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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54화 (54/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54화

대답이 나온 건 현성 쪽이었다. 루카스는 그의 말을 듣고 한참을 고민했다.

“……혹시 등급이 낮은 이유가 있습니까?”

“모르죠?”

진희에게 물어본다면 귀찮아서, 라는 대답이 돌아올 테지만, 그녀가 실상 나름의 생각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외부인이기도 한 루카스에게 그 이상의 대답을 하지 않는 게 옳다 생각한 현성이 말을 흐렸다.

“흐음.”

루카스의 청색 눈동자가 진희를 향했다.

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다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한이 작게 웃었다.

* * *

일행은 출국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파파라치가 더 붙기 전에 비행기를 수배하고 짐을 챙겨 호텔을 떠났다.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잡은 것치곤 별다른 성과가 없긴 했지만, 수정구의 감정도 받았고 테러범도 체포했겠다, 이곳에 남을 이유는 없었다.

루카스가 반드시 연락 바란다고 명함을 하나 건네주었지만, 진희는 그게 자신보단 서한에게 더 필요할 거라 생각해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이 탄 비행기가 출발했다.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새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며, 비행기는 한국으로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무리는 두 그룹이었다.

하나는 니케.

“이대로 보내도 돼?”

“응, 우린 또 만날 거거든.”

제이미의 물음에 니케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꽃다발을 얼굴에 맞고 돌아올 때는 제아무리 니케라도 화를 낼 줄 알았다. 물론 니케가 진심으로 화난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니케가 이만큼 호감을 가진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희에게 거절당해 실망 내지는 섭섭함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니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따위의 걱정까지 내보였다.

“확신했거든.”

우린 운명이라는 걸. 니케는 꿈에 빠진 것 같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소음을 내며 비행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우린…… 니까.”

“뭐라고?”

비행기의 소음 때문에 니케의 말이 들리지 않았던 제이미가 되물었다. 그러나 니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히죽거리는 웃음만을 매달고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드디어 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년간의 지독한 정체를 어떻게 해결해 줄까, 기대가 될 따름이었다.

같은 시각, 공항에서 일행의 배웅을 한 루카스는 공항 벤치에 앉았다. 비행기가 떠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그는 폰을 꺼내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착신음이 들리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루카스입니다.”

-아하, 어때요?

“사과는 받아주었습니다.”

-화 안 내던가요?

“……네.”

-거봐요.

전화 건너편의 상대가 작게 웃었다.

-괴짜한테 대하는 태도만 들어도 알겠던걸요. 그런 타입한테는 괜히 수작 부리는 것보단 정공법이 잘 먹혀요.

“괜찮겠습니까? 접촉하려면 차라리…….”

-됐어요, 간만에 한국에 돌아갈 일도 있는데, 제가 직접 만나볼게요.

“……이서한도 같이 있을 겁니다.”

-오래간만에 형제도 만나고 좋네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루카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진희 씨는 더 성장할 겁니다. 솔직히 말해, 그 정도 실력의 헌터가 아직 소속이 없는 게 더 신기할 정도예요. 많은 사람과 엮이기 시작하면, 당신도 얼굴을 드러내야 할지 모릅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슬슬 후계자도 정해질 무렵이니까, 인지도라도 좀 얻어둬야죠. 서한 씨도 같은 생각일 거예요. 최근 해외에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하는 거 보니,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게 보여요.

“…….”

후계자란 단어에 걱정은 태산같이 생겼지만,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를 루카스가 입을 다물었다.

“세영 씨, 전…….”

-제 편이라고요?

알죠, 전화 건너편의 이세영이 웃었다.

-언제까지나 그러리라 믿어요.

“물론이죠.”

진희 일행이 루카스의 목숨을 구해준 인연이라면, 세영은 루카스의 인생을 구원해 준 신이었다. 루카스의 정중한 대답에 세영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 * *

“이제야 돌아가네.”

비행기 안, 의자에 널브러진 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짧은 해외여행이었는데, 벌어진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괴짜와의 만남, 수정구의 감정, 경매장 참여, 괴물 레이드 등등. 현생에서 이만큼 열심히 살아봤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한잔하실래요?”

“주세요.”

입국할 때와 달리 이번엔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진희는 현성이 준 와인 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와인을 즐기는 방법이야 알고 있었지만, 피곤한 와중에 그런 짓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와인을 마신 후 스낵을 입에 넣던 진희가 현성을 바라보았다.

현성의 얼굴은 평상시와 같았다. 즉, 속내를 알기 어려운 얼굴이란 뜻이다.

“현성 씨.”

“네.”

“테러범은 한국에서 심문하나 봐요?”

“……네.”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현성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테러가 있었던 후부터, 현성과 진희는 테러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도 나누지 않았다. 현성은 그걸 진희가 이미 모든 걸 예상하고 있다는 증거라 생각했다.

테러범을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간 게 진희였고, 자신은 그저 그 콩고물을 받아먹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

“잘 해봐요.”

“…….”

“괜찮아요, 화 안 났으니까.”

진희가 하품한 후 작게 웃었다. 그리고 시트에 고개를 파묻으며, 옆자리에 앉아 있던 현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거짓말은 안 했으면 좋겠네요.”

