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45화
‘수정구에 피 한 방울과 강한 마력을 가하면 깨질 거야. 지문인식 같은 시스템이거든 이게. 수정구의 주인을 인증시키는 거지. 그럼 던전이 생성될 거야.’
‘아마 일회용이지 않을까? 아무리 대단한 제작자라고 해도, 이 작은 용량에 반영구 던전을 만드는 능력은 없을 것 같거든.’
니케의 감정(鑑定)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현성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수정구가 들어 있는 자신의 가방을 내려다보았고, 진희는 상점을 나오면서 내내 고민에 휩싸인 듯 말이 없었다.
“이거 함정이겠죠?”
“……네.”
진희의 물음에 현성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들도 괴짜의 성격쯤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니케는 태연스럽게 수정구를 열면 던전이 나온다고 말했지만, 그 던전이 어떤 던전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진희와 현성은 동시에 생각했다.
“하지만 감정을 받은 건 사실이니, 보수는…….”
“해줘야죠.”
감정이 끝난 직후, 니케는 보수의 일종으로 자신의 호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특이한 내용은 아니었다. 오늘 늦은 저녁, 뉴욕에서 아티팩트 경매가 열리는데 그곳에서 경매가 끝날 때까지만 경호를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이것도 물론 수상쩍었다. 보수에 관해 이야기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호위 의뢰를 하는 것부터가 의심스러웠다.
결국 괴짜라 그런 것이다, 하고 납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돈을 원했다면 편했을 텐데, 현성은 이미 닫혀버린 상점 문을 바라보았다.
“아, 진희 씨. 저 볼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호텔로 먼저 돌아가실래요?”
“무슨 일이신데요?”
“본부에 저 괴짜에 대한 정보를 보고해야 하거든요. 파견 요원이 나와 있을 테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해요.”
진희는 가만히 현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웃음기 어린 얼굴이었다. 진희는 손가락을 뻗어, 얄궂게 초승달을 그리고 있는 그의 눈매를 눌러보았다.
“……?”
“네, 먼저 가 있을게요.”
몇 번 꾹꾹 눈가를 누르던 그녀는, 돌아서서 왔던 길로 돌아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현성은 자신의 눈을 몇 번 매만지고는 진희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거짓말은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지, 진희는 현성의 기척이 멀어지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최근 현성이 의도적으로 진희와 거리를 두려 하고 있음을 느끼던 중이었다.
하여간 이래서 복잡한 인간관계는 싫다. 진희는 오랜만의 한숨을 내쉬며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다.
택시를 타고 돌아갈까, 아니면 도시 구경이나 하게 버스라도 타볼까. 폰을 꺼내서 경로를 확인하려던 그녀는, 문득 골목 한가운데서 걸음을 멈췄다.
“요즘은 골목에서 말 거는 게 유행인가?”
골목의 건너편에서 한 소년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저 옷차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검은색 후드티를 입은 창백한 피부의 소년. 약초밭에서 만났던 그 인형술사, 레인이었다.
“뭐야, 영상이네?”
진희는 단숨에 소년의 형상이 실체가 아니란 걸 눈치챘다. 미약한 마력의 흔들림과 희미한 그림자를 보니, 마법을 통한 영상 송출인 듯했다.
“무슨 일이니, 꼬맹아?”
“꼬……. 후우, 됐어.”
레인은 팔짱을 끼며 거만하게 말했다.
“역시나 그 아티팩트를 감정하러 왔네.”
괴짜도 자기가 올 줄 알고 있었다던데, 이젠 테러범까지 알고 있네.
의외로 동네방네 소문난 거 아닌가 싶었다. 진희가 말이 없자 그녀가 긍정하고 있다 생각한 건지 소년이 더 기세등등한 자세로 말을 이었다.
“네 행적은 이미 다 알고 있거든.”
“…….”
“누군가가 널 미끼로 삼고 있으니까.”
아하, 그런 말을 하려고 온 거구나. 진희의 눈썹이 움찔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경우엔 가만히 있는 게 좋다. 혼자 기세가 오른 상대방이 알아서 정보를 내뱉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누군지 모르겠어?”
“글쎄.”
“하하, 당연히 같이 다니는 둘 중 하나잖아.”
레인이 나타난 이유는 뻔했다. 진희 자신의 정보가 탄로 났으며, 그게 네 동료 때문이라고 이간질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뻔한 전략이지만 타이밍이 적절했다. 마침 서한도 용무를 위해 자리를 비웠고, 현성 또한 계속해서 의심스러운 행보를 보이던 참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진희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뚜벅뚜벅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진희를 보며 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못 믿어? 내가 널 찾은 게 우연인 것 같아?”
“아니, 믿긴 해.”
레인의 말은 타당했다. 누군가가 정보를 흘리지 않은 이상, 맨해튼에 온 지 하루 만에 테러범이 자신을 찾아올 리 만무했으니까.
진희는 레인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레인과 얼굴을 마주했다.
“괜찮은 마법이네. 어디서 마법을 썼는지 짐작도 안 되고, 형태와 목소리도 잡음이 없어. 연구 좀 했나 봐.”
“당연하지, 난 너희보다 훨씬 뛰어난…….”
“많이 무서웠나 보다, 너? 이런 마법까지 써서 나 보려 하는 거 보니까.”
“……!”
레인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을 열진 못했다. 진희는 그 모습을 보며 히죽 웃으며 좀 더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짜였다면 서로 숨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진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진희의 분위기에 압도된 레인이 말을 잊었다.
