의 남부에 위치한 신정(神政) 체제의 국가인 노만 신국의 기사단의 닉네임이었다. 신성 기사단이란 거창한 이름의 기사단은 모든 단원이 ‘라바다(신의 아들)’라는 성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진희가 속해 있던 제국과 골든 웨이브 당시에 영토를 두고 다퉜던 왕국의 이름이기도 했다. 겨뤄봤으니, 이름은 몰라도 그 특이한 성을 잊어버릴 리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죽인 기사들의 이름이 몽땅 ‘라바다’였으니까.

“…….”

그런 라바다의 사람이 드라노이드를 알아보다니. 진희는 검술을 보고 자신을 특정했다면, 당연히 제국민이나 기사단원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용케 난 줄 알았네.”

“검을 쓰는 자가, 바제트 레임 드라노이드의 검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요?”

클로이가 고개를 저었다.

“레시아 경의 검술을 사용할 줄 아는 특출한 검사는 세계에서도 몇 없어요. 애당초 소인족 특유의 검술을 인간의 몸으로 휘두른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니까요. 관절이 어긋나고, 팔이 뒤틀립니다.”

검술은 체격을 상정하고 정립되는 게 기본이다. 신장 차이, 근력과 팔 길이의 차이 등등, 자신의 신체에 맞지 않는 검술을 사용하는 자는 머지않아 몸이 망가지고 만다.

그런 면에서 레시아의 검술은 매우 까다로웠다. 작은 신체를 극한으로 이용하는 그녀의 검술을 따라 할 수 있는 인간은 손에 꼽았다.

그리고 그중 레시아의 검술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클로이가 알기론 바제트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전 세계에서 단 한 명. 모든 검사가 우러러보는 검술의 극에 다다른 사람. 그 어떤 조건에서도 완벽에 가까운 검을 휘두르는 자.

그녀를 우러러본 사람들은 사후 그녀를 ‘검성’ ‘달인(Master)’이라고 칭했다.

클로이 또한 전생에서 검의 끝을 조금이나마 밟아본 사람이었다. 그녀가 만나본 적 있는 기사, 그것도 바제트 수준의 뛰어난 기사의 몸놀림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서진희 씨, 경의 정보를 듣고 직감했답니다. 경 또한 저처럼 이 세상으로 넘어왔다고 말이죠.”

“확신해?”

“물론입니다. 제 직감은 틀린 적이 그다지 없거든요. 전쟁에서도 그랬고요.”

전쟁이란 단어에 진희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라바다라는 이름에서 짐작했지만, 아무래도 클로이는 전쟁에서 자신을 만난 적 있는 듯했다.

“궁금하신 게 많은 걸로 알아요.”

클로이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짐작하고 있었다. 왜 진희가 굳이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그녀가 어떤 걸 궁금해하고 있는지.

진희, 바제트의 입장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어떻게 전생을 했느냐’조차 모르고 있을 테니까. 자신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경위는 무엇인지, 자신이 죽고 난 이후의 제국과 가문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할 게 태산일 것이다.

클로이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 전쟁의 개막을 목격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영웅의 앞에 섰다.

“경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게, 제가 경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곧이어 클로이가 진희를 가렸다. 그녀의 등 쪽 창문에서 들어오는 아스라한 태양 빛이 진희를 그림자에 가리게 했다. 그리고 진희, 바제트가 가장 궁금해할 정보를 입에 담았다.

“경의 제국이 멸망했다는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거든요.”

“…….”

‘당신은 완벽해. 내 망상 속 그대로야.’

클로이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진희를 바라보았다. 조금의 움직임도, 감정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와 상상 속 ‘바제트’가 겹쳐 보였다.

그녀의 바제트는 이래야 했다. 고매하고, 완전하며, 또한 강력해야 했다.

클로이는 살며시 진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쪽으로 들어가실래요?”

이것은 자신의 기사단을 패퇴시킨 적 장군에 대한 알량한 복수인가, 아니면 전쟁에서 본 피 칠갑 된 모습에 반한 소녀의 짝사랑일까. 클로이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겼다.

* * *

진희의 예상처럼, 클로이가 바제트의 검술을 알아본 이유는 그녀를 전쟁에서 목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골든 웨이브 당시, 진희의 군단에게 패퇴하게 된 노만의 기사단에서 클로이는 부단장의 직위에 있었다.

