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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57화 (57/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57화

아이가 B급 수준의 마나홀을 가졌다면, 그보다 하위 등급 헌터들이 마나홀의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웠겠지. 반대로 상급 헌터라면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마나홀을 숨기는 방법 따윈 알 리 없는 아이가 상급 헌터 수준의 마력을 지녔다면, 발견한 순간 바로 스카우트하려고 하겠지.

“하여간 그래서 저도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어요. 아카데미 출신도 아니고, 스승이 있는 것도 아닌데, 브리온의 신인이라며 뜬금없이 등장해서 B급이 된 거니까요. 누구는 브리온이 헌터 양성소를 숨기고 있는 게 아니냔 이야기도 했어요.”

시영은 아참, 하고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미국에서 살다 온 혼혈 출신이라 신상정보도 제대로 못 찾았어요. 어머니 쪽이 한국인이란 건 인터뷰로 밝혀졌지만, 그간 한 번도 쌍둥이 부모님이 한국에 나타난 적이 없거든요.”

진희는 시영의 말을 듣고 가만히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나타난 B급 수준의 신인 헌터. 그동안 그 어떤 징조도 없었으며, 상급 헌터들의 눈에 걸린 적도 없다. 재능은 수준급, 브리온의 새로운 간판이란 닉네임을 받을 만하다. 지금껏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난 건지, 금강조차 갈피를 못 잡을 정도였다.

이건…….

“나랑 비슷하네.”

“……그건 그러네요.”

진희의 말의 의미를 생각하던 시영이 한참 뒤에야 긍정했다.

“아마 누나가 B급 헌터로 면허를 따셨으면, 쌍둥이보다 난리 났을 거예요.”

물론 지금도 신기하다. 시영은 아직도 심각한 표정인 진희를 보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쌍둥이보다 더한 업적을 가진 게 눈앞에 있는 진희였다. 아직 경력 1년도 채 되지 않은 헌터가 S급이 되지 않을까 싶은 무력을 휘두르며, 신화 속 괴물을 썰어버린 업적도 가지고 있다.

시영이 새삼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반면, 진희는 자신과 비슷하단 이야기에 환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진희도 바제트와의 기억이 뒤섞였을 때 마력을 인지했다. 마나홀은 급격하게 커졌고, 감응력 또한 일반인의 범주를 넘어섰다.

만약 그 쌍둥이도 자신과 똑같은 상황이라면, 시영의 설명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만나긴 해야겠네.”

진희는 주머니 속 클로이의 명함을 꺼내 들었다.

* * *

부우웅-

현성은 계속해서 울려대는 폰을 음소거로 돌렸다. 사서함엔 메시지가 계속해서 쌓이고 있었다. 브리온의 쌍둥이에 대해서 묻는 진희의 질문부터, 대체 어디에 있냐는 그의 후배 윤수의 한탄이 대부분이었다.

[선배, 이러시면 큰일 나는 거 아시잖아요. 이거 징계감이에요.]

[선배 문자 좀 봐요.]

[내일 되면 보고해야 한다니까요.]

“……안 받아도 되냐?”

현성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방의 중앙에, 작은 전등 하나에 시야를 의지하고 있는 소년이 웃었다.

창백한 안색에, 물을 마시지 못해 입술까지 말라버린 소년, 레인이 말했다.

“아무래도 곤란한 건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

현성은 천천히 레인에게 다가갔다. 레인의 차림새는 초라했다. 죄수복을 입은 채,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안 그래도 마른 몸이 더욱 볼품없어졌다. 볼은 야위고 입술은 말랐지만, 눈동자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무표정한 얼굴로 레인을 바라본 현성이 작게 주문을 외웠다.

“윽!”

그와 동시에 레인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발끝부터 시작된 고통은 아랫배를 거쳐 목까지 올라와 레인의 숨통을 졸랐다.

레인으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마법이었다. 처음엔 마법을 해석해서 탈주를 꾀하려 했지만, 이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차를 느껴 포기하고 말았다.