“꼬맹아, 네가 말하고 싶은 건 잘 알겠어. 내가 서한과 현성을 의심하길 원하지?”
“난…….”
“걱정해 주는 건 참 고마워. 하지만 말이야.”
진희는 만져지지 않는 레인의 턱에 손을 올렸다.
감촉이 느껴지지 않음에도 어째서인지 목이 졸리는 기분에 레인이 뒷걸음질 쳤다.
“근데 처음 만날 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너, 너…….”
“난 너랑 친구 될 생각 없어.”
오늘의 진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갱스터들이 시비를 걸었을 때. 현성이 미심쩍은 행동을 할 때. 그리고 니케를 만난 방의 이상한 분위기와 마력을 느꼈을 때.
짜증이 일었다. 오늘의 일과는 하나같이 별로였다.
“야, 꼬맹아.”
“…….”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는데.”
진희의 얼굴은 아직까지 농담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음습한 살의는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린 테러범이 이간질하러 온다고 해서 흔들릴 만큼 물렁한 사람이 아니었다.
“너 또 보면 죽인다.”
“…….”
“다시 한번 내 눈앞에 나타나면, 그때가 마지막이야. 넌 죽어. 내 손에.”
진희의 손이 레인의 목에서 천천히 심장으로 향했다.
약초밭에서 그녀가 베어버리려고 했던 바로 그 부위다. 이 몸에 슬슬 익숙해진 만큼, 저번과 같은 실수는 더 이상 없다. 기회가 된다면 단숨에 숨통을 끊을 것이다.
“알았니?”
“…….”
레인은 말이 없었다. 진희는 레인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저 그의 환상을 뚫고 골목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던 레인은 뒤늦게 살의를 담은 눈길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진희는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녀에게서 잘렸던 팔의 통증이 레인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 * *
“무슨 옷을 줘야 어울릴까?”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봐?”
“응, 생각보다 더.”
진희와 현성이 나가고 난 후, 니케는 곧장 방으로 돌아가 옷을 들고 나왔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원단의 여성 정장들을 들고나온 니케가 제이미에게 옷을 들이밀며 물었다.
경매에 입장하기 위해선 나름의 복장 규정을 맞춰야 한다. 캐주얼한 복장은 입장조차 불가능하다 보니, 호위라고 해도 정장을 입고 있어야 했다.
니케는 그 핑계로 진희에게 옷을 입혀볼 생각에 신이 났다.
“……그 아이가 입어 줄까?”
“입을걸? 자기 말은 무조건 지키는 성격일 거거든.”
니케는 이미 진희의 성격을 짐작한 듯, 불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우릴 좋게 생각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말한 건 지키는 성격이라 따르긴 할걸. 뭐, 기분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하긴 그렇겠지, 제이미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적당히 좀 하지. 이 방, 냄새가 좀 지독해.”
방을 맴돌고 있는 향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호감, 진정과 안정을 주는 효과를 가졌다. 일반인이라면 알아채기 힘들 테지만, 진희나 현성급의 헌터라면 눈치챘을 게 뻔했다.
“친해지고 싶었는걸.”
“네 표현 방식은 역시 문제가 좀 있네.”
새삼스럽지만. 제이미는 쓰게 웃었다.
니케에겐 호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호감을 끌어낼 수 있는 향을 방 안 가득 채우고 그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진희와 현성은 들어올 때부터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간 만났던 의뢰인들이 총이나 검 따위를 먼저 들이밀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제이미는 어땠어?”
“응?”
“용의 별을 눈앞에서 보고 싶어 했잖아?”
“글쎄…….”
제이미는 진희의 인상을 떠올렸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인지, 나른해 보이는 눈동자 안엔 불만과 언짢음만이 보였었다. 웃는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지만, 동시에 화를 내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 담대한 성격이 무너지는 꼴이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제이미는 참 생각을 알 수 없단 말이지.”
옷을 고르고 있던 니케가 작게 웃었다.
“하여간, 오늘 저녁이 너무 기대된다.”
이힛히, 괴상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니케가 다시금 옷을 고르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아! 제이미, 오늘 저녁도 같이 와줘야 해. 입장권은 따로 있으니까, 뒤에서 날 보호해 줘.”
“오늘 저녁도 위험한 거야?”
“응, 본 무대가 시작되면 날 죽이려 할지도 모르거든.”
잘 부탁해- 산발이 된 금발을 흔들며 옷장을 뒤지는 니케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미는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야.”
* * *
“오늘 저녁에 경매를 나간다고?”
“네, 호위로요.”
“허.”
저녁 무렵, 호텔로 돌아온 서한은 진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물게도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 경매, 뉴욕에서 열리는 거지?”
“네.”
“아티팩트가 거래되고, 네이트선 호텔 지하에서 개최되는 거고.”
“아마도요?”
“그거 스폰서가 우리 기업이야.”
서한이 왁스로 굳혀두었던 머리를 손으로 헤집으며 말했다.
“뭐, 허울 좋은 스폰서긴 하지만. 이번에 이곳에 출장 온 이유 중 하나거든.”
“큰 행사입니까?”
“크다고 하기보단…….”
서한이 마침 자료가 있다면서 서류 가방에 들어 있던 인쇄물을 현성에게 던졌다. 흑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팸플릿에는 경매장에서 나올 물건들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유물 혹은 아티팩트들이다. 하릴없이 책자를 넘기던 현성이 마지막 페이지를 보고 손길을 멈췄다.
“크레타 왕국의 숨겨진 벽화, 아테나의 혈흔(血痕)이 남은 깃털 펜? 이거 진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