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33화
처음엔 반대했던 서한도 이야기를 들으면서 천천히 전략을 구상해 나갔다.
서한이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그를 보고 현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2급은 무립니다. 간혹 마법이라도 사용하는 드래곤이 있다는 걸…….”
“말은 못 한다.”
“네?”
가만히 듣고 있던 카온이 현성의 말을 끊었다.
“그 드래곤은 말을 잊었어. 용언도, 마법도 할 수 없다.”
“…….”
직접 적을 보고 왔다는 진희와 카온의 말을 안 믿을 수도 없었다. 현성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진희가 물었다.
“하여간 그런데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끄응.”
사실 현성의 입장에선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그는 진희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잠행할 거라 말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실력을 눈으로 확인한 이후엔, 언젠가 상급의 던전에 도전하게 되리라 예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남아 있었다.
“왜 굳이 시작부터 2급입니까? 파티의 호흡도 맞춰보지 못했는데, 이건 무리수입니다.”
“그건…….”
진희는 슬쩍 카온을 바라보았다.
용인은 드래곤에서 파생된 종족이다. 그렇다고 해서 용인이 드래곤에게 충성을 다한다거나 부모 자식 간의 관계로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용언을 할 수 있단 공통점이 있어 마냥 타인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구라는 완벽한 타향에서 만난 뿌리가 같은 종족이었다. 그렇기에 처음 카온이 이 던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진희는 그가 동족을 위해 공격하지 말잔 뜻으로 꺼낸 말인 줄 알았다.
‘타락했습니다. 소멸시켜야 합니다.’
그때 진희는 용인이 융통성 없는 성격을 가졌단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드래곤답지 않은 드래곤이란 결국 몬스터와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용의 피를 함부로 쓰는 몬스터는 하루라도 빨리 사냥해서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온의 강한 결심에 진희는 첫 원정을 드래곤 사냥으로 선택했다.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당신 또…….”
현성은 언제나처럼 제대로 된 대답을 안 해주는 진희를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진심을 말해주지 않을 진희였기에 결국 접어주는 건 현성이었다.
“……알았습니다. 참가하죠. 대신 위험해지면 도주가 최우선입니다.”
“당연하죠. 저도 개죽음은 싫어해요.”
진희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레이드를 위한 장비를 모아주세요. 기본적인 건 알아서 하시고, 그것 말고도…….”
첫 기사단 출정이었다. 진희는 농담을 끝내고, 천천히 브리핑을 진행했다.
* * *
다음 날, 레이드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카온에게 방패와 검을 쥐여 주고, 진희는 가지고 있던 아밍소드와 함께 마력 내성이 있는 가죽 갑옷을 입었다.
이 세상에선 처음 입는 제대로 된 갑옷이라 새삼스러운 기분을 만끽하고 있던 도중, 지팡이를 오브(Orb)화 시키며 마법 연습을 하던 시영이 다가왔다.
“저기…….”
“응?”
“……저, 따라가도 괜찮아요?”
“뭐가?”
진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시영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
시영은 흘끔흘끔, 구석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있는 서한을 훔쳐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브리핑을 했을 때, 서한이 전략을 짜며 의도적으로 시영을 배제했던 것이 떠올랐다.
마지막 정리할 때쯤 진희가 시영의 역할을 정해주었지만, 서한은 계속해서 ‘전위의 중요함’만을 강조했다.
그의 발언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드래곤이란 거구에서 나오는 무력보다 비늘이 가진 방어력 때문에 상대하기 어렵다는 게 정론이었다.
진희와 서한, 현성마저도 어떻게 해야 드래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고민하는 상황에서, C급 마법사인 시영의 마법이 통할 리 만무했다.
형이니까 그런 시영의 자신감을 북돋아 줄 수도 있을 텐데, 서한은 무감정한 눈으로 시영을 바라보며 말없이 지나쳤다.
‘얼마나 콩가루 집안인 거야.’