용케 살아남았네, 진희가 중얼거리자 클로이는 밝게 웃으며 ‘감이 좋거든요’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천천히, 바제트가 죽은 후의 대륙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노만력 1001년, 제국의 기둥인 드라노이드 가문의 가주, 바제트 레임 드라노이드가 사망한다. 그녀는 공식 가주 취임식을 거행하던 도중 독약을 먹고 중독사하였다.

대중들은 경악했다. 세계의 일인자를 손꼽는 화제에 언제나 거론되던 그녀가 고작 독을 마시고 죽었으니까.

반대로 다른 왕국의 유력자들은 직감했다. 그녀의 독주를 막고 싶었던 제국의 누군가가 수를 쓴 것이라고.

그녀와 친분이 있거나, 전쟁에서 한 번이라도 마주쳐보았던 사람들은 그녀가 권력이나 명예에 취할 인물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골든 웨이브 전쟁, 백자 전쟁, 수도 소환 사건을 모조리 해결해 제국의 위상을 대륙에 드높인 바제트였으나, 그녀는 평생을 수도 방위 기사단의 단장이란 직함에 봉해져 있었다.

권력을 탐하는 귀족들의 설전(舌戰)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그녀의 태도는 세간에도 유명한 편이었다.

하지만 다른 유력자들이 보기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수도, 황궁을 제압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실력자이자, ‘과하게’ 명예로운 기사였으니까.

결국 불안해하던 유력자들이 칼을 뽑아 그녀에게 비수를 꽂았다고, 다른 왕국에선 종종 회자되곤 했다.

그녀가 죽고 나서 10년 후, 제국엔 망조가 깃들기 시작한다. 자국 내에 나타난 대량의 몬스터들이 그 시발점이었다.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몬스터들이 제국의 각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둔지, 부락, 알터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뒷산에서 드래곤과 악마들이 출현했으며, 수도엔 정체불명의 유령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홀려 혼란에 빠지게 했다.

아비규환, 후에 말하는 대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도저히 몬스터의 물량을 막아낼 수 없었던 제국은 주변국들에 도움을 요청한다. 골든 웨이브 전쟁으로 인해 주변국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제국이었으나, 아직 인간의 도리를 잊지 않은 몇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신의 나라, ‘노만’이었다.

“처음엔 잘 진압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폐허의 방 안, 다 스러져 가는 가구들 사이에 유일하게 화려하고 깔끔한 의자에 앉은 클로이가 말했다. 반대편, 같은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던 진희가 클로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전력과 동맹국들의 군대는 서서히 몬스터들, 악마들을 몰아냈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1년 후 제국은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대악마의 출현이죠.”

“대악마?”

“네, 도저히 인간으로선 상대할 수 없는, 끔찍한 힘을 가진 이였습니다.”

동화 속 마왕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클로이는 말했다.

대악마는 단숨에 제국을 평정해나갔다. 대악마 앞에서는 그 어떤 기사도 검을 제대로 휘두를 수 없었으며, 백성들은 비통과 원한의 목소리를 내뱉으며 학살당했다.

“……그런 몬스터가 존재할 수 있어?”

진희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지구의 게이트에도 상식 밖 수준의 몬스터들이 있다지만,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군대를 가진 국가였다.

제국의 기사는 한 명 한 명이 능히 B급 헌터와 견줄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다. 단련된 정기사들은 A급 헌터와도 비교할 수 있었다.

기사단 하나가 곧 정예 헌터 파티 여럿을 집합시켜 놓은 것과도 같았다. 그런 강력한 기사단 수없이 많은 제국이, 고작 대악마라는 몬스터 하나 때문에 무너졌다니. 상상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진실입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에 그 어떤 거짓도 없어요.”

클로이는 벽안을 똑바로 뜨고 진희에게 말했다.

대악마는 몬스터 군단을 이끌고 제국을 점령한다. 전쟁에 참여했던 동맹국들은 결국 살아남기 위해 군대를 물리고 도주했다. 그중엔 클로이, 즉 루아 라바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 대악마의 모습을 멀리서만 봤어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의 직감이 경고했다.

“제가 상대할 수 없는 적이란 걸 깨달았거든요.”

그렇게 노만의 기사단마저 돌아가고, 제국은 명실상부한 죽음의 땅이 되고 말았다.

망명 온 귀족들은 온갖 재산을 팔며 목숨을 구걸해야 했고, 그중엔 드라노이드와 같은 명문 가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의 동생 또한, 노만으로 망명했어요.”

“…….”

“걱정 마세요, 제가 죽을 때까지 살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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