마법, 주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현성의 실력은 레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테크닉, 정교함, 마력의 사용량까지. 레인은 어째서 부단장이 방위대의 인물을 주의하라고 당부했는지 이해가 갔다.

S급 헌터, 술사 신현성. 국내 가장 뛰어난 주술사이자 강신(降神)술사. 아직 레인이 상대하긴 이른 적이었다.

“다시 묻겠다, 아는 대로 털어놔.”

“몰라. 알아도 말 안 해.”

그렇다면야.

신현성은 비죽 웃으며 주문을 외웠다.

“……!”

또다시 조여들어 오는 마력의 압박에 레인이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저항하기 위해 체내의 마력을 끌어올리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힘은 점점 빠져갔다.

“이 방엔 물귀신의 원한을 아로새긴 마법진이 가득해. 발버둥 칠수록 힘이 빠져나가고, 괴로워할수록 마력을 갈취해가는 저급령들의 힘이지.”

원한을 이용해 마법진을 만든다. 마법사들조차 믿지 못할 기행을 선보이며, 현성이 웃었다.

“가장 큰 장점이 뭔지 알아?”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고 있는 레인의 귀에 다가간 현성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몸속의 마나홀마저 파괴된단 점이야.”

“……!”

“물귀신의 집착은 끝이 없지. 이 방에서 반나절만 고통받아도 넌 사지의 마력 회로가 말라비틀어지고, 마나홀은 쥐어 뜯겨 일반인이 될 거야.”

혼자 죽지 않는 물귀신들은 그 수가 많을수록 사람의 기력을 앗아가, 이내 온몸의 힘이 빠져 죽게 만든다. 헤엄칠 수조차 없도록 힘을 빼앗는 것이 이 원한(마법진)의 가장 큰 효과였다.

그만큼 내구성이 약하고 술사 본인에게도 큰 부담이 간다는 약점이 있었으나, 몇 수 아래의 레인을 상대하는데 거리낄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 레인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는다면 그걸로 족하다. 테러범 하나를 아예 일반인으로 만들어버린다면, 그만큼 세상에 위험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니까.

상부에선 비인간적이라며 금지한 방식이었지만, 현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편이 좋았다. 극악무도한 헌터 출신 범죄자들이 온갖 로비로 인해 법망을 빠져나가는 걸 몇 번이나 보아온 그였기에, 이런 방식에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레인의 심문을 상부에 맡길 만큼, 그는 자신의 조직을 믿지 못했다. 사람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란 결국 부패하게 마련이다. 게이트가 출몰한 지 20년, 헌터 사업으로 호황을 누렸던 국내의 기득권들은 점점 썩어가고 있었다.

현성은 테러범들의 뒷배, 혹은 관계자 중에 기득권들이 연관되어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레인을 직접 데려와 심문하기로 결정했다. 기한은 약 3일. 벌써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으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은 레인을 바라보며 현성은 작게 중얼거렸다.

“너는 버리는 패일까, 아니면…….”

미끼일까.

레인이 뉴욕에서 잡힌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테러집단은 레인을 구하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몸에 수많은 재밍기와 마력 경고 장치가 달려 있다고 한들, 설마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을 줄은 몰랐다.

집단에선 레인을 버린 것일까? 혹은 자신이 레인을 데리고 그들을 꾀어내려 하는 것처럼, 뭔가 노리는 것이 있는 걸까?

현성의 중얼거림을 들은 레인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건방 떨지 마, 너희 따윈…….”

“…….”

레인은 말을 이으려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아쉽네.’

그 모습을 지켜본 현성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웃었다. 너희 따윈 우리 누구누구 님이 나타나면 다 쓸어버릴 거다, 그런 아이 같은 멘트를 기대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제법 교육이 된 것인지, 레인은 어지간한 도발에도 잘 넘어오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고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듯하나, 정작 중요한 질문인 입을 다물었다. 심문하기 어려운 타입이었다. 선을 지킬 줄 아는 성격파에겐 목숨보다 중요한 신념이 있게 마련이다.

