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34화
“……감정 맡겼다는 건 뭔 물건이야?”
“네? 아, 나윤수 씨가 들고 갔던 물건이요?”
진희는 순간 무슨 말인가 싶어 서한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그가 말하는 물건이 던전에서 얻은 ‘수정구’임을 눈치챘다.
윤수는 시영의 곁에서 밀착 경호를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온 현성이 윤수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자, 보육원까지만 시영을 경호한 후 자취를 감추었다. 처음엔 임무 하달인가 싶었지만 이내 진희와 현성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짐작했다.
현성이 직접 전해줄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라면 서한으로선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현성이나 윤수에게 물어볼까 고민하다, 문득 진희에게 대놓고 물어보는 게 효과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간의 말실수 경험이 효과가 있었는지, 진희는 흘끔 서한을 바라보다 정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거 그 테러범들이 찾던 거예요.”
“……그런 중요한 걸 맡겨도 되나?”
진희가 손을 다친 이유와, 본래는 현성이 담당해야 할 시영의 경호를 윤수가 담당했던 이유가 같다는 건 어젯밤 브리핑 도중에 들었다.
그곳에서 얻은 보물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지만, 그만큼 중요한 물품을 현성에게 덜컥 맡긴 진희의 생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더 돌아다니기 귀찮아서요.”
“……내가 할 말은 결코 아니지만, 방위대는 결코 친 헌터 조직이 아냐.”
그건 금강뿐 아니라 헌터를 운영하는 기업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에 대해 굳이 근거를 더하긴 싫은 듯, 그는 가만히 진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진희는 빤히 서한을 바라보다, 작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래서 현성 씨가 절 배신하면 제 눈이 잘못된 건가 싶겠죠. 귀찮음 많았던 제 태도도 문제고.”
“…….”
서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그렇게 함부로 믿는 거 아니다.”
물론 나도 믿진 말고. 그 뒷말은 저도 모르게 삼키면서, 서한은 진희를 앞질러 걸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희는 세상 웃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케네스 얼굴로 저 소릴 하니까, 진짜 한 대 패주고 싶네.’
진심이었다.
* * *
게이트는 폐건물 안에 위치해 있었다. 서한은 용케 이런 게이트를 찾았구나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현성은 스마트 워치에 감지되는 마력량을 보고 앓는 소리를 냈다.
“진짜 2급이군요. 나 참, 이런 서울 한복판에…….”
신고되지 않은 상급 던전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역에서 20분 거리의 건물에서 2급짜리 던전이 출몰할 줄이야. 정부 소속인 그는 고민이 많은 듯 한참을 중얼거렸다.
“그럼 입장하기에 앞서!”
장비를 점검하던 일행은 진희의 말에 주목했다. 진희는 과장되게 손뼉을 몇 번 치곤 게이트를 가리켰다.
“이제부터 첫 원정에 들어갑니다. 주의사항은 어제 다 말했고, 서로의 역할은 모두 숙지했을 거라 생각해요. 그저 자신의 역할만 잘 수행해 주세요.”
진희는 시영을 보며 빙긋 웃었다. ‘정말 하는 거야?’라는 시영의 눈빛에 진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디까지나 당황하지 말고. 방심하지 말고. 다치지 말고 잘 끝냅시다.”
진희가 말을 끝내고 게이트에 입장했다. 기지개를 켜며 즐거워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서한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근데 우리 중에 쟤가 제일 초보 아니냐?”
“……그걸 이제 와서 따지기도 늦긴 했죠.”
서한이 짐짓 억울한 듯 현성에게 물었지만, 현성은 안쓰럽단 대답만 해줄 뿐이었다. 기사단도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늦었어. 서한은 그건 그렇네 하고 저도 모르게 수긍했다.
“쓸데없는 말.”
서한과 현성이 게이트에 입장하고 그 뒤를 곧장 따라가던 카온은 혀를 차며 뒤따라갔다.
“……저 사람들 사이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나도 몰라. 말 걸지 마.”
마지막으로 윤수와 시영이 뒤따랐다. 서로의 사정을 모르는 윤수가 시영에게 묻자, 안 그래도 머리가 복잡하던 시영은 윤수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다.
중학생이라 그런지 까칠하네, 윤수는 삐죽 입을 내밀었다.
* * *
게이트에 입장하자 널따란 광장이 보였다. 벽은 정체불명의 검은색 돌로 이루어져 있는 동굴이었는데, 마치 누가 의도한 것처럼 광장의 한가운데에 드래곤이 잠자고 있었다.
“레이드가 처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치곤 긴장을 안 하시네요.”
“그래 보여요?”
드래곤에게 들키지 않을 거리에 장비를 재정비하기로 한 파티는 동굴의 벽 부근에서 전진을 멈췄다.
새로운 장비를 착용하고 시험하느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진희가 현성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네. 진희 씨 초보 헌터 맞죠?”
“맞아요.”
참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현성은 진희의 짤막한 대답에 쓰게 웃었다. 모든 기록에서 그녀는 경력이 없는 초보자란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녀의 평범한 학력, 회사 경력은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세상 어떤 신입 헌터가 저 거대한 드래곤을 앞두고 떨지 않고 장비를 점검하고 있겠나 싶었다.
진희는 현성의 눈빛에 작게 웃곤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으실 거면서, 왜 물어봐요?”
“납득이 될 정도의 근거가 있다면 믿겠죠.”
“귀찮으니까 알아서 믿으세요.”
그것참 명답입니다. 현성은 굳이 뒷말을 입에 담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보육원을 후원하고 있는 것이나, 시영을 파티에 데려온 그녀의 배려에 떠오른 의문이었다. 시영과 서한의 미묘한 형제 관계는 현성도 겉핥기 정도로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진희가 시영을 데려온 의도도 짐작이 갔다.
