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42화
“하여간 그래서 난 다음 주부터 넉넉히 일주일은 없을 거야. 카온은 되도록 원내에서 나가지 말고 집 잘 지켜.”
“예.”
“소라네도 마찬가지야. 혹시 무슨 일 있을 것 같음 카온이나, 시영이한테 말하고.”
“시영이요?”
종혁이 되묻자 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보여도 너희 좋아해서 부르면 달려올걸?”
“…….”
종혁을 제외한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 잘 다룬다는 원생 연장자들이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심심하면 ‘오늘 저녁 같이 먹을래?’ 하고 문자라도 보내봐. 장담하는데 택시 타고 날아온다.”
아무래도 이 중에서 시영의 성격을 아는 건 종혁뿐인 것 같다. 진희가 종혁을 바라보자, 이해했다는 듯 종혁이 웃었다.
시영은 C급 헌터이자, 곁에는 B급 헌터인 나윤수도 데리고 다니고 있다. 그들이 보육원에 지내는 것만으로도 안전을 대비할 수 있었다.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도 사 오라고 해봐.”
“…….”
거기까지 시키는 건 좀 그런데. 진희가 헛기침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하여간 너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혹시나 위험할 수 있어서야. 이번 일이 끝나면 나는 슬슬 집을 알아보려고 하니까 그때까지만 조심해.”
“언니, 나가시나요?”
“그래야지.”
서진희라는 헌터에게 관심이 생긴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물론 보육원에 대한 후원이나 훈련을 그만둘 생각은 없지만, 거처를 옮기는 건 예정된 바였다.
정산하면서 돈도 제법 생겼고, 주변에 괜찮은 주택이라도 하나 마련해야겠지.
“…….”
아이들의 얼굴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그녀가 이곳 주민도 아니니까, 언젠가 나가게 될 거라고 생각은 줄곧 해왔었다. 막상 그 사실이 닥쳐오니 섭섭함이 몰려왔다.
“너희도 성인 되면 나오게 되지?”
“아, 네.”
“그럼 언니한테 와. 단원 챙기는 것도 단장의 일이니까.”
숙식 제공 정도는 할 수 있지. 진희가 태연하게 말하자, 3인방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헤어지더라도 만날 기회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굴이 밝아졌다.
이렇게 얼굴에 감정이 뻔히 드러나서야 어른 되긴 멀었네. 진희는 작게 웃었다.
아직 성인이 되려면 먼 청하가 혼자 침울해질 것 같기에, 진희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청하는 그전에 빨리 강해져야 돼.”
“네, 네?”
“그래야 저 누나 형들이 나가고서, 네가 아이들을 훈련시킬 수 있을 테니까.”
“네!”
자신을 믿겠다는 진희의 말에 청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 위로해 주다 보니 이야기가 헛나갔다. 진희는 큼, 하고 헛기침을 낸 후 다시 책상에 자신의 여권을 툭툭 쳤다.
“그렇게 되었으니, 난 다녀올게. 집 잘 지켜.”
“네!”
아이들의 우렁찬 대답을 들으며, 진희가 여권을 집어 들었다.
‘저번 주엔 드래곤을 잡더니 다음 주엔 미국에 가게 되네.’
진희는 헌터 되고 인생이 재밌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 *
악몽은 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준다.
‘모르시겠나요? 이건 유품이에요.’
‘이제야 당신의 죄를 깨달으셨군요.’
‘죽어라, 제발. 제발, 죽어줘. 우리 아이가 천국에 갈 수 있도록…….’
‘바제트 경. 당신은…….’
악마야.
무거운 죄는 그녀를 옥죈다.
“…….”
“괜찮아요?”
진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등이 차가운 걸 보니, 잠을 자는 동안 식은땀을 어지간히도 흘린 것 같았다.
와인 한 잔을 내밀며 걱정스럽단 어조로 묻는 현성에게 그녀가 손짓했다. 필요 없단 의미에 잔을 거둔 현성이 말했다.
“내내 땀을 흘리더군요. 악몽이라도 꿨나요?”
“……비슷해요.”
내 악몽은 아니었지만. 진희가 의자에서 등을 뗐다. 찐득한 등의 감촉이 마음에 들지 않아, 팔걸이에 있던 냅킨을 등에 집어넣었다.