진희는 어른스럽지 못한 태도에 혀를 찼다.
“너도 헌터다운 일 해보고 싶다며.”
“…….”
시영은 말이 없었다.
서한만 자리에 없다면 시영은 이처럼 소심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당장 어제 생일 파티 때도, 서한이 보이지 않는 종혁의 곁에서 마법사의 우월함을 한참을 떠들었다.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시영은 서한의 앞에서만 서면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졌다.
‘난 종혁이처럼 못하는데.’
진희가 드물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녀는 종혁처럼 밝고 활기차게 위로하는 법 따윈 몰랐다.
“……괜찮아, 내가 말했던 역할만 잘하면 돼.”
“……실수하면요?”
“걱정 마.”
진희가 척 하고 엄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이 누나가 있잖아.”
“…….”
‘아, 안 통하네.’
다시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시영을 보며, 진희가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너무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나. 진희는 머쓱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청하였으면 받아치는 말이라도 해서 분위기를 환기했을 텐데.
“……형은 뭐래요?”
“이서한 씨?”
“네.”
시영은 이곳에 오기 전, 싸늘한 얼굴로 ‘꼭 던전에 가야겠냐’고 묻던 큰 형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그를 달래 준 건 박준이었다.
박준은 회사 일 때문에 이곳으로 오지 못했지만, 이번에 힘을 내서 형에게 인정받자는 그의 당부 덕에 그나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왜? 무시받아서 힘들어?”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을 굳이 들으란 듯 말한 진희를 시영이 순간 노려봤으나, 이내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형은 S급 헌터예요.”
“그런 것 같더라.”
베일에 싸인 국내의 S급 헌터. 언론에 이름조차 언급이 쉽지 않은 비밀병기 같은 이들은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소속되어 있다.
금강에도 있다고 들었는데, 현성은 서한을 ‘금강 기업의 최고 실력자 중 하나’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S급 헌터라고 간접적으로 말한 셈이다.
A급이고 S급이고 급수에 큰 차이를 두지 않던 그녀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C급으로 시작한 시영은 큰 부담이었던 것 같았다.
게이트가 한참 세상을 들썩일 당시에 헌터로 등극한 서한과 달리, 안정기에 돌입한 현대에 헌터가 된 시영은 언론의 편한 먹잇감이었다.
당시 혼란한 세태 때문에 회사 기밀이라며 신상 정보를 아예 차단한 서한, 그리고 둘째와 달리, 시영은 언론들 사이에선 유일하게 접촉이 가능한 금강 패밀리였기 때문이다.
인외의 힘을 가진 헌터를 언론에서 다루기는 힘들다.
기자도 자기 안전이 최우선인 인간인지라, 걸어 다니는 인간 전차를 상대로 셔터를 누르긴 어려우니까.
하지만 어중간한 힘을 가진 셀럽이라면 떨어지는 콩고물이 제법 있었다. 그것도 금강에서 대놓고 내놓은 자식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 형의 능력 앞에서, 시영은 한없이 작아져만 갔다.
S급 헌터와 C급 헌터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격차니까.
대신 넌 어리고 장래가 있잖아, 같은 위로를 하기도 힘들었다. 낙천적인 위로는 때론 무신경한 훈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훈수에 상처받는 사람들은 꾸준히 존재했다.
진희는 괜히 과거 바제트 때의 남동생이 떠올랐다. 그녀와 다르게 무의 재능이 없었던 남동생은, 진희가 기사단과 훈련하고 있을 때면 간혹 내려와 구경하곤 했다.
“……그럼 한번 보여줄까?”
“네?”
“너희 그 잘난 형한테, 네가 얼마나 능력 있는지 한번 보여주자.”
문득 떠오른 짓궂은 계획에 진희가 씨익 웃었다. 이미 레이드를 위한 전략은 완성된 상황이었지만, 거기에 몇 가지 재미를 가미한다 해도 잘못될 일은 없다.
