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53화
니케가 진희의 침대에 엉덩이를 걸쳤다.
“진희야, 너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야. 확신할 수 있어. 난 모든 걸 알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진희의 뺨에 손을 올렸다. 연고를 발라 건조해진 진희의 살결에 손가락을 눌렀다. 꾹꾹 누를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 핏방울이 니케의 손가락에 떨어졌다.
“‘이제’ 세상은 널 알게 될 거야. 기대되지 않니? 네가 이 조막만 하고 위태로운 세상에 어떤 존재가 될지.”
“관심 없어.”
“네가 관심 없더라도 사람들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빛나는 별을 가만히 놔둘 눈먼 사람은 드무니까. 니케가 키득키득 웃으며 현성과 서한을 흘끔 돌아보았다.
진희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꽃을 바라보았다. 향기가 좋았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적엔 교육이란 명목으로 화단을 가꾼 적이 있었지.
“괴짜야.”
“응?”
“이거 들고 꺼져.”
그리고 그 시간을 끔찍하게도 싫어했다. 손재주도 없었고, 꽃은 구경하는 걸로 족하다는 편이었으니까.
진희는 꽃다발을 니케의 얼굴에 갖다 던졌다.
“…….”
팍, 작은 소리가 나며 병실 바닥에 꽃들이 흩날렸다.
“……뭐 하는 거야?”
“드라마 보니까 꽃다발 던지는 게 멋져서, 나도 해보려고.”
진희가 니케가 그랬던 것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난 네 흥미에 놀아줄 생각 없어. 너랑 친해질 생각도 없고, 그 정신 나간 말에 감동도 못 느껴.”
그러니까. 하고 진희가 말을 끝맺었다.
“꺼져.”
최근 본 적 없던 화사한 웃음이었다.
12. 과거의 기사단
카온은 언제나처럼 수련을 하던 중이었다. 최근 삼인방의 체력도 점점 붙기 시작해서, 기초적인 체술도 함께 교육했다. 특히 청하의 성장세는 놀라울 지경이라, 가검을 들려서 대련을 해봐도 될 정도였다.
“오늘도 연락 없나요?”
“없어.”
새로 온 선생들과 함께 사무실을 다시 청소하고 있던 와중에 소라가 찾아왔다. 팔짱을 끼고 불만스럽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그게 자신에게 화난 게 아니란 걸 알아 카온은 짧게 대답했다.
소라와 청하는 진희의 소식이 없나 싶어 매일 카온에게 와서 물어보곤 했다.
당연하지만 카온도 진희에게 별개로 연락받은 일은 없었다. 진희가 그런 걸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길 정도로 부지런한 것도 아닐뿐더러, 돌아오는 날짜가 정해지면 연락을 준다고 했기에 카온은 별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련은 다 했냐.”
“했어요.”
진희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소라의 방향성에 대해 짚어준 적이 있었다. 그게 생각보다 매우 잘 맞아 최근의 소라는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무리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무리한 적 없어요.”
했군, 카온이 인상을 찌푸리자 소라가 찔끔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정해진 만큼의 수련만 하라고 그렇게 말했으나, 아이들은 몸을 혹사할 정도로 매진하는 경우가 잦았다.
물론 그도 이해는 하는 편이었다. 근육이 붙기 시작하고, 강해지고 있음을 체감하기 시작하면 수련이 그만큼 재밌어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무리한 수련일수록 부작용도 크다는 걸 알기에 주의시키는 것이다.
카온이 다시 잔소리를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종혁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소라의 물음에 종혁이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마침 수련을 하던 도중 달려온 것인지, 통통한 뺨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유, 유무브에.”
“유무브?”
“유무브에! 진희 누나 나와!”
“……뭐?”
카온과 소라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종혁은 숨을 몰아쉬고는 차분히 말했다.
“미국에서 테러가 있었나 봐. 그리고 그걸 해결한 게…… 진희 누나인 것 같아.”
“진짜?”
“진짜야! 유무브 실시간 1위 동영상이 진희 누나 모습이라니까!”
봐! 하며 종혁이 자신의 폰을 카온과 소라에게 보여주었다. 최근 폰에 대해서 배우던 카온은 그걸 받아 들고, 동영상을 재생했다.
제목은 ‘중국인이 유출한 테러상황, 한국인 헌터의 활약’이었다.
[벌 받을 시간이야.]
그 영상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카온과 소라는 그게 진희란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 때문에 완벽히 들리지 않았지만, 진희의 목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와, 와…….”
2분가량의 짧은 영상이었다. 진희가 뭐라고 몇 마디 한 다음, 몬스터로 보이는 거대한 소의 괴물의 목을 잘라내는 장면이 확대되어 촬영되었다.
마치 영화와 같은 장면이었다. 은빛 와이어와 거대한 기둥 사이에서 벌어진 검사의 휘황찬란한 검술은, 화질이 좋지 않은 카메라임에도 화려한 연출로 승화되었다.
“조회수가……. 2백만이야.”
올린 지 고작 2시간 전인 영상임에도, 조회수는 끝도 없이 치솟고 있었다. 소라가 카온에게 폰을 빼앗아 아래 댓글을 확인했다. 다행히 뒷모습만 보였기에 그녀가 진희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이 이건 조작이다, 영화 트레일러가 아니냐는 의심이었지만, 추천 수가 많은 댓글은 헌터들이 직접 적은 댓글이었다.
연출이 아니라, 모두 진짜란 내용이었다.
“이 언니는 대체 거기서 뭘 하고 계신 거지.”