현성이 쓱 고개를 돌렸다.
장소는 하늘 위, 비행기 안이다.
현성과 진희는 서한이 빌린 비행기를 얻어 탔다. 서한이 자기 회사 계열사의 비행기를 타고 간다고 하자 현성과 둘이 따로 좌석을 예매하려 했으나, 무료로 태워준다는 서한의 이야기에 따라 타게 되었다.
대기업의 후계자가 타는 비행기는 확실히 남달랐다. 마정석을 이용하여 내부의 마나를 조정할 수 있었고, 주류와 음식 또한 얼마든지 서비스해 준다.
물론 진희는 이 정도의 호화스러운 대접에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귀족이었을 때도 이 정도의 대접은 충분히 받았으니까.
자기 비행기인 양 편하게 있는 진희를 보며 오히려 서한이 묘한 얼굴로 지켜보았었다.
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마치 여름날에 낮잠 중 악몽을 꾼 것 같아, 온몸이 욱신거렸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창가 쪽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서한에게 다가갔다.
“언제쯤 도착해요?”
“한 세 시간 남았네.”
인천에서 미국 뉴욕까지 14시간걸리는 일정이었다. 한숨 푹 자고 났더니 도착이 코앞이다.
찝찝했던 기분이나 풀 겸, 진희는 서한이 줬던 호텔 팸플릿을 뒤졌다.
그들의 숙소는 맨해튼에 위치해 있었다. 서한의 말로는 헌터들 전용 호텔이 있다 하여 그쪽으로 예약을 잡아뒀는데, 뉴욕에서 내린 후 즉시 호텔로 갈 예정이었다.
괴짜를 만나기로 한 것은 내일. 우선 하룻밤 잔 후 괴짜의 주거지로 추정되는 상점으로 향하기로 했다.
“근데 그 괴짜란 사람, 정말 거기 살긴 한대요?”
“아마도.”
괴짜의 마지막 행적은 맨해튼의 이스트 할렘이었다. 듣자 하니 타이완 커뮤니티에서 예술작품이랍시고 불법 아티팩트를 팔아 재끼다 검문을 받았다고 했던가.
“요즘도 할렘은 위험한가요?”
영화나, 드라마에선 자주 위험한 지대로 비치다 보니, ‘할렘가’라고 하면 부정적인 첫인상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진희의 물음에 서한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최근엔 발전도 많이 돼서 예전과 같진 않다고 하더라. 게다가 혹시나 위험하다고 해도.”
서한의 턱 끝이 진희와 현성을 한 번씩 가리켰다.
“지금 이 셋보다 위험할 일은 없어. 어디 영웅급 헌터가 출몰하지 않는 이상엔.”
“자신만만하네요.”
“지나치게 겸손한 것도 문제거든.”
서한이 책을 덮으며 일어섰다. 그리고 아까 진희가 거절했던 와인 잔을 테이블에서 가져왔다.
“우리가 그렇게 강하던가요?”
“…….”
그리고 한 모금 마시려다, 진희의 순순한 의문에 기침할 뻔했다.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눈 좀 붙이려고 앉았던 현성마저도 헉하고 진희를 바라보았다.
“난 네가 당당한 게 이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약하다고 당당하면 안 되는 이유 있어요?”
“넌 가끔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한단 말이지.”
아니라고 하면 문제가 복잡해질 걸 알기에, 서한은 헛웃음을 지으며 부정했다.
“한국은 A급 심사에 까다로워. 지금은 잘 쓰지 않는 계급이지만, 숫자 계급을 사용했을 땐 더 심했지. 1급이 곧 A급이었는데, 이 1급이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할 업적이 해외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거든.”
한국은 헌터에 다소 타이트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마력만 높으면 최상등급을 주는 중국이나, 특이한 능력일수록 우대하는 유럽, 헌터 자유도가 매우 높은 미국과는 사뭇 달랐다.
“지금은 숫자 계급과 국제 등급을 동일시하고 있지만, 과거에 독자적인 계급제도를 두고 있었을 땐 한국의 헌터 승급이 어렵다고 소문이 났었어. 옆 나라에 건너가서 국제 등급으로 승급한 다음, 국내로 돌아와 등급 호환을 노리려던 헌터가 있었을 정도니까.”
