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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27화 (27/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27화

6. 수련과 상처

“계열사 운영이야 보고만 받으면 돼.”

“계열사……. 아니아니, 저 당신 오면 부담스러워서 싫은데요.”

“…….”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는지, 서한이 미간을 좁혔다.

“현성 씨야 뭐, 일면식도 있고 경찰 같은 거니까 그러려니 해도. 제가 당신과 같이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이상한 사람이야. 진희는 콧방귀를 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

“맞나 보네, 그럼 물 한 잔 마저 마시고 돌아가세요. 배웅은 안 할게요. 카온, 방 좀 정리하고 와.”

진희는 카온에게 말한 후 터덜터덜 방을 나갔다.

“아, 현성 씨는 나중에 전화번호 좀 적어두고 가요. 연락할 테니까요.”

“네.”

철컥,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방 안에는 시커먼 남정네 셋만이 남아 있었다.

서한은 ‘이게 아닌데?’란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고, 현성은 그 모습을 조금 불쌍한 듯 내려다보았다. 카온은 왠지 모르게 통쾌한 얼굴이다.

서한은 방에 들어서는 순간, 진희의 손을 보고 온몸이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진희는 태연하게 손을 흔들며 그를 의자에 안내했지만, 그녀의 상처를 본 서한의 등골엔 이유 모를 식은땀이 흘렸다.

사실은 깔끔하게 말하려 했다.

자신의 동생 이시영을 돌봐주는 대가로 너에게 헌터를 파견시켜 줄 테니, 혹시 모를 테러범의 위험에 대비하라. 그렇게 말하려 했다.

진희는 시영과 서한의 관계를 매우 험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도 금강 기업의 아들이 테러범에게 죽는 꼴을 가만히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침착하게 말하면 명분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과 손의 상처를 본 순간 얼어붙었다.

‘손의 상처를 입고 나서 뭘 하겠단 거냐? 들어가서 쉬기나 해.’

왠지 모를 데자뷔와 함께 시야가 흐려졌다.

도와야 한다. 아니, 내가 있어야 해. 그 개연성 없는 충동에 서한은 비굴할 정도로 말을 끌었다.

그럼에도 진희는 거절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이는 부담스러운 친절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첫 만남에서 의심해서 식사를 파투냈던 장본인이 갑자기 잘해준다니, 누가 생각해도 멋쩍은 일이었겠지.

“…….”

서한이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을 때, 마침 밖으로 나가려고 일어나던 현성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뭐?”

현성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딱히 서한에게 좋은 감정도 없고 편을 들 생각도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묘하게 불쌍해 보이긴 했다.

“말을 돌려 하는 것보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낫습니다. 진희 씨한테는 특히.”

“……서진희를 잘 아나?”

“잘 아는 건 아닙니다만…….”

하지만 직업 특성상 사람을 많이 만나 본 현성은 진희의 성격을 대강 눈치챘다.

어쭙잖은 빈말이나 은유적 대화가 절대 안 통하는 타입이다. 당장 현성도 첫 만남 때 긴장을 풀게 하겠다고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본론이나 꺼내라며 일침을 듣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번에 보육원에 찾아올 땐 대놓고 본론부터 말했다. 결국 그의 제안은 깔끔하게 받아들여졌고.

반대로 서한은 그 의도가 알 수 없는 제안을 끝도 없이 던졌다. 진희는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에 대해 깔끔하게 포기하는 타입이었다.

“…….”

현성의 제안에 서한이 가만히 고민에 빠졌다. 다시 진희를 보지 않으니 심장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말이라도 더 꺼내봐야 한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성을 제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빠르네.”

결정하는 능력 하나는 탁월하다. 아까처럼 더듬지 않고 잘 말하면 좋겠는데 말이지, 현성은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사람보다 강한 사람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문득 자신을 태연하게 칭찬하던 진희가 떠올랐다.

‘서한을 대하는 걸 보면, 난 의외로 신뢰받고 있는 건가?’

솔직히 말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다.”

“예?”

진희는 청하에게 마나 호흡법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던 와중이었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이것저것 말하던 도중, 갑자기 달려온 서한이 진희에게 말했다.

“뭘요?”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다고.”

“절요?”

“그래.”

“왜요?”

“그냥!”

안하무인이던 태도는 어디 가고, 오히려 당당하게 비굴한 게 더 우스웠다.

“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실력 좋은 헌터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서한을 보면 괜히 과거가 떠오르는 데다가, 첫 만남 때의 인상을 생각하면 같이 다니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파티를 위한 서포팅도 내가 준비할게.”

“어…….”

“장비도 맞춰주지.”

“…….”

“게다가 여기 후원자도 더 늘릴 수 있어.”

……이렇게까지 끈질기니까 좀 무서운데? 척척 다가오면서 서한이 말을 이어가자, 진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뺐다.

“이유 진짜 없어요?”

“당연하지.”

“음, 그럼 제가 돈이랑 장비 다 받고 당신 돌아가라고 하면 그럴 거예요?”

“…….”

그런 잔인한 생각을 하고 있었나? 서한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곁에서 듣고 있던 청하도 이 사람 사탄인가 하는 눈초리로 진희를 올려다보았다.

“농담이에요.”

“…….”