처음 보는 진희의 음흉한 웃음에 시영이 두 눈을 끔벅거렸다. 청하가 있었다면 ‘아, 또 사탄’이라고 중얼거렸을 테지.
* * *
레이드의 주의사항 첫 번째.
오더를 절대적으로 여겨라.
개인플레이가 가능한 일반 파티와는 다르게, 한 마리의 보스를 잡는 레이드형 던전은 유기적인 전투가 필수적이었다.
탱커가 적의 시선을 끄는 어그로 작업을 계속하고, 후위는 상황에 맞춰 마법 혹은 서포팅을 해줘야 하며, 딜러는 오더의 말에 따라 빠르게 태세를 바꿔야 한다.
그만큼 오더는 중요하고, 그 역할을 누가 맡느냐에 따라 파티의 흥망이 결정된다. 영웅과 같은 파티원이 있어도 오더가 못났다면 결국 하급 파티와 다를 바 없다.
이 RPG 게임과도 흡사한 점 때문에, 언론에서는 자주 레이드 던전을 게임에 빗대곤 했다.
이번 드래곤 레이드에서 메인 오더는 이서한. 서브 탱커와 서브 딜러를 자처한 그는 방패와 창이라는 고전적인 장비를 선택했다.
현성은 서브 딜러 및 어그로 담당. 각종 주술을 사용해 드래곤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서한의 탱킹 뒤에서 전반적인 전위의 상황을 돕는다.
카온은 전형적인 탱커였다. 마력 보호막과 방출(넉백) 기능을 가진 카이트 실드를 들고, 최전방에서 드래곤과 맞상대한다.
진희는 메인 딜러. 드래곤의 시야를 피해서 유효타를 계속해서 먹여야 한다. 이번에 든 무기는 츠바이핸더로, 길이 170㎝를 넘는 거대한 형태의 검이다.
서한의 메인 오더가 탱커와 어그로를 담당한다면, 진희는 서브 오더로서 딜할 타이밍을 모두에게 전한다.
뒤늦게 합류한 윤수와 시영은 후위였다. ‘바람’의 마법을 사용하는 시영은 드래곤의 시야를 가리거나, 어그로 초기화를 위해 보조적 마법을 사용할 예정이다.
윤수는 사실 전위에 해당하는 전사였지만, 이번 경우엔 시영을 보호하고 혹시나 있을 부상자를 전장에서 빼내 줄 구원병 역할을 맡았다.
‘군대’의 작성은 제법 해봤지만, 이런 소규모의 알짜배기 파티는 짜본 적이 없던 진희는 완성된 진영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현성은 서한을 온실에서 자란 헌터라고 투덜거렸지만, 진희가 보기에 서한의 전력 판단은 충분히 뛰어났다.
서브 딜러 및 서브 탱커라는 복잡하고 힘이 들며, 주목도 덜 받는 포지션을 본인이 하겠다 나선 것도 제법 훌륭했고, 조금의 사심도 들어 있지 않은 역할분배엔 파티원 모두가 만족했다.
편하게 공격만 하면 되는 포지션에 오게 된 진희는 흔쾌히 메인 오더의 자리를 서한에게 넘겼다. 그래도 괜찮겠냐는 카온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지만, 후위에 실력 좋은 사람이 없는 이상 서브 탱커, 서브 딜러가 오더를 맡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던전’과 ‘파티’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 중요한 메인 오더를 이중 가장 많은 던전을 완수했다는 서한에게 맡겼다.
해가 점심을 넘어 한낮이 될 무렵, 그들은 게이트로 출발했다.
대부분의 아이템은 오브화해 장착하였다 보니 생각보다 짐은 간소해 보였다.
‘나도 내 검 작업하긴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검을 허리춤에 매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음엔 작은 구슬 혹은 수정구로 변화시키는 오브화 인챈트를 잊지 말고 받아둬야지, 따위의 생각을 하던 진희에게 서한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