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49화
“펜의 효과는 미노타우로스 앞에 대상을 소환한다, 정도가 아니야.”
그리고 2층의 테라스, 진희 일행이 등지고 있는 구석진 자리에서 숨어든 니케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알아?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린 영웅, 테세우스는 ‘제물’로 가장하여 미궁에 침입했었어.”
신화 속 괴수들은 유독 동일 등급 던전에 비해 공략하기 어려운 이유가 존재했다.
다른 세계에서 침입한 괴물들과 달리, 이 세상에서 비롯된 괴물들은 인지도에 비례해 강력한 힘을 가지고, 동시에 그들만의 전승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중국의 1급 던전 보스 제천대성(齊天大聖)을 제압하기 위해선 금강탁(金剛琢)이나 팔괘로(八卦爐), 오행산(五行山)의 바위, 긴고아(緊?兒)와 같은 신물(神物) 중 하나가 필요했으며.
인도 신화의 해상 괴물 마카라(Makara)는 갠지스 강의 강물과 강가(Ganga) 혹은 카마(Kama)의 휘장을 통해서만 진정이 가능했다.
물론 압도적인 화력으로 신화의 괴물들을 쓰러뜨린 전투가 드물지는 않았으나, 대부분 괴물들은 제대로 된 ‘공략법’을 지켜야 한다는 게 정론이었다.
레인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진희를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치기 위해 펜을 휘둘렀지만, 그건 결국 잘못된 결과를 끌어낼지도 몰랐다.
신대의 괴물이자 저주받은 미노타우로스가 쓰러진 건 제물로 바쳐진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서였으니까.
과연 너는 영웅이 될까, 아니면 그저 시시한 조연이 되어 여정을 끝맺을까.
정체불명의 장막에 휩싸여 모습을 은폐한 니케는 기대된다는 듯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 * *
단언컨대, 미노타우로스는 드래곤과 수준을 달리했다. 엄청난 방어력을 가진 탓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수준에 그쳤던 드래곤과 달리,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격투법까지 사용하며 공격을 회피했다.
공격을 피한다는 개념이 없던 드래곤과, 방어력은 덜하지만 반격을 할 줄 아는 미노타우로스의 차이는 매우 컸다.
서한이 벽을 박차고 날아오른다. 그가 들고 있는 것은 경매에서 출품되었던 것으로, 각룡의 발톱으로 다듬었다는 톱날 형태의 검이었다.
벽을 박차고 미노타우로스의 어깨에 그의 검이 박혀 들었지만, 조금의 상처조차 입히지 못했다. 무딘 칼로 두꺼운 가죽을 누르는 듯한 감촉이 느껴지자마자 서한이 소리 질렀다.
“아래!”
동시에 바닥에 있던 현성이 빠르게 주술을 외워, 서한의 발아래에 투명한 발판을 만들었다. 서한이 바람으로 만들어진 발판을 밟고, 다시 한번 점프하여 미노타우로스의 머리 위를 넘어간다.
“윽!”
서한이 있던 장소에 미노타우로스의 도끼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풍압만으로도 사람이 밀릴 지경이다. 조금만 늦었다면 허리가 양분되었을지도 몰랐다. 서한은 혀를 차며 낙법을 취했다.
무기를 사용하는 미노타우로스의 공격력은 드래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때, 서한이 공격함과 동시에 미노타우로스의 등을 노린 진희가, 그와 타자를 바꾸듯 앞으로 돌진했다.
노리는 건 미노타우로스의 목덜미. 마력을 휘감은 그녀의 검이 단숨에 목을 벤다.
‘얕아.’
하지만 제대로 들어가진 않는다. 뒤통수에서 살기를 느낀 미노타우로스가 목을 숙여 공격을 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한의 공격과는 다르게, 진희의 검은 두꺼운 가죽에 미약한 생채기를 만들었다.
진희는 곧장 미노타우로스의 등을 발로 차며 뒤로 빠졌다.
미노타우로스는 당황하지 않고, 뒤로 돌아 도끼를 휘둘렀다.
“우와앗.”
진희가 과장스러운 감탄을 내뱉으며 도약했다. 미노타우로스가 들고 있는 도끼는 대단한 수준의 무기도 아닌데, 겉에 넘실거리는 살벌한 마력 덕택에 소름이 끼쳤다.
정련된 마력은 아니지만, 닿기만 해도 살이 찢겨 나갈 정도의 강한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진희가 빠지자마자, 이번엔 현성과 서한이 같이 달려들었다.
미노타우로스는 검을 든 서한보다, 오히려 주먹으로 공격하는 현성을 회피하는 데 주력했다. 정체불명의 주술로 몸을 강화한 현성의 주먹은 피부에 맞는 순간 둔탁한 폭발음과 함께 미노타우로스를 뒤로 밀려나게 했다.
드래곤의 비늘과는 다르게, 현성의 공격이 제법 먹혀들어 가고 있단 증거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유효타격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미노타우로스는 건재했다. 대치하고 있던 시간이 벌써 20분이 지나가고 있었으나, 미노타우로스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가해 보지도 못했다.
반대로 미노타우로스는 점점 전투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윽!”
“뒤로 빠져!”
미노타우로스는 타깃을 확실히 했다. 공격하는 적을 모두 상대하기보단, 한 명을 중점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상은 현성이었다. 눈가림으로 사용하는 주술이나 서한과 진희의 공격을 보조하는 마법 등, 이 자리에서 가장 껄끄러운 상대는 현성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쾅-!
“꺄아아악!”
“우아악! 가까이 오지 마!”
“벽에 붙지 말고 나와!”
“그럼 어떻게 피하라고요!”
“잘!”
