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48화
레인은 폴리모프를 그 즉시 풀었다. 정체가 들킨 이상 폴리모프는 마력을 사용하는 데 방해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곧장 인형을 소환하여, 각자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자신을 쫓아오는 이를 막아라.
두 번째, 경매장에 있던 아테네의 깃털 펜을 훔쳐 와라.
그 명령을 내린 즉시, 레인은 복도의 코너 쪽으로 몸을 날렸다.
“으앗!”
쾅-!
레인이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커다란 검상이 생겼다. 누가 한 짓인지는 명백하다. 서투른 낙법을 한 채로 뒤를 돌아본 레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진희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꺼내 든 검을 들고 진희가 혀를 찼다.
‘복도가 좁다 보니 속도가 안 나.’
레인이 코너를 돌며 도망쳐서 잡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레인이 부리는 인형들이 진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차라리 이 근방을 모조리 베어버리면 편할 듯한데, 혹시나 있을 생존자들 때문에 그마저도 어려웠다.
그러나 아무리 넓어도 결국 건물 안이다.
복도의 끝, 진희는 레인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윽!”
인사말은 필요 없었다. 진희는 곧장 검을 들어 레인에게 내려쳤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공격이었으나, 이미 대비하고 있던 레인은 주머니에 있던 아티팩트를 꺼내 들었다.
“또?”
진희가 혀를 차며 뒤로 도약했다.
이번에도 게이트가 레인의 앞을 막아섰다. 저번에 조건부 던전에서 만났던 테러범이 썼던 것과 같은 종류의 방어형 게이트다.
시간을 들이면 뚫지 못할 것도 없지만, 하필 골목길에서 사용하여 진로를 막은 게 거슬렸다.
“하, 하하!”
떨던 몸을 진정시킨 레인이 진희를 보며 웃었다.
“미노타우로스한테서 도망쳤나 보지? 나 하나 잡겠다고 달려온 걸 보면 말이야!”
미노타우로스와 맞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헌터는, 경매장 안에선 진희와 서한, 현성뿐이었다. 그중 진희가 여기까지 나오게 되었으니, 겨우 둘이서 미노타우로스 막고 있을 게 뻔했다.
피해가 만만치 않겠지. 정체를 들켜 가장 당황한 건 본인이면서도, 레인이 애써 강한 척을 하며 말했다.
“미끼에 걸린 기분이 어때?”
“으음.”
그러나 진희는 도발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팔짱을 끼고 뭔가를 고심하는가 싶더니, 이내 검을 가로들고 자세를 잡았다.
“이렇게 하던가.”
“지금 뭐 하는……!”
그리고 온몸에 힘을 다해, 검을 찔러 넣었다. 마치 펜싱의 자세처럼 몸을 낮추고, 속도와 집중을 통해 한 점을 노리는 찌르기였다.
게이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던 레인이 비웃으려 했으나.
“아, 아악!”
마력을 휘감은 강력한 찌르기가 게이트를 통과해 그의 어깨를 꿰뚫었다. 그의 어깨를 뚫고 지나간 섬광은 그 뒤편의 벽까지 닿았고, 레인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마력에 의해 뚫린 어깨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뚜, 뚫렸어?”
“역시 한번 뚫어보니까 요령이 생기네.”
진희가 오른손을 털며 중얼거렸다. 구멍이 뚫렸던 게이트는 금세 복구되었다. 막강한 방어력을 가진 주제에 회복까지 할 수 있다니, 사기적인 마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방패엔 허점이 있게 마련이지.’
진희는 작게 웃었다.
왜곡을 통해 마력을 소멸시키고, 공간을 정지시키는 방식으로 공격을 막는 이 게이트는, 마력을 퍼붓는 집중 공격에 취약했다. 마력 소멸의 처리속도를 웃도는 수준으로 마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면, 의외로 쉽게 뚫리는 허점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저번에 게이트를 주먹을 뚫어봤던 경험이 있는 진희는 이번엔 검 끝으로 마력을 뿜어내는 방식으로 지르기를 시도해 보았다.
게이트가 마력을 잡아먹는 속도보다 빠르게 마력을 뿜어내자, 그녀의 예상대로 구멍이 생겨 공격을 통과시켰다.
비록 게이트 자체를 파괴하기는 어려웠지만 공격이 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으아앗!”
손을 푼 진희가 다시 한번 자세를 잡았다. 또다시 공격해 온다는 공포에 레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 부근에 정확히 찔러 들어오던 마력의 송곳이 빗나가, 그의 목덜미를 살짝 베고 지나갔다.
“쳇.”
게이트에서 한 번 막히다 보니 공격에 딜레이가 걸린다. 다시 한번 손을 털던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레인을 향해 이죽거렸다. 레인의 눈에 공포가 떠올랐다.
“평소에 착하게 살지 그랬어.”
“마, 망할……!”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이런 상황을 바란 건 아니었다. 레인이 피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며 진희를 노려봤지만, 진희는 태연하게 다시 자세를 잡았다.
또다시 찌르기다. 게이트를 쓰기 위해 막다른 골목길로 유인한 건데, 오히려 이 골목에서 꼬챙이처럼 찔려 죽게 생겼다.
레인이 다급하게 도망칠 방법을 구상하던 도중, 문득 그가 뿌려놓은 인형이 목적을 달성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하, 하하하하!”
“……?”
“됐어, 됐다고!”
그리고 허공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공간. 인형을 집어넣고 뺄 수 있는 전용 마법을 통해, 레인은 인형이 가져온 ‘깃털 펜’을 손에 쥐었다.