아무렴 나도 사람인데 그렇게까지 안면이 철판일까. 하지만 진희는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다. 오직 청하만이 ‘이 사람 농담하는 거 아닌데’ 하는 불안한 얼굴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당신이 절 어엄청나게 돕고 싶어서 그랬다고 쳐요.”

“응.”

“제가 너무 미인이고 능력이 우수하고 대단하고 존경해서 그렇다고 쳐봐요.”

“…….”

“가능성은 높지만 그렇다고 보면, 으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요.”

“뭐라고?”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서한의 얼굴이 당황과 경멸로 물들려던 찰나 진희가 손을 탁 들어 올려 서한의 얼굴 앞에 가져다 댔다. 붕대가 감긴 그 손을 보니 서한의 눈동자가 또다시 흐려졌다.

“그렇게 우리와 함께 일하면, 이제 절 의심 안 할 건가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서한이 그간 피하고 싶었던 화제이자, 진희가 묻고 싶었던 불편한 과거였다. 진희의 얼굴엔 히죽 미소가 걸렸고, 서한은 그 얼굴을 보고 한 걸음 물러섰다.

물론 진희가 결백하다고 100% 믿는 건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움직였지만 그의 강직한 이성은 진희를 무조건 믿지 말라고 말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서한은 진희를 본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았고, 그녀를 믿을 만한 근거(경력)는 전무했으니까. 그는 지도자로 태어난 몸이다. 알맞은 결정은 강행하되 섣부른 결정은 지양해야 옳았다.

“……내 두 눈으로 판단하겠어.”

“어떻게요?”

그제야 그의 눈에 이지(理智)가 돌아왔다. 서한은 처음 이곳에 올 때부터 말하고 싶었던 사실을 차분히 이야기했다.

“널 무조건 믿을 순 없어. 하지만 멋대로 오해하고 의심해서 말을 험하게 한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야. 넌 내 동생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그 일을 보답하면서, 또 조사할 생각이야.”

“어떤걸요?”

“네가 금강에 해가 되는 인물인지, 아니면 도움이 되는 인물인지. 정말로 아무런 속셈 없이 이시영을 구해준 건지. 난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

“……후우.”

직설적인 이야기였다. 테러범에게서 진희를 지켜주면서, 동시에 그녀의 위험성에 대해서 판단하겠다는 의도다. 이기적이지만 합리적이다. 국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헌터 대기업께서, 뜬금없이 나타난 헌터에 대해 대비를 안 하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아마 그는 이런 결정을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누구든 ‘널 감시하며 보호하기 위해서 헌터를 보내줄게’라는 소릴 듣는다면 거절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그는 자신의 진담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진희는 고개를 돌려 청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어도 되는 건가 고민하던 청하에게, 진희가 물었다.

“청하야.”

“네?”

“넌 어떻게 생각해?”

“……저요?”

“응, 저 아저씨를 받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왜 굳이 자신에게 결정을 미루는지, 청하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진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서한의 얼굴도 번갈아 보았다.

서한의 얼굴은 당당했고 냉철했다. 하지만 그간의 대화로 인해 서한의 요구에서 느껴지는 진심을 대충 눈치챈 청하는 생각했다.

‘저 사람 그냥 보내도 또 올 거 같은데.’

딱 봐도 고집 있어 보이는 상이다. 진희가 내쫓아도 결국 다시 오지 않을까? 게다가 듣자 하니 엄청난 대기업 사람이라는데, 괜히 밉보이는 선택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괜찮지 않을까요? 누나가 불편하면, 그때 말해서 돌아가라고 하면 되잖아요.”

“흐응.”

그건 그렇지. 진희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좋은 조건이었다. 받을 건 받으면서 거절은 언제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사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은 계약이다.

진희는 다시금 서한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까와 같은 혼란이나 묘한 긴장은 사라진 걸로 보였다.

이것도 인연이겠지. 전장에서의 케네스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단원도 부족하잖아.’

기사단에서 어엿한 전력이라고 부를 만한 건 카온 한 명밖에 없다. 나머지는 수습 기사 딱 그 정도 수준.

그렇다면 괜찮은 방법이 있지. 진희가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그럼 하나 조건만 달게요.”

“뭐지?”

“굳이 이곳 후원을 늘릴 필요는 없어요. 사람도 적은데 굳이 눈에 띄고 싶지 않으니까. 장비는 딱 파티원의 수준에 맞게 준비해 줘요.”

“알았어.”

“의심을 하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제 눈앞에서 티 내지 말아요. 그런 거 보이면 짜증 나서 엎어버릴 거니까.”

“……그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희가 문을 열고 나오는 카온을 흘끔 보고, 찡긋 윙크를 했다.

“제 단원이 되면 허락할게요.”

“단원?”

“네, 임시 명칭 병아리 기사단이라고 있어요. 지금 고등학생 3명, 초등학생 1명이 단원이죠.”

진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서한이 가만히 서 있자, 진희는 붕대를 감은 손을 내밀었다. 진희의 얼굴에 맺힌 미소는 지금까지의 비아냥, 비웃음이 아니라 순수한 호감의 표시였다.

“단원, 같이하실래요?”

서한은 그 미소에 홀리듯 손을 잡았다.

‘상사를 부하로 부리는 기분은 제법 괜찮긴 하네.’

그녀의 속내를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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