세뇌 마법 같은 편한 마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환각과 환청 계열의 마법은 발전이 미비한 편이었다. 아티팩트 중엔 그런 게 있단 소문은 들었으나 당장 사용할 수 없으니 그림의 떡이었다.

손가락이나 하나 자르고 말을 해볼까. 고전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을 고심하던 현성은, 문득 고개를 돌려 방문을 바라보았다.

똑똑-

인기척이 느껴짐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을 삼키던 레인이 눈을 크게 뜨며 방문을 쳐다보았다. 혹시, 설마 하는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현성은 차분히 주변 마법진을 가동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적이라면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을 마법을 준비하며, 현성이 물었다.

“누구십니까?”

“아아- 역시나 안에 있구나. 탐정입니다, 탐정.”

“탐정?”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현성이 되물었다.

“네, 탐정. 아니다, 당신들께는 ‘요주의 인물 스왈로우-윙’이 더 친근하려나?”

“……!”

스왈로우 윙, 속칭 제비날개. 그 이름이 나오자 현성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스왈로우 윙이란, 정부에서 몇 번이고 잡아내려 했지만 실패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정보 상인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현성 또한 범인들을 찾기 위해 막대한 금액의 의뢰를 한 적 있던, 방위대의 공공연한 필요악(必要惡).

국내에선 다른 의미로 ‘괴짜(니케)’처럼 취급되는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

의심 어린 표정으로, 현성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십수 가지의 마법들이 자신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있음에도, 문 앞의 사내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과장스러운 인사를 했다.

“만나는 건 처음이지? 안쪽에 볼일이 있어 찾아왔는데 말이야.”

서혁, 진희와 똑같이 나른한 눈매를 가진 그가 웃었다.

* * *

클로이는 서진희의 동영상을 보는 순간, 자신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있던 ‘그 사람’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비록 체격도, 외모도 달랐지만 그 검 솜씨만은 잊을 수 없었다.

클로이도 기사였기 때문이다. 제국의 수많은 검제식(劍制式)들을 정립하고 영웅들의 검술을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정한, 일면 전설과도 같은 그녀의 검의 자취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녀는 곧장 조사를 시작했다. 그녀를 브리온으로 영입한, 뛰어난 눈과 넓은 발을 가진 정인에게 우선 도움을 요청했다. 동영상의 주인공을 찾고 싶다는 클로이의 맹목적인 바람에 정인은 당황했지만, 유능한 그녀는 이내 일주일 만에 범위를 좁혔다.

약 열 명 정도로 좁힌 그룹에서 클로이는 단숨에 ‘서진희’란 인물을 지목했다. 사진으로 진희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지금껏 그녀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주었던 직감이 경고를 해왔다.

이자와 만나선 안 된다, 하고. 마치 소동물이 육식동물을 피하는 것처럼 클로이의 예민한 직감은 진희를 본능적으로 피해야 할 인물이라 단정 지은 듯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다. 전생(前生)에선 몇 번이고 느꼈던 감각이다.

대부분은 골든 웨이브, 비옥한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제국의 침공 전쟁에서였다.

명망 높은 가문 드라노이드의 기사이자, 골든 웨이브를 승전보로 이끈 명장(名將)이자 기사.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적국의 두려움을 한 몸에 받아, 검성의 지위에 올랐던 신화적 인물.

바제트 레임 드라노이드.

그 회색빛 악마를 마주하고 도망친 적이 있던 클로이는, 진희를 만나고자 할 때 느껴진 감각이 곧 바제트와 마주할 때의 감각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직감이 쉴 새 없이 그녀를 막아섰지만, 클로이는 기어코 정인에게 자신의 명함을 들려 보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진희를 만날 수 있었다.

장소는 신림 근처의 폐허. 진희를 만나기 위해 클로이가 그녀의 거주지 근처까지 찾아왔다. 그녀의 동생 에반이 어딜 가냐고 계속해서 칭얼거렸지만, 겨우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철부지 아이를 데리고서 만날 수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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