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56화
“정의로운 사람이 청사진이라면서요.”
“사진엔 보이는 부분만 밝게 편집하면 됩니다.”
이 사람 선문답 잘한다, 진희는 계속해서 말을 받아치는 정인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전 기업에 들어갈 생각 없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언젠가 들어갈 의향이 생기신다면, 가장 먼저 브리온을 생각해 주셨으면 하여 찾아온 거랍니다.”
“으음, 글쎄요.”
생각만 하는 거라면 어렵지 않지만, 과연 들어갈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데서 괜히 긍정적인 대답을 해버리면 말꼬투리가 잡힌다는 것을 잘 알기에, 진희는 일부러 말을 흐렸다.
“혹시 금강과 계약하실 생각이실까요?”
“그것도 아니에요.”
“금강보다 뛰어난 보수를 제안할 수 있다고 장담은 못 드립니다만, 적어도 금강보다 좋은 대우를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아, 그래요.”
진희의 미온적인 대답에도 정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몇 번의 질문에도 진희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자, 정인은 진희의 거절을 예상이라도 한 듯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럼 이거라도 받아주시겠어요?”
아까 건네받았던 명함과 같은 디자인의 명함이었다.
“클로이?”
그곳엔 클로이란 이름의, ‘브리온의 쌍둥이’ 중 누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네,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저희 브리온사의 자랑스러운 신인 헌터입니다.”
“근데 이걸 왜 제게 주신 거죠?”
“클로이가 진희 씨를 꼭 한번 뵙고 싶다고 해서요.”
진희가 자신을 가리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브리온의 쌍둥이는 이란성으로, 누나가 ‘클로이’, 남동생이 ‘에반’이란 이름을 가진 남매였다. 방금 청하와 봤던 영상의 주인공은 그중 동생인 에반이었다.
“클로이는 영상을 본 후부터 진희 씨를 뵙고 싶다고 성화였습니다. 진희 씨의 거주가 특정된 이후엔, 저 대신에 오겠다고 하여 겨우 말린 참이었죠.”
“저를요? 왜요?”
“잘 모르겠습니다. 클로이가 그렇게 떼를 쓰는 건 저도 처음 보는 일이어서요.”
인터넷 대스타가 되니 팬이라도 생긴 건가, 당최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클로이와 정인의 제안을 고심하고 있을 때, 정인이 흘리듯이 말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명함을 드리겠다고 약속했어요. 혹시 연락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꼭 그 번호로 문자 부탁드립니다.”
얼굴조차 마주해본 적 없는 사람에게 굳이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거절한다고 명함을 돌려주려던 찰나, 정인이 흘리듯이 말했다.
“혹시라도 진희 씨가 제안을 거절할 것 같다면, 클로이가 이 말도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제국의 레시아 같았어요.’”
“네?”
제국의 레시아? 명함을 건네려던 손이 우뚝 멈췄다.
“무슨 소설이나 만화 속 검사인가 보죠? 영상을 보자마자 그 얘길 하더군요.”
“레시아가 누군지 모르시나요?”
“네? 네, 저야 모릅…… 니다만.”
정인이 진희의 얼굴을 보고 순간 말을 멈췄다.
“물어보려 했는데, 모르는 편이 낫겠군요.”
진희의 얼굴을 보고 정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진희는 정인에게 주려던 명함을 다시 가져왔다. 아무래도 연락을 해봐야 할 이유가 생긴 듯했다.
레시아, 소인족 출신의 검성이자 진희가 검술을 배울 때 참고했던 영웅 중 하나였다. 당연히 제국 출신이며, 그쪽 세상에선 동화책 속에 언급될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제국의 레시아를 알고 있다면, 진희처럼 ‘저쪽 세상’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일정이 있어 전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기업에 들어갈 의향이 있으시다면, 제 말씀을 꼭 떠올려주세요.”
“그게 끝인가요?”
“네, 클로이의 제안도 전달했으니까요.”
