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39화
“대화해 보면 안다니까. 지금은 낯을 가리는 것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종혁은 시영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정쩡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시영은, 이내 자기가 한 일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어깨를 펴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종혁이 형은 진짜 성격 좋은 것 같아…….”
그 모습을 보며 청하가 중얼거리자, ‘성격 좋지 못한’ 민혁과 소라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나도 물어봐야지.”
청하는 소라와 민혁을 두고, 종혁에게 쏜살처럼 달려나갔다.
“……우리도 갈까?”
“……그래.”
소라와 민혁도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진희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 카온의 방패는 왜 박살이 난 채 돌아온 건지,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종혁에게 시켜서 물어보게 할까, 둘도 잰걸음으로 공원 쪽을 향해 걸어갔다.
* * *
“짐은 다 실었다.”
“정산 금액은 얼마 정도 나올까요?”
“글쎄, 큰 금액은 아니겠지.”
카온과 함께 차에 모든 보물을 실은 서한이 진희에게 다가왔다. 굳이 그런 일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으나, 서한은 의외로 궂은일에 편견이 없었다. 파티원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라며 몸소 카온과 함께 짐을 옮겼다.
사실 아직 마음에 드는 인상(얼굴)은 아니지만, 이런 면에선 소탈한 예전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비율은 어떻게 해요?”
“후위 1, 전위 9로 나누고, 전위 중에 메인 탱커에게 3을 줘야지.”
“아항.”
카온이 3, 진희와 서한 그리고 현성이 각각 2, 그리고 후위에게 1을 나눠주겠단 이야기였다. 가장 고생하는 메인 탱커가 금액을 많이 가져간다는 정산 방법엔 진희도 동의했다.
‘어차피 카온 돈이 내 돈이기도 했고.’
“당신도 가져가나요?”
“당연하지.”
서한이 팔짱을 끼며 대답하자 진희가 농담이라는 듯 웃었다.
‘돈도 많은 양반이’라는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서한이 순간 이를 갈았다.
“그런데요.”
“응?”
“그렇게까지 모르는 척할 필요 있어요?”
“뭐가.”
“당신 동생 말이에요.”
진희가 턱 끝으로 자신의 뒤편을 가리켰다. 공원의 벤치에선 시영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법이 얼마나 강했는지, 드래곤의 브레스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떠들고 있다.
처음 이곳에 찾아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모르는 척한 적 없어.”
“거짓말하시네, 또.”
쯔쯔, 하고 혀를 찬 진희가 말을 이었다.
“그냥 칭찬 한 번 하고 넘어가면 될걸. 자존심이에요, 아님 경계하는 거예요?”
“경계? 내가? 쟤를?”
서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하자 진희야말로 눈살을 찌푸렸다.
“후계자들끼리 눈치 싸움 그런 거 아녜요?”
“……네가 보기에, 내가 중학교 2학년 애한테 이 자리를 뺏길 거 같아?”
“어…….”
그건 그렇다. 지금의 인생보다 긴 세월을 신분제 사회에서 살다 보니, 나이 불문하고 후계자 싸움에 목숨을 거는 걸 당연하다 생각했다.
미성년자를 대신하는 섭정(攝政) 같은 개념이 현대에 있을 리 없으니, 서한의 의문은 당연했다.
“그럼 왜 그렇게 무시하는 거예요?”
“……무시하는 게 아니야.”
서한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그저 저 녀석이 금강에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거지.”
“어울리지 않아서 내쫓는 형제란 게 있나요?”
“……그것도 참 정론이긴 하네.”
직설적으로 말하는 진희의 물음에 서한이 끙,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표현하니 마치 자신이 천하의 패륜아가 된 느낌이었다.
“너, 박준에게 셋째 얘긴 들었어?”
“일반인으로 살고 있다는 사람이요?”
“맞아. 성인이 되자마자 바깥으로 나가서 살고 있지. ……무진장 행복하게.”
서한이 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녀석은 학생 때 온갖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어. 중학생 때부터 주식을 배워서 주주 노릇을 해야 했고, 고등학생 때는 날고 기는 임원들 앞에서 회사 비전을 위한 브리핑도 했지. 헌터의 재능이 없었으니, 회사의 우두머리가 배워야 할 온갖 일을 조기 교육받은 거야.”
미성년자이기에 직책은 없었으나 사내의 온갖 일을 도맡아 해봐야 하는 처지였다. 헌터의 재능이 있으며, 동시에 남들 앞에 서는 게 두렵지 않은 서한과는 달리 셋째는 매일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그리고 평가되지. 임원들, 주주들, 사원들,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평가를 받아.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분기, 반년, 일 년. 그렇게 받은 평가를 피드백하고, 다시 후년의 성취 계획서까지 적는 게 중학생 때부터 반복되었어.”
“……당신도 했나요?”
“했지.”
첫째인 서한은 통과했다. 그것도 매우 압도적인 점수와 평가를 받으며 통과하여, 단숨에 후계자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그 탓에 평가하는 이들의 안목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서한이 높은 점수를 받은 만큼 셋째에게 향한 시선은 엄격해졌고, 위 형제가 했던 일을 못 한다는 타박만이 늘어났다.
셋째가 만약 그 위의 형제들처럼 당당하거나 능글맞았다면 괜찮았겠지만, 태생이 성실했던 그에겐 무리였다.