“그건 또 뭔…….”
“널 죽일 펜이야! 멍청한 너희들은 이 펜의 진짜 힘도 모르지!”
“……?”
그거 데X노트 같은 거였어? 진희는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검을 찔러 넣었다. 풍압과 마력이 주변의 공기를 밀어낸다. 레인이 뭐라고 하든 간에, 그전에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살기 위해 반사적으로 땅바닥을 구른 레인이었으나, 이번엔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윽!”
진희가 노린 것은 심장, 그러나 게이트로 인해 빗나간 검은 레인의 팔 부분을 타격했다. 예전 진희에게서 잘렸던 팔이 또다시 공격당하고 말았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다시금 올라오는 고통과 공포에 레인이 두 눈을 질끈 감고, 깃털 펜을 허공에 들었다. 어깨와 팔의 통증에 펜을 쥐고 있기도 힘들었지만, 살기 위해선 이를 악물고 휘둘러야 했다.
[다음 제물의 이름은 서진희.]
“응?”
아테네의 깃털 펜. 그 정체는 과거 아테네 왕국에서 크레타 왕국으로 14명의 아이를 제물로 바칠 때 사용된, 희생자의 이름을 적던 저주받은 펜이었다.
이 펜으로 이름이 적힌 자는 다이달로스의 미궁으로 보내져 미노타우로스의 먹이가 된다.
아테네의 수호신이자 전쟁의 신이었던 아테나는, 이 펜으로 ‘백성을 공물로 바치는 계약’을 허락하며 분노에 떨었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그의 아들 미노타우로스에게 복수를 다짐하면서.
그녀의 눈물과 잉크 대신 사용한 신혈이 이 펜에 깃들어, 저주의 아티팩트로 변화되었다.
“……!”
신화시대에서 사용하던 살생부의 필기구. 그 필기구로 이름을 적힌 자, 미노타우로스의 제물로 선택받는다.
진희는 갑자기 정체불명의 기운이 온몸을 옥죄는 걸 느꼈다. 벗어나기 위해 마력을 사용하려 했으나, 이 기운은 단숨에 진희를 복도 반대편으로 끌어당겼다.
“윽!”
벽이고 기둥이고 상관없이 끌어당기는 힘에, 진희는 그저 마력을 갑옷처럼 두르고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건 힘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섭리(攝理)의 힘, 절대 법칙과도 같은 이 족쇄는 진희마저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투명한 손아귀는 그녀를 경매장으로 도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진희가 짜증 어린 눈길로 멀어져가는 레인을 바라보았다. 레인은 팔과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진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출혈량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를 테지만, 이미 힘이 빠진 레인은 끌려가는 진희를 가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죽어버려, 레인이 작게 저주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확실한 끝맺음을 위해, 품 안에 있던 결계석을 발동시켰다. 그 직후, 지하의 경매장은 거대한 공간 왜곡의 결계로 인해 밀폐되고 말았다.
* * *
“으앗!”
“진희 씨?”
진희는 그대로 경매장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낙법을 취할 새도 없이 바닥을 구른 그녀가 먼지를 먹은 침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매장 안은 참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나마 현성과 서한이 대부분 민간인을 대피시키긴 했지만, 통로가 좁고 지하인 탓에 아직도 사람들이 나가던 도중이었다.
“뭐야, 괜찮아?”
미노타우로스의 도끼를 피하고 단숨에 뒤로 도약한 서한이 진희에게 물었다.
“서한 씨가 더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말 잘하는 거 보니 괜찮네.”
서한이 비죽 웃고는 다시 앞으로 돌진했다. 서한과 현성의 온몸엔 상처가 가득했다. 치명적인 공격을 허용하진 않았는지 출혈은 적었다. 그러나 입고 있던 정장은 다 해져 있었고, 무기를 들고 있는 손아귀는 찢어졌다.
미노타우로스의 괴력에 밀린 결과였다.
“테러범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진희는 가만히 현성을 돌아보았다. 서한과 마찬가지로 잔상처가 많은 현성은 끊임없이 주술을 시전하고 있었다. 관심 없이 질문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현성의 모습에 진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 만큼 때려놓긴 했는데, 죽었는지는 확인 못 했어요. 그 펜이 무슨 살생부 적는 펜이라서, 반항도 못 하고 끌려왔네요.”
“아티팩트군요. 그런 조건을 가진 아티팩트는 흔치 않은데…….”
진희가 무릎을 털고 검을 쥐었다. 변화된 형태는 양손 검, 저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선 한 손 검으론 힘들 것 같았다.
“우선 사람들부터 대피시키고 지원군 부르죠. 아무리 봐도 저번 드래곤보단 강해 보이는…….”
“이, 이봐아! 문이 막혔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어!”
“게이트예요! 게이트가 사방에……!”
“…….”
이제 갇히고 말았네, 진희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 테러범 꼬맹이를 확실히 죽여 놨어야 했다.
“야! 가만 보고 있지 말고 좀 도와!”
서한이 비명처럼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퇴로는 사라졌다. 이제 이 넓은 경매장에서, 고작 세 명으로 저 괴수를 레이드해야 한다. 대상의 강함은 드래곤 이상. 현성과 서한이 죽도록 때렸지만 제대로 된 상처조차 입지 않은 괴물.
이곳에서 자신들이 진다면, 이곳에 남은 사람들마저 모조리 살해당하겠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압박과 부담이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후우, 가요.”
하지만 그녀는 앞으로 걸어갔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섰으나, 물러선다는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검을 메고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본 현성은, 마찬가지로 주술을 마무리하며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