“싫어하진 않아요.”
두루뭉술한 대답이었지만 긍정임은 확실했다.
“현성 씨는 싫어하세요?”
“좋아하지만 애들이 절 반겨 하지 않아서요.”
현성의 복잡한 표정에 진희는 뭔가 속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마침 던전 내부를 살피고 있던 서한이 다가왔다.
“뭔 이야기 중이야? 장비 점검은 끝났어?”
“장비가 너무 좋아서 감탄하던 중이었어요.”
“거짓말이지?”
“들켰네.”
넉살 좋게 받아치는 진희의 대답에 한숨을 내쉰 서한이 다가와 그녀의 종아리를 가리켰다.
“그 각반은 네가 말했던 것보다 좋은 제품이야.”
“아하. 고마워요.”
서한이 장비를 챙겨줄 때, 진희가 특별히 주문했던 것은 각반이었다. 탱커들이 사용하는 이 각반은 충격을 완화해 주는 효과가 있는 아티팩트였다.
“근데 그게 왜 필요한 거야?”
“다 쓸 곳이 있어요.”
진희가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던전 상태는 어때요?”
“레이드 던전은 확실해. 주변을 탐색해도 보이는 건 없고, 저 앞에 있는 드래곤이 유일한 적이야. 용케 이런 던전을 찾았네.”
서한은 이 던전을 도전해 볼 만한 던전이라고 판단했다.
“걸리는 점은 파티원의 수준 차이지.”
그리고 던전에 걸맞지 않은 파티원을 떠올렸다. 몰래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던 시영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알아채고 어깨를 움츠렸다.
“헉, 저도 2급 던전 참가한 업적은 있습니다!”
윤수가 시영을 가리면서 말했지만, 현성이 네 이야기 하는 것 아니니 짜져 있으란 말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건 걱정 말아요.”
“2급 던전의 평균 입장 계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
“모르는데요?”
“넌…….”
서한이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한참을 입을 달싹거렸다. 그러던 중 어깨를 움츠린 채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영을 발견했다.
‘불편하면 직접 돌아가라고 말하면 될 텐데 말이지.’
서한은 차마 시영에게 직접 말하진 못하고 혀를 차며 한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진희가 작게 웃었다.
서한과 시영의 미묘한 관계가 슬슬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얼굴이 음흉합니다.”
“현성 씨 얼굴은 맨날 이런 표정이던데요.”
“전 그렇게 안 웃습니다.”
“맨날 나 지금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하는 얼굴로 웃잖아요?”
“…….”
“……싸우시는 거 아니죠?”
현성이 진희의 표정을 보며 말하자, 진희가 태연하게 받아쳤다. 둘은 서로 존댓말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매우 무례했다.
그 모습을 보던 윤수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농담인걸요?”
“…….”
진희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대답했지만, 현성의 얼굴은 농담이 아니었다. 윤수는 눈가가 떨리고 있는 현성의 곁을 빠르게 벗어났다.
그리고 마침 방패를 손질하고 있던 카온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고야, 너무 살벌하다.”
“잡담은 삼가라.”
“저기요, 당신 상사가 잡담의 주범이거든요?”
카온의 매정한 타박에 윤수가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카온에게 신세 한탄이나 하려 했지만, 그는 장비 점검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내 편은 아무도 없는가, 시영은 날이 섰고 카온은 단호했다. 서한과 진희에게 다가가긴 어려우니, 윤수는 파티에서 따돌림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윤수는 카온을 피해서 결국 시영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의 포지션이 시영 옆이기도 하고 서한과 현성, 그리고 진희의 대화에 끼어드는 건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랑 수다라도 떨래?”
“저리 가.”
“야, 너라도 좀 어울려 줘라.”
시영의 매몰찬 거절에 윤수가 울상인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파티의 중심, 세 명의 티격태격하는 말싸움이 조금 더 진행되고.
“자, 그럼 일어나 봅시다.”
모두가 진영을 갖추었다.
날개가 없는 드래곤은 누런빛의 비늘을 가지고 똬리를 틀고 있다. 생김새는 서양의 드래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지 온몸에 잔상처가 많고, 뿔은 빛이 바랬다. 늙은 드래곤인가, 드래곤을 몇 번 본 적 있던 진희는 생각했다.
‘진영 갖춰.’
서한의 손짓에 조용히 장비를 꺼낸 파티가 전진했다. 최전방에 카이트 실드를 꺼내든 카온, 그의 대각선 뒤편으로 각각 현성과 서한이, 진영의 중심엔 진희가 위치했다. 그보다 한참 뒤에서 시영과 윤수가 대기한다.
‘첫 타격.’
적이 잠들어 있다는 건 좋은 신호다. ‘무조건’ 첫 번째 타격은 먹힌다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몬스터들은 잠을 잘 때 으레 방비를 해두곤 했다.
잠이 많은 종족이란 이야기를 줄곧 듣는 드래곤은 일반적인 몬스터보다 더욱 단단한 방비를 한다.
“……허.”
근처에 다가가자, 현성이 드래곤을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숨을 뱉었다.
드래곤에 주위엔 압도적인 마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인간의 마나 호흡법은 대개 다른 종족에게서 취득한 것이다. 그중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은 용인과 드래곤의 호흡법이며, 이들은 태어나서부터 호흡을 통해 막대한 마나를 마력으로 변환한다.
그리고 다른 종족들과 다르게 한 번 잠에 빠지면 긴 시간 동안 일어나지 않는 드래곤들은, 잠이 들 때 호흡법으로 마신 마나를 신체 주위에 둘러버린다.
마나 친화력이 어마어마한 드래곤이기에, 호흡법으로 모은 막대한 마나를 보호막처럼 사용하여 잠든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