잠깐 들렀다 온다는 느낌으로 나간 진희가, 단 일주일 만에 인터넷 스타가 되고 말았다. 소라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 *
일행은 치료를 받은 후 호텔로 곧장 돌아가 잠을 청했다.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호텔로 돌아온 건 언론이 냄새를 맡아 귀찮게 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낮, 좀비처럼 일어나 식사를 하려던 일행에게 루카스가 찾아왔다.
“죄송합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영문을 몰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진희와 현성은, 시간이 좀 지난 후 찾아온 서한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다.
“영상이 퍼진 모양이야.”
서한은 복잡한 얼굴로 객실 내부에 있던 텔레비전을 켰다. 어제 테러에 대한 뉴스가 한창 나오던 도중이었다.
테러의 주범은 아직 특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특수 수사팀을 꾸렸다는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진희는 현성을 돌아보았다. 그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지만, 진희는 그가 테러범을 붙잡았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의 경찰에게까지 그 사실을 숨기고 있을 리는 없고, 우선 언론에는 공개하지 않은 채로 심문하겠다, 그런 상황일까. 진희는 테러범에 대한 관심을 끄고 서한에게 물었다.
“뭔 영상이요?”
“이제 나올걸.”
그의 말과 동시에 화면이 전환되었다.
조잡한 화질로 진희의 뒷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칼을 들고 휘두르려는 장면이 캡처되었는데, 미노타우로스의 상체를 두 동강 내는 영상은 차마 내보낼 수 없었는지, 아직 미노타우로스가 살아 있는 상태의 사진이었다.
그 아래는 영어로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영웅’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저걸 찍은 게, 제 일행입니다.”
루카스의 사정은 이랬다.
루카스는 독일의 볼드만이란 기업 출신이었는데(기업 이름을 듣고 서한은 적잖이 놀랐다), 이 볼드만과 밀접한 관계인 중국의 기업 ‘청량’의 독일 지부장이 영상의 출처였다.
지부장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자신의 호위를 루카스에게 부탁했고, 중요한 거래처의 인사를 차마 놔둘 수 없어서 전투의 막바지까지 그를 지키며 숨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루카스가 일행을 돕기 위해 나서자, 분기에 찬 지부장은 자신을 놔두고 가버린 루카스를 촬영하기 위해 폰을 꺼내 들었다.
“아니, 그 와중에 영상은 왜 찍었답니까?”
“……죽더라도 영상이 남아 있으면, 청량은 저희 기업과 거래를 끊을 테니까요.”
말하자면 유언인 셈이다. 영상의 목적은 감히 자신을 버린 루카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증거를 담는 것이었다. 실제로 인터넷에 올라간 영상은 수정판이고, 무삭제판에선 지부장이 루카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 장면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지부장은 살아남았다. 일행의 계획이 성공하고, 결국 진희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였으니까. 그럼 가만히 영상을 삭제하면 됐을 것을, 그 영상은 새벽 동안 중국의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갔다.
“거기다 왜 올렸는데요?”
“……그건.”
말을 고르던 루카스가 한숨 어린 대답을 했다.
“동영상을 올린 곳이, 기업 내 인트라넷이었습니다. 지부장이 올린 게 아니라, 그걸 본 다른 일반 사원이 인터넷에 올린 거죠.”
굳이 동영상을 인트라넷에 올린 이유는 뻔했다. 자신이 죽고, 혹시 스마트폰이 유실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다. 인트라넷에 있는 영상을 본 사내 누군가가 해당 영상을 보고만 한다면 볼드만 기업과의 거래를 끊어버릴 테니까.
정작 지부장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영상이 멋지다고 생각한 직원이 생각 없이 편집하여 인터넷에 올려버린 게 일의 시발점이었다.
“그럼 볼드만과 청량은 지금 단교 상태인가?”
서한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직 결정되진 않았습니다만, 좋게 끝나진 않겠죠.”
“그렇다면 아시아 진출 MOU를 다른 업체와 생각해 둔 게…….”
“서한 씨.”
“아.”
장사 기질이라도 나온 것인지 주제와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던 서한을 진희가 막아섰다. 서한은 헛기침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그게 왜 당신이 미안할 일이에요?”
어떤 상황인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이 일이 루카스가 잘못한 일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현성이 진희의 말을 통역해 주자, 루카스는 잠깐 고민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관리 소홀이니까요. 제 일행이었고, 그로 인해 당신이 곤경에 처했음은 확실합니다.”
따지고 보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 은인의 정보를 허락도 받지 않고 사방에 공개한 격이니, 루카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저런 성격은 독일인 특징인가, 서한은 내심 생각했다.
“음…….”
고작 저 영상 때문에 큰일이 벌어질까? 진희는 TV에서 나왔던 자신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얼굴이 나온 것도 아니고, 양복을 입고 있어 자신이라 특정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입장할 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들어간 게 아니라, 니케의 추천으로 입장한 것이라 기록도 남지 않았다.
이게 그렇게 큰일인가 싶어 진희는 서한을 돌아보았다. 서한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국내에서야 헌터 정보에 대해선 언론 통제가 가능하긴 했지만, 해외는 힘들어. 아마 네 인상착의 같은 건 기자들 사이에서 다 퍼졌을걸. 실물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가만히 있지, 당장 번화가라도 걷게 되면 파파라치 따라붙는 건 순식간일 거야.”
“유명인 되겠네요.”
“그렇지.”
어차피 숨어 지내려고 했던 것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A급 헌터들은 지나가기만 해도 얼굴을 알아본다는데, 그 정도 인기야 감수할 수 있었다. 진희가 별일 아니라는 듯 루카스의 사과를 받아넘겼다.
“정 켕기는 게 있음 빚이라고 해둬요.”
진희는 상관없다며 거실에 있던 식탁으로 돌아갔다.
루카스는 그 모습을 가만 보다가 이내 서한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분 헌터 등급이…….”
“C등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