서한의 고함에 현성이 짜증을 담아 대답했다. 경매장은 넓다고 볼 수 없다. 도망칠 구석은 한정되어 있고, 그마저도 탁자와 테라스, 기둥 때문에 복잡한 상황이다.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을 받아낼 탱커가 없으니 회피를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계속해서 대치 구도가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공격을 억제할 저지력도 부족한 상황이다. 끝없이 구도가 밀리다 보면, 결국 사람들이 대피해 있는 복도나 구석진 곳까지 전투가 번지게 된다.
현성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뒤로 도망치는 것 말곤 자신만을 노리고 달려드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으악!”
“……!”
미노타우로스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하여 서한이 검을 들고 덤볐지만, 현성의 보조 없이는 너무나 직선적인 공격이라 곧장 반격당했다. 미노타우로스가 현성을 공격하려다 곧장 몸을 돌려 서한을 걷어찼다.
거대한 몬스터가 격투기를 사용한다니, 보고 있자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다.
진희는 몸을 날려 벽을 향해 날아가는 서한을 받아주었다.
“……고마워.”
“거 살 좀 빼세요. 무겁네.”
“다 근육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서한이 다시 달려든다.
‘차도가 안 보여.’
서한에게만 맡겨둘 수 없어 진희 또한 서한과 번갈아 가면서 공격을 시도했다.
드래곤과의 일전 때는 드래곤의 마력 고갈을 노리는 방향으로 공략 방법을 설정했다. 이성이 날아간 드래곤은 궁지에 몰리면 큰 기술을 난발하여 알아서 고꾸라지곤 했지만, 지성이 남아 있는 미노타우로스는 쉽지 않았다.
미노타우로스의 신장은 약 3m가량. 괴수치고는 큰 덩치는 아니었으나, 신체를 인간만큼 쓸 줄 아는 괴수라는 특징 하나만으로도 공략이 복잡해졌다.
서한이 일부러 이목을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르거나, 정면에서 공격을 가한다. 그 곁을 진희가 파고들고, 현성은 계속해서 보조한다.
그러나 미노타우로스는 침착하게 검을 잡으려고 시도하고, 끊임없이 현성을 노리는 등, 오히려 괴수 쪽에서 공략 방법을 설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또다시 공격은 실패했다. 조금 더 욕심을 내려다 미노타우로스의 주먹을 맞고 날아간 진희가 피가 섞인 침을 내뱉었다.
“괜찮아?”
“아뇨, 아파요.”
이번에 그녀를 붙잡아준 것은 서한이었다.
“우선 제 공격은 통하는 것 같네요.”
“그러게, 이유가 뭐지?”
“아마 그 ‘펜’ 때문일 거예요.”
펜에 이름을 적힌 사람은 미노타우로스와 대면해야 한다는 법칙은 알았다. 미노타우로스의 시선을 피해 다시 복도로 가려고 할 때도, 정체불명의 힘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래도 펜에 적힌 제물은, 미노타우로스를 상대할 때 일정 대미지를 더 줄 수 있다는 법칙이 있는 듯했다.
서한의 공격이 더 파괴적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진희의 검에 생채기가 난 것을 보면, 이 미노타우로스를 공략하는 방법은 ‘펜에 이름이 적힌’ 전사가 상대하는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탱커만 있었어도.’
하물며 탱커용 장비라도 있었다면 서한이 앞에서 탱커 노릇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 상황에선 여의치 않았다. 이성이 있는 몬스터에겐 어그로를 끌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현성이 진희를 주술로 가리려고 해도, 좁은 경매장 안을 도끼로 훑어버리며 진희의 위치를 찾아내곤 했다.
제대로 된 대미지는 진희만이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진희가 대미지를 입힐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혹시 미노타우로스 전승 알아?”
“대충은요.”
“미노타우로스가 쓰러지게 된 원인은 두 가지야. 첫 번째는…….”
“설명은 좀 나중에 하고 도와줘요!”
서한이 손가락을 들며 설명을 하려 하자 현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머쓱해진 서한이 잠깐만, 하고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미노타우로스의 전승이라. 어릴 적 만화를 봤던 기억은 난다.
아마 테세우스란 영웅이 미궁에 숨어들어 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영웅이 된다는 스토리였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미궁 탈출할 때 무슨 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나라의 공주가 준 실타래로 테세우스는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웅이란 타이틀을 얻은 테세우스는 이후에 자신을 사랑해 도와줬던 공주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던가.
테세우스의 영웅적 무력과 비인간적 면모가 대비되어 기억에 남던 일화였다.
진희는 차분히 미노타우로스를 살폈다.
신화 속의 괴물을 공략하는 방법은 전승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영웅의 역할은 진희가 맡아야 했다.
펜에 이름이 적힌, 제물로 선택당한 인물이니까.
그럼 공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또한 어떻게든 이용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곳에 미궁은 없지만, 어쩌면 실타래라는 물건 자체가 미노타우로스에게 역린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 같은 게 없잖아.’
옷이라도 뜯어서 실을 풀어봐야 하나? 다 헤져가는 자신의 양복 베스트를 바라보며 진희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윽!”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진희가 미노타우로스에게 얻어맞고 날아오는 현성을 두 팔 벌려 받아주었다.
“고, 고맙습니다.”
“현성 씨는 살 안 빼도 되겠네요.”
“네?”
“야! 근육이라고!”
귀도 밝아라. 진희가 작게 웃었다.
“아, 현성 씨. 혹시 미노타우로스 전승 알아요?”
“압니다.”
진희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펜에 관한 것,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등, 자신이 추측한 정보에 대해 말하자 현성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정말요?”
“예, 일단 진희 씨의 공격이 먹힌다는 게 전승을 따르고 있단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실타래는…….”
현성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필드를 만들 때 사용하는 게 옳겠군요.”
“필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