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30화
들을 거라면 본인에게 듣겠다. 그리고 부탁하려면 본인이 나서서 부탁해야 한다.
여기에 민혁을 끼어들게 만들면 괜히 이야기만 복잡해진다. 민혁이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그의 얼굴에 오른손을 가져다 댄 진희가 말했다.
“됐다니까. 내가 직접 소라한테 들을 테니까. 넌 신경 꺼. 여기까지 와서 사과한 건 친구로서 대견하긴 하지만. 넌 그걸로 충분해. 더 하면 오지랖이야.”
소라 일은 소라의 일이다.
진희는 민혁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막 문대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소라보고 30분 뒤에 놀이터로 나오라고 해. 이야기 좀 하겠다고. 난 씻고 나갈 테니까.”
진희가 민혁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그를 지나쳐갔다.
민혁은 손바닥에 의해 붉게 물든 콧등을 매만지며 진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됐어, 이 애늙은이야.”
하여간 요즘 애들은 속은 애인데 겉만 늙은이라니까. 진희가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샤워실로 들어갔다.
* * *
‘단장님, 제발 출전시켜 주십시오.’
‘난 자중하라고 말했어.’
전장의 상황은 처참했다.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로 얼룩진 강엔 온갖 벌레가 가득하다.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겠지. 멀쩡한 사람도 하루면 폐인이 되고 폐인은 반나절 만에 시체가 되는 지옥에서, 바제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패전(敗戰)이었다. 바제트의 뒤늦은 판단으로 인해 적의 기동대에 아군의 보병대가 전멸을 맞이했고, 바제트를 필두로 한 기병대가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
보병대를 맡았던 기사는, 바제트의 부관의 연인이자 약혼자였다. 랜스 차징에 당한 것인지 가슴팍부터 오른쪽 어깨가 통째로 날아간 기사의 시체를 붙잡으며, 바제트의 부관은 턱을 벌릴 수도 없는 투구 안에서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부관은 복수를 다짐했다.
적의 기동대는 악명 높은 각월(却月)의 악마들. 달빛이 희미한 저녁에 습격하여 적을 도륙하는, 바제트의 부대로선 상대하기 어려운 극한의 기동성을 갖춘 부대였다. 그 부대를 쫓겠다고 병력을 나누는 건 멍청한 짓이다. 말의 성능부터가 비교가 안 되는 데다가, 적은 이 근방의 지리에 통달해 있었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이것이 그들이 설계한 함정이란 합당한 의심을 들게 한다.
아직 어리고, 전쟁에 나선 지 반년밖에 안 된 부대장인 바제트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이곳에 바제트가 미리 와 있었다면 양상은 달랐겠지. 아무리 습격에 능한 각월의 악마라고 해도 정예가 모인 바제트의 기병대를 당해낼 순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그녀의 부관은 복수심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이 자신의 가족을 앗아갔다. 눈앞에 도달만 한다면 단숨에 목을 딸 수 있으나, 도주를 선택한 그들을 쫓아갈 방도는 없다. 그만한 실력이 있음에도 상황이 따라주지 못한다. 수읽기가 중요한 전쟁에선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들을 쫓기 위한 출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단 걸 부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감정을 억제하진 못했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
투구 속 부관의 눈에선 피눈물이 흘렀다. 이를 갈다 못해 입 안쪽과 잇몸이 터져나가, 그의 입에선 피거품이 떨어졌다.
‘지금 출전하는 건 자살 행위야.’
‘그가 죽었을 때 난 이미 죽었어.’
‘……부관, 명령이다.’
‘하하.’
당신은 언제나 명령이지. 부관은 바제트를 비웃었다.
‘그 영광스러운 가문 문양을 가슴에 그리고, 출중한 재능으로 전장을 누비는 우리의 대장님.’
‘…….’
‘당신은 날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야.’
부관은 그 말을 끝으로 바제트를 떠났다. 자신의 직속 부하 몇 명을 데리고, 각월의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 달려갔다.