“……다 눈치챘나 봐요?”

“제가 한 눈치 하거든요.”

진희에게 적과 아군의 경계는 그 경계선이 넓은 편이다. 어지간해선 적이 되지 않고, 한번 자기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의심하는 일도 적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선을 넘는 순간, 그는 적으로 판별된다.

그녀는 검의 망설임이 곧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장에서 살아온 기사였다. 아군과 적군, 필요와 불필요의 판단만큼은 냉철했다.

한번 적으로 돌아선 이를 동료로 받아들이는 착한 사람조차 아니다.

“현성 씨와는 되도록 사이좋게 지내고 싶거든요.”

“명심하죠.”

현성은 쓰게 웃으며 어깨에 올라간 진희의 손등을 두드렸다.

그건 현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C급 헌터였던 진희는 없었다. 그녀는 이제 S급 수준의 무력을 가지고, 세간에 주목을 받기 시작한 헌터였다. 적으로 돌리면 피곤할 테지,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진희라는 인물을 가까이하고 싶다는 본심도 존재했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검은 눈동자를 회피하고 싶은 날이 많았지만, 오히려 그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 때는 조급함이 들었다.

그녀는 날아오를 것 같았다. 자신처럼 세속적이고 좁은 인물의 곁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마음속 응어리가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내가 능력 부족을 체감하는 날이 올 줄이야.’

현성은 눈을 감았다. 어깨에 올라와 있던, 이제는 잠들어버린 진희의 손을 차분히 내려놓았다.

* * *

가람 식구들은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진희의 미노타우로스 사냥 축하, 귀가 축하, 인터넷 스타 등급 축하 등등. 갖은 명분을 붙인 환영 파티였다. 카온은 진희가 이걸 과연 좋아할까 싶었지만 파티를 준비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 보여 별말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그간 진희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단 증거였다. 진희는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보육원에 있어선 든든한 기둥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까마귀파, 주위의 환경 때문에 위협을 느끼며 커왔던 아이들에겐 자신들을 지켜줄 울타리가 필요했다.

무슨 일에든 의연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줬던 진희는, 아이들에게 있어선 이상적인 울타리이자, 어른이었겠지.

“자, 얘들아. 진희 언니가 곧 오니까, 이제 정리하고 기다릴까?”

유일하게 보육원에 남았던 선생, 은정이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문틈에 조화를 붙이고 풍선을 매달고 있던 아이들은 밝게 대답하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이들이 어떻게 놀라게 만들까, 폭죽을 먼저 터뜨릴까 같은 수다를 떨던 와중, 마침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돌아왔나 봐, ‘유무브 1위 등극 축하’를 적은 자체 제작 현수막을 머리 높이 들어 올리려던 한 소년이 중얼거렸다.

“카온 형 머리 위에서 드는 게 더 잘 보일까.”

“…….”

그 아이는 예전에 ‘이 형 종아리 치킨 닭다리’라며 놀리던 아이였다. 그 아이의 머리를 꾹 누르며 안 된다는 걸 간접적으로 말한 카온이, 진희의 인기척을 느끼고 문을 열었다.

“어?”

진희는 현성과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현성은 문틈으로 보인 아이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의 부축을 받아 오고 있는 진희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다친 다리를 위해 목발을 끼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폼에 비해 얼굴은 태연했고 심지어 하품까지 하고 있었지만, 보고 있는 아이들의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누, 누나!”

청하가 먼저 달려갔고, 그 뒤를 이어 아이들이 왁 모여들었다.

“어? 오늘 생일 파티하는 날이던가?”

진희가 번잡스럽던 방 안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달려온 아이들이 들고 있는 걸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무브 스타 등극, 미국 영웅 방한, 소고기 환영……. 마지막은 누구야?”

소고기로 회식하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 사항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던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숨겼다.

진희의 질문에 대답할 겨를이 없던 아이들이, 중환자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더 큰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울음까지 터뜨리는 아이도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으아아아! 우리 누나 죽는다!”

“다리 빠개졌나 봐!”

“휠체어! 휠체어가 필요해! 없으니까 카온 오빠가 얼른 누워봐!”

“내가 왜 누워?”

“그래야 언니가 타지!”

혼돈의 도가니였다. 경매장에서의 소란 때보다 더 큰 데시벨로 귀를 괴롭히는 아이들의 비명에 진희가 귀를 막았다.

“제가 부축할게요.”

“예.”

소라가 다가와 현성을 대신해 진희를 부축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친절에 진희가 질색하며 말했다.

“나 괜찮아. 이건 그냥 의사가 하래서 한 거고, 나 걸을 수 있어. 봐봐.”

진희가 목발을 빼고 직접 걷는 시늉을 했다. 조금 쓰라리긴 했지만 걷는 게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현성과 의사가 유독 목발과 부목을 하라고 성화여서 어쩔 수 없이 한 것뿐이었다.

묘하게 회복력이 높아진 그녀의 몸은, 단 이틀 사이에 크게 호전되어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을 수준이었다.

보육원에 돌아가자마자 이 답답한 목발을 집어 던지고 붕대도 풀어야지 싶었는데, 정작 진희가 목발을 빼자 주위 사람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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