다시 표정을 갈무리한 정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좀 더 끈질긴 영입 제안이 있을 줄 알았던 진희는 가만히 정인을 바라보았다. 혹시 영입이 아니라 명함을 주는 게 목적이었나?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진희는 레시아의 이름을 듣는 순간 힘을 준 탓에 조금 구겨진 클로이의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돌려줄 마음이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정인은, 왔을 때처럼 정중한 인사를 한 후 강당을 나갔다. 나가던 길에 차를 들고 오던 카온과 마주쳤고, 수고를 끼쳐 미안하단 말을 건넸다.
카온은 차 두 잔을 들고 다가오다, 이내 진희의 표정을 확인하고 얼굴을 굳혔다.
“문제 있었습니까?”
“제국을 알고 있더라.”
진희가 카온에게 차를 받았다.
“브리온의 쌍둥이란 애가 레시아의 검술을 알아봤어.”
“…….”
카온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희가 차를 후 불고는 한 모금 마셨다.
“만나봐야겠지?”
“뜻하시는 대로.”
“넌 가끔 진심을 말하지 않는 게 문제야.”
진희가 남은 차를 다 마시고 잔을 카온에게 돌려주었다. 카온의 굳은 얼굴을 보며 작게 웃은 그녀가 카온의 어깨를 두들기고 강당을 나섰다.
“…….”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온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시영은 이제 심심할 때마다 찾아왔다. 처음엔 건방진 부잣집 도련님인가 싶었지만, 시영이 의외로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에 눈치를 많이 본단 사실을 깨달은 아이들은 차츰 시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영이 가장 가깝게 지내는 상대는 다름 아닌 고등학생 3인방 중 하나인 종혁이었다.
저번 생일 파티에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 덕인지, 시영은 찾아올 때마다 종혁을 찾았다. 워낙 어린아이들을 잘 챙겨주던 종혁도 시영을 상냥하게 환영했다.
“마법사한테 마력을 다루는 건 곧 계산을 같이한다는 이야기야.”
“계산?”
“응, 계파마다 다르지만 마법진을 다룬다는 점은 같아. 그리고 마법진은 모두 정교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수식’이거든.”
“와, 수학 같은 거구나.”
거기다 종혁이 마법사를 지망하고 있어 시영과 이야기가 잘 맞기도 했다. 진희와 카온은 마법을 가르칠 순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혁의 마법 과외는 시영이 맡게 되었다.
시영은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마법사였기에, 기초를 알려주는 것엔 탁월한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시영이 종혁에게 착 달라붙어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종혁이 수련할 때도 같이하기 시작했다. 서한의 재능을 생각하면 시영도 범상치 않은 천재였다. 마력 감응력은 시작부터 C급 상위, 마법의 지식은 이미 B급에 이르렀다.
심지어 체술까지도 재능을 보였다.
마법 과외가 끝난 후, 어느새 자신이 배우던 체술의 수준까지 올라온 시영을 보며 종혁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몇 달을 노력한 자신보다 십 수 번을 참여한 시영의 몸놀림이 더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시영이는 대단하구나.”
종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조금의 질투도 담겨 있지 않은 칭찬이었지만, 시영은 순간 종혁이 자신을 싫어하게 된 줄 알고 쏜살처럼 달려왔다. 기업 내의 헌터 동기들이 멀어져 간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쳤다.
“아, 아냐! 형이 더 잘해.”
“응? 아니야,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시영이 진도가 더 빠르겠는걸?”
종혁이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형보다 힘도 약하잖아!”
“그거야 시영이가 키가 크면 더 강해지지 않을까?”
청하처럼 시영도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었다. 종혁은 자신의 키와 거의 근접한 시영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하, 형도 열심히 해야겠다. 수련 열심히 하는데 살도 잘 안 빠지고 말이야.”