바제트는 냉철했다. 보병대의 시신을 수습하고 다시 진영을 갖춘 후, 보급로를 확보하여 전선을 구축했다.
정확히 일주일 후. 그녀는 정찰로 나갔던 병사에게 보고를 받는다.
그녀의 부관이었던 자가 계곡 속 함정에 빠져 처참히 살해당했노라고.
제국의 영토 전쟁,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골든 웨이브(Golden wave) 전쟁에서 바제트는 첫 패배를 기록한다.
예하 부대 중 3할이 사망했으며, 그녀를 보필했던 부관 또한 이때 사망한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진영을 갖춘 바제트의 부대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이 전선을 밀어버렸으며, 이윽고 평야의 반을 빼앗는 업적을 낳는다.
그리고 그녀는 이후 각월의 악마들을 사냥, 그들의 목을 최전선에 허수아비처럼 걸어놓았다.
* * *
“어서 와.”
“무슨 일이시죠?”
아직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놀이터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서울의 하늘은 어두웠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엔 초승달만이 작은 빛을 내고 있다. 희미한 전등 아래서 진희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잠옷을 입고 있던 소라가 걸어오고 있었다.
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물을 좀 주려고.”
“선물이요?”
“응.”
진희는 벤치 곁에 놔뒀던 단검을 들어 올렸다. 이것은 진희가 처음 신림에 왔을 때 도적들에게서 갈취한 장비였다. 까마귀파에서 얻은 전유물이 많아 대부분을 버렸지만, 이 단검은 상태가 제법 괜찮아 챙겨뒀었다.
단검 집에서 검을 꺼내 들자, 피를 머금은 적 있던 단검이 달빛 아래서 사위스럽게 빛났다. 이 단검집은 독을 수납할 수 있다. 독을 충전하면 날이 무뎌지더라도 치명적인 위력을 낼 수 있었다.
“이거야.”
“……무기인가요?”
“응.”
소라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검집의 무게까지 합하자 마치 두꺼운 식칼을 들고 있는 듯했다. 소라는 무기의 사용법에 대해 진희에게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제법 자주, 온갖 무기에 대해 질문했다.
자신에게 맞는 무기가 무엇일지, 어떤 무기를 쓰는 게 강력한지, 진희는 질문 대부분에 대답해주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가 굳이 무기를 쥐여 줄 줄은 몰랐다.
“C급 헌터의 맨살 정도는 파고들 수 있을 거야. 나름 마력을 잘 먹은 검이거든.”
아티팩트까진 아니지만, 일회성 단검으로 쓰기 좋은 빼어난 물품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름 무기가 생겼다는 사실에 화색이 돈 소라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미동도 하지 않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진희가 물었다.
“근데 소라야, 너 단검 같은 건 쓸 줄 모르지?”
“네? 그야…….”
일반 고등학생이 날붙이를 쓸 일이 얼마나 있었겠나. 틈틈이 동영상이나 헌터 실습 교재 등을 통해 자습하곤 있었지만, 휘둘러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긴 그렇겠지, 진희가 소라에게 다가왔다.
“그럼 사용하는 법 정도는 알려줄게.”
“감사합니다.”
“쓸 일이 있다면 실수하면 안 되잖아.”
“……?”
진희는 소라의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희와 소라는 서로 키가 비슷하다 보니 팔의 위치 또한 동일했다. 진희는 소라의 팔을 타서, 마치 자신의 팔인 듯 소라의 팔을 앞으로 뻗게 했다.
소라가 단검을 쥘 수 있도록 손등을 내리누르고, 이내 팔꿈치를 잡았다.
“…….”
이상했다. 분명 진희의 체온이 느껴지는 등은 따뜻했지만, 검을 쥔 팔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마력엔 이상이 없었다. 기분 탓인가? 소라는 팔을 타고 오르는 닭살을 애써 모른 척하며, 진희의 지시를 기다렸다.
“단검은 거리가 짧은 만큼, 한 번의 공격이 실패하면 곧 죽음이라고 생각해야 해. 이 단검은 찌르기용 단검(Rondel dagger)이야. 베기보단 송곳으로 찌른다는 생각으로 사용해야지.”