국제 계급으로 표준화한 지금도 그 관례는 남아 있었다.
한국에서의 A급이란 마력량, 던전의 업적, 도덕적 기준까지도 얽힌 매우 복잡한 승급과정을 거쳐야 했다.
“지금은 그 기준을 좀 완화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서한이 슬쩍 현성을 바라보았다. 현성은 물끄러미 이곳을 바라보다 한마디 거들었다.
“글쎄요, 상급 헌터가 그만큼 모범적인 사람들이라면 기준이 풀리겠죠.”
“공무원들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힘들지. 하여간 덕분에 해외에선 오히려 한국의 A급 이상의 헌터라고 하면 제법 인정해 주는 편이야. 성실하고, 실력 좋고, 경험이 많으니까. 반대로 고여 있다고 욕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기에 서한과 진희, 현성의 힘은 해외에서도 유별날 정도라고 판단하는 게 맞았다.
헌터 산업이 크게 성장하면서, 한국의 경제 순위 또한 큰 폭으로 올랐다. 대기업들의 아낌없는 투자와 작은 토지에 비해 압도적인 인재풀 덕에, 한동안 유행했던 ‘세계 헌터 랭킹’의 상위권엔 항상 한국인이 한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만큼 한국의 상위 헌터들의 수준은 세계에서 비교해도 유의적으로 높다.
헌터가 되기 전엔 이쪽 방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던 진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매일 헌터가 부족하다 하잖아요.”
이번에 대답해 준 건 현성이었다.
“대부분의 중급, 중상급 헌터들은 다 해외로 나가기 때문이죠.”
“왜요?”
“대우가 좋지 않으니까요.”
“우리 기업은 언제나 최상급 대우야.”
“금강과 같은 대기업‘만’ 그렇죠.”
인재는 많으나, 인재 경시 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C급 헌터에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관문급’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실제로 기업에서도 C급 헌터를 그처럼 취급하기도 했다.
위험수당이 지대한 헌터라는 직종의 경우 기업에 들어가게 되면 사후 보험부터 의료 복지, 가족 부양 등 온갖 케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중소기업의 경우 B급의 소수 헌터만을 그렇게 대우해 주고, 차고 넘치는 C~D급 헌터들은 홀대하는 게 현실이었다.
C급 헌터만 하더라도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에 언론에는 크게 어필이 되지 않았지만, 해외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위급 헌터에 한해선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업적도 좋고, 대우도 좋지만……. 중간급 헌터는 매우 부족한 현실입니다. 다른 나라가 피라미드형의 헌터 인구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나라는 점점 표주박형으로 변하고 있다고 하는 게 맞겠군요.”
표주박형은 중간, 중상 계층이 적은 구조를 뜻한다. 최상등급의 헌터는 잘 늙지도 않으니 그 수가 변하지 않지만, 중간급 이상의 헌터는 대부분이 해외로 진출하는 형태다.
그래서 정부가 헌터 아카데미와 같은 기관에 힘을 주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신입 헌터를 키워, 전체 헌터 수를 맞추기 위함이었다.
“대기업이 조금만 더 독과점을 포기하면 좋겠지만요.”
“독과점이라니, 법에 접촉되는 건 없어.”
“법을 잘 피한 거겠죠.”
현성과 서한의 논쟁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대기업만 가려고 하는 헌터들의 현 상황이 누구 탓인지, 초창기 헌터 시장을 장악해서 성장해놓고 파이를 나누지 않으려는 대기업의 적폐, 그럼에도 중견 기업에 큰 혜택을 주지 않고 있는 국가…….
이야기가 길어지자 진희는 슬쩍 자리에서 도망갔다.
정치를 모를 땐 안 끼어드는 게 정답이다. 괜히 저 극과 극 사이에 서서 불똥 맞고 싶지 않았다.
진희는 바에서 서한이 마셨었던 와인을 꺼냈다. 닫아놓았던 실리콘 마개를 따고, 병째로 들고 창문가에 가서 앉았다. 한 모금을 크게 마시고, 아까 먹다 남은 스낵 부스러기를 입에 넣었다.
슬슬 뉴욕 도심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