통통했던 종혁은 꾸준한 훈련으로 인해 살이 많이 빠진 편이었다. 하지만 얼굴 살은 잘 빠지지 않아서, 그의 얼굴은 유독 젖살이 오른 것처럼 보였다. 이 볼살 좀 봐, 하고 종혁이 소라와 민혁에게 장난스럽게 말하자 시영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냐! 안 쪘어!”
“엉?”
“딱 보기 좋아!”
“…….”
종혁의 농담에 웃고 있던 소라와 민혁이 그대로 굳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던 종혁도 ‘아니, 빠진 건 맞는데……’ 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어……. 칭찬 고마워?”
“내,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시영이 뭐라고 말을 고치려고 하던 그때, 진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시영.”
모두의 시선이 뒤로 돌아갔다. 마침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을 한 진희가 다가오고 있었다.
“잠깐 나 좀 보자.”
“네?”
종혁에게 볼을 붉히며 해명을 하려던 시영의 얼굴이 다시 새파랗게 식었다.
내가 뭔가 잘못했나? 마치 한 대 때릴 것처럼 다가온 진희가 주변을 살피더니.
“얘 좀 빌려 간다.”
하고 시영을 질질 끌고 강당으로 향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얼굴로 시영이 종혁을 바라보았지만, 이번만큼은 도와줄 수 없는 듯 종혁은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배신당했어, 종혁이 형이 날 배신했어. 충격 어린 시영의 눈동자가 종혁을 지나쳤다.
* * *
“아……. 쌍둥이요?”
강당으로 끌려간 시영은 진희가 쌍둥이, 클로이와 에반에 대해 묻고자 데려온 거라고 들은 후에야 안심했다. 하지만 진희의 표정이 평소와 같진 않았기에, 시영으로선 신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사실 들은 게 별로 없어요.”
“서한 씨한테 물어봐야 하나?”
“형도 모를 거라고 생각해요.”
현성은 테러범의 심문 때문에, 서한은 미국에서의 경매장 사건의 뒷수습 때문에 바빠 최근 연락을 하지 못했다.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임을 아는 진희는 그나마 정세에 밝은 시영에게 클로이 남매에 대해 질문하려던 참이었다.
“저도 ‘동기’에 대해선 이것저것 알아본 게 있었거든요.”
차마 ‘동기들과 파티를 맺고 싶어서’란 진심을 입에 담지 못한 시영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 시즌에 나온 신인 B급은 3명이에요. 둘은 쌍둥이였고, 한 명은 개인이었죠. 한 명은 어디 대단한 헌터 아래에서 수련했던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쌍둥이는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나타난 거거든요.”
“징조?”
“네, B급 수준의 신인은 보통 감응력 테스트 전부터 떡잎이 보여요.”
놀러 온 시영의 어설픔이 아닌, 금강의 후계자 중 한 명의 태도로 시영이 말을 이었다.
“보통 초등학교 고학년, 아니면 중학생 때부터 각성하잖아요? 늦어도 고등학생 때 하고요. 이때쯤에 C급 헌터가 나타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B급 헌터는 각성하기 전에 상급 헌터들의 눈에 띄어서 기업에 소속되거나, 헌터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일이 많아요.”
“왜? 아직 테스트를 안 한 거잖아?”
“음……. 인사팀이 그랬는데, 상급 헌터에겐 그 재능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아.”
마나홀 이야기인가. 진희가 대충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감응력 테스트는 체내에 있는 마력을 얼마나 끌어낼 수 있는가를 보는 테스트지만, 신체 내에 있는 마력의 총량을 체크해 주는 기계는 아니다.
때문에 진희처럼 하급으로 위장하는 게 가능했다. 마력이 얼마나 많든 그걸 활용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실용적인 의견으로 만들어진 기계이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마나홀은 감응력과 정비례하는 특성을 가졌다. 간혹 마력 신경이 손상되었거나 수가 적어 마나홀을 모두 사용하지 못하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나홀의 크기가 곧 감응력이라고 봐야 했다.
‘하긴 상급 헌터라면 마나홀이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