“그렇게 낮은 점수로 인해 가문에서 내쫓기는 첫 번째 탈락자가 됐지. 처음엔 녀석도 침울해져서 한참을 방에서 나오지 않았어. 그런데…….”
셋째가 가문을 나가고서 몇 개월이 지난 후,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서한은 셋째를 만나러 갔었다.
그가 사는 곳은 일반 주택으로, 열 평 남짓한 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가문에서 내쫓긴 동생에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던 서한은, 그곳에서 밝은 웃음을 되찾은 셋째를 만나게 되었다.
“요리를 하고 있더라고.”
“요리?”
“응, 집 주변 맥줏집에서.”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웃긴다. 서한이 작은 웃음을 머금었다.
셋째는 야간에는 요리를 하고, 낮에는 놀러 다니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탈락했다는 사실에 절망해서 폐인이 되어 있지 않을까 고민하던 어머니의 생각과는 달리, 어느새 애인도 사귀고 정말 평범하면서 행복한 성인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서한은 새삼 깨달았다.
“거긴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고. 술에 취해서 셋째가 말하더라.”
물론 셋째가 지금 행복하게 사는 건, 그만큼 많은 재산을 들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집을 나갈 때 가져갔던 금액은 일반인이라면 일평생을 걱정 없이 살 정도였으니까.
셋째는 하루하루 유복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일반인과는 다른 출발점을 가진 셈이다.
서한은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면, 과연 셋째처럼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장담할 수 없었다. 서한에겐 셋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성취욕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은 서한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셋째가 그러했듯이.
“……시영이도 셋째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봐요?”
“조금은.”
시영이 중학교 1학년이 될 무렵이 떠올랐다. 시영이는 중학생이 되자마자 온갖 후계자 수업을 시작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다. 늦은 밤, 이불 속에서 울며 잠들던 막냇동생의 얼굴을 보며 서한은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 바라지도 않는 후계자 교육을 시키는 게 옳은 것인가, 하고.
하지만 아직 기업의 우두머리는 변하지 않았다. 그들의 아버지의 생각은 확고하고, 그걸 거역할 수단도 없다.
그래서 서한은 시영이 노력하지 않길 원했다. 그저 중학생답게 놀고 즐겁게 지내길 바랐다.
“직접 널 위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면 되잖아요?”
“……너라면 믿겠냐?”
“…….”
“안 믿겠군.”
후계자 싸움을 종용하는 시스템 속에서, 맏형이 자기보고 ‘일하지 마라’고 한다면 의심할 게 뻔했다.
또 서한은 시영에게 그만큼 신경을 쏟을 정도로 동생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가진 감정이란, 그저 괜한 자리에서 고생하지 말고 네 갈 길 가라는 정도의 약간의 동정심뿐이다.
그들에겐 형제애라는 개념을 보기는 어려웠다.
어려운 문제다, 진희는 복잡하게 얽힌 형제의 관계를 생각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시영은 가족에 남길 원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곁에서, 그리고 대하긴 어렵지만 대단한 형이 자신을 사랑해 주길 바란다.
서한은 시영이 떠나길 원한다. 시영을 동생으로서 크게 사랑하진 않지만, 굳이 이곳에서 힘들게 평가당하며 살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이 와중에 둘의 나이 차이는 띠동갑을 넘어선다. 동생보다는 삼촌과 조카 사이쯤으로 보일 지경이니, 친하게 지내길 바라는 것도 무리였다.
“……만약 당신이 다음 회장이 된다면 셋째 아들도 집으로 돌아오나요?”
“걔가 원한다면 그렇겠지.”
‘뭐야, 형제애는 없다면서 상냥한 구석이 있었잖아.’
서한이 은근슬쩍 눈을 피하며 대답하자 진희가 피식 웃었다.
서한은 이 비틀린 가족을 구하기 위해선 자신이 다음 회장이 되어 구조를 바꾸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 사이에 가장 큰 벽은 나이가 아닌 회장이라는 지위였으니까.
“그걸 자기 동생한테 말하면 될 텐데.”
“…….”
그 생각을 표현할 정도로 친근한 성격은 아니겠지. 서한과 같은 성격이 얼마나 귀찮은지 잘 알던 진희는 혀를 차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시영이 그토록 서한의 눈치를 보면서도, 진희에게 부탁해서 던전을 가는 등의 제멋대로인 활동을 펼치는 게 이해가 됐다. 알게 모르게 서한이 그 뒤를 봐주고 있는 거겠지.
‘내 생각은 모조리 말하게 해 놓고 평가만 하고 가는군.’
진희의 뒷모습을 보며 서한이 물었다.
“넌 언제 밝힐 거야?”
“뭘요?”
“그 검술이나 힘, 대체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어?”
“제가 좀 천재라서요.”
“…….”
결국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고 넘어가는 진희를 보며 서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언제부터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 왜 시영에게 이토록 신경을 써주는지, 카온의 정체는 무엇이고, 왜 보육원을 후원하는 것인지.
궁금한 게 많은 만큼 진희에게 관심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의 행적이나 실력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서진희라는 인물이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친숙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첫 만남 때부터 그녀가 검을 쓰는 걸 본 조금 전까지. 진희에게 계속해서 눈이 갔다.
서한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침 던전에서 진희에게 화를 내던 자신이 떠올랐다.
대체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호기심, 관심, 짜증, 호감과 경계심. 복잡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