우선 해머 그립. 단검의 날이 팔 안쪽을 향하도록 수직으로 꽉 쥐고, 목이나 옆구리를 가로로 찌르는 방식.
“그리고 역수.”
다음은 역수로 잡는 방법. 상대의 어깨나 심장, 눈 등의 급소를 찌르는 전형적인 내리 찌르는 방식.
“힘이 모자란다면 역수로 쥐는 게 가장 효과가 좋지. 자신보다 덩치가 크다면 더욱.”
“……예.”
진희의 설명은 노골적이었다. 분명 헌터 교재에서도 적혀 있던 이론이고, 그보다도 순화된 말임에도 불구하고 등골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귀에 파고들었다.
진희는 소라의 팔을 느리지만 부드럽게 움직였다. 마치 눈앞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노골적인 동선이었다.
역수로 쥔 단검을 내리 찌르고, 힘이 부족하면 왼손을 보탠다. 위에서 아래의 공격은 언제나 체중을 실어서 위력이 배가 되도록 만든다. 단검의 범위가 짧은 만큼, 공격이 실패하거나 빗나갔을 경우 빠르게 뒤로 빠질 수 있도록 허벅지에 긴장을 풀지 않는다.
“죽일 거라면 확실히. 죽이지 못할 때라면 빠르게.”
단숨에 사람을 죽이는 수법이란 한순간의 판단력이 숙련도보다도 중요하다.
“실전 한번 해볼까?”
“네, 네?”
“자, 내가 앞에 설게.”
어느새 땀을 흘리기 시작한 소라의 이마를 한 번 닦아준 진희가 웃으며 앞으로 돌아 나왔다. 노란빛 전등 아래 진희의 얼굴은 유난히 희다.
“쥐고 싶은 자세로 쥐고, 찔러봐.”
“자, 잠깐만요. 이건 진검이잖아요.”
“내가 죽을 것 같아? 너도 대련 봤잖아?”
“그건…….”
진희와 현성의 대련은 원생들에게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마력도 사용하지 않은 둘의 싸움은 마치 하나의 작품을 보는 듯했다.
모든 움직임에 설계가 들어 있고, 그로 인한 반격엔 센스와 판단력이 돋보였다. 모두가 그 대련을 영화 보듯 지켜보고 있을 때, 소라와 청하만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모든 장면을 눈에 담았다.
청하의 눈에는 다시 한번 존경과 부러움이 담겨 있었고. 소라의 손은 저걸 따라 하려는 듯 움찔거리며, 눈은 다시 한번 증오로 불타올랐다.
그때 소라는 진희와의 격차를 새삼 깨달았다. 격차라고 표현하는 것도 실례였다. 마력을 쓰지 않은 대련에서조차 움직임을 따라갈 수 없었는데, 마력을 사용하게 된다면 말할 것도 없다. 소라가 진희를 찌르는 그 순간, 진희는 소라를 십 수 번은 제압할 수 있겠지.
하지만 알고 있음에도 진검을 휘두르는 용기는 섣불리 낼 수 없었다.
손에 든 물건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상 무기다. 식칼이나 톱 같은 일반적인 날붙이가 아니라, 오로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악의적인 물건.
진희가 손끝으로 단검의 검집을 벗겨냈다. 독은 묻어 있지 않았으나, 희미한 달빛을 받은 단검은 물기를 머금은 것처럼 번들거렸다.
“괜찮아, 한 번 휘둘러 봐야 다음에 휘두를 때 실수를 안 할 수 있잖아?”
“그, 그런 건…….”
이게 농담인가? 혹은 명령일까? 소라는 당황한 얼굴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희게 웃던 진희의 표정이 서서히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싫어요. 이런 건……. 제가 알아서 연습할게요.”
“왜? 더 훈련하길 바랐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어요.”
참 애는 착하네. 진희는 비죽 튀어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았다.
“아니, 검을 들어.”
“전 안 하겠다고…….”
“들지 않으면, 더 이상의 무기 수련은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