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26화
6. 수련과 상처
결국 가람 보육원에 잠행할 사람은 현성으로 정해졌다. 현성은 생각보다 높은 직위에 있는 듯, 몇 번의 보고를 전화로 전달하니 임무의 재분배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금강의 시영이 있는 곳엔 후배가 간다고 한다.
“그럼 여기서 같이 지내는 건가요?”
“아뇨, 주변에 있을 겁니다. 거기다 일이 있으면 잠깐 자리를 비울 때도 있을 거고요.”
잠행이라고 한들 24시간 내내 같이 있긴 쉽지 않았다. 혹시라도 사건이 터지거나 정기적인 일이 겹치는 경우엔 잠시나마 철수해야 한다. 그땐 대리자를 두거나 먼저 말을 해줄 테니 걱정 말란 말을 건네며, 현성은 이제부터의 스케줄을 설명했다.
별 건 없었다. 그저 평소대로 지내며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을 땐 신호를 달라. 던전을 갈 땐 동행하겠다. 딱 그 정도의 조항이었다.
“응? 언제 왔어?”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있을 때, 카온이 방에 들어왔다. 현성은 처음 보는 카온의 출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 친구분이신가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 신현성입니다.”
“…….”
카온은 고개를 돌려 진희를 바라보았다. 대답을 해줘야 하는 거냐는 물음이 담긴 눈빛에 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오톨로메오다.”
“……진희 씨와 친하신가 봐요?”
눈치가 빠른 현성은 진희와 카온의 눈빛 교환을 보고 서로가 나름의 관계가 있음을 눈치챘다. 적어도 동료나 친구의 관계는 아닌 듯했다. 카온은 현성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진희의 곁으로 다가갔다.
노골적인 무시에 현성이 안색이 순간 뒤틀렸지만, 그것을 티 내진 않았다.
“마스터.”
“응?”
“‘또’ 손님입니다.”
“어?”
올 사람이 또 있나? 진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누구냐고 묻자, 카온은 다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서한입니다.”
“……그 양반은 왜 왔지?”
오늘은 예상외의 손님이 찾아오는 날인가. 현성 때보다 더 의아한 사람의 등장에 진희가 중얼거렸다.
우선 데려오라고 하자, 카온이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그 서한이란 양반 성격도 더럽던데 괜히 카온이랑 싸움 나는 거 아닌지 몰라, 진희가 그렇게 생각하던 무렵 현성이 다시금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부하?”
“비슷해요.”
“……비슷하다니.”
딱 봐도 카온은 이국적인 생김새였다. 한국이 헌터들의 국가로 성장한 이후 해외의 헌터들이 국내에 상주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명의 헌터가 누군가를 깍듯하게 모시는 광경은 보기 어려웠다. 일반적인 상관과 부하 수준의 충성심이 아니었으니까. 절도 있게 걸어와 진희의 대답을 기다리는 자세는 마치 영화 속의 기사를 보는 듯했다.
그러나 현성의 의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줄 생각이 없던(귀찮았던) 진희는 ‘그런 게 있어요~’ 하고 휘휘 손을 저으며 말을 바꿨다.
“근데 이 사람은 왜 오는지 모르겠네.”
“이서한 씨와 아는 사이입니까?”
“알고 싶진 않지만 아는 사이가 된 사이죠.”
“아까부터 말 좀 꼬지 말아주실래요?”
그냥 대답하면 될 걸 말을 흐리는 진희에게 현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동생(시영) 때문에 보게 되었는데, 첫인상이 별로 좋진 않더라고요.”
“하기야 매너가 있는 사람은 아니죠.”
“현성 씨와도 아는 사이예요?”
“딱 얼굴 정도는 압니다만, 금강과는 사이가 좋진 않아서요. 빈말로도 좋은 사이는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박준도 그렇게 말했었지. 정부소속의 헌터여서 기업들과 마찰이 있는 경우가 잦은 걸까. 이것도 언제 한번 들어보고 싶은 썰이었지만, 카온이 서한을 데려왔기에 대화를 멈췄다.
세련된 리젠트 컷에 짙은 눈매,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딱 펴고 들어온 서한은 진희를 보고 입을 열려다, 현성을 발견하고 사정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네가 여기 있어?”
“너는 왜 여기 있죠?”
“…….”
‘와우, 살벌해라.’
진희는 현성의 눈치를 보았다.
만나자마자 쏘아대는 서한과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대답을 돌려준 현성이었다. 진희는 남은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앉을 거면 그쪽에 앉으세요.”
“…….”
서한은 혀를 차며 현성에게 고개를 돌리다, 이내 진희의 상처를 보고 멈칫했다.
“다쳤나 보군.”
“조금요.”
“상대는 누군데?”
“저도 모르니까 일단 앉으시죠?”
“내가 찾아줄 수 있어.”
‘얜 또 무슨 강아지 소리야.’
진희가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이상한 말 하지 말고 후딱 앉으라고 말했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온은 아까와 다르게 자리를 비켜주지 않고, 마치 비서라도 된 양 진희의 뒤에 섰다.
“자, 그럼 당신도 여기 온 이유가 뭔지 알려줄래요?”
진희는 다리를 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서한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과하러 왔어.”
“……사과요?”
“그래, 저번에 무례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놀란 것은 진희가 아니라 현성 쪽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서한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기로 서한은 자신감과 능력주의의 화신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금강 기업의 후계자들은 보통이 이런 마인드였다. 자신이 더 유능하다 생각하면 안하무인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현성이 금강과 마찰이 잦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요?”
하지만 그런 서한의 사과에도 진희의 얼굴은 시큰둥했다.
자기가 사과 잘 안 하는 성격이고, 잘나가는 사람이면 뭐 어쩌라고, 그게 내가 용서해야 할 이유가 되나?
또다시 목이 말라서 컵을 찾으려 하자, 곁에 있던 카온이 물컵을 진희의 손에 조심스럽게 얹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서한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저 남자는 동료냐?”
“비슷해요.”
또 말 흐리시네, 현성이 흘끔 서한의 표정을 살폈다. 정작 서한은 애매모호한 진희의 대답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저 독불장군이 이렇게까지 물러서는 거 보면 잘못을 크게 한 건가, 평소였으면 비아냥거렸을 그가 가만히 있자 현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둘이 사이가 안 좋나 보네요.”
“그렇죠.”
“아니.”
“…….”
진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한은 부정했다.
당신이 뭔데 좋다고 단정하는 거야? 진희가 빤히 서한을 바라보았지만, 서한은 미묘하게 진희의 눈을 피했다.
“목이 탄데 나도 물 좀 줄 수 있어?”
“아, 네.”
진희가 물컵 하나를 들려고 하자, 곁에 있던 카온이 그것을 빼앗아 물을 담았다.
그리고 정말 힘을 꽉 주고 턱! 하니 서한에게 들이밀었다. 덕분에 안에 있던 물이 찰랑거려 바닥으로 반이 흐르고 말았다.
‘아니, 쟤는 왜 또 저래.’
진희가 당황한 얼굴로 카온을 잡으려 했으나, 서한은 말없이 그 컵을 받아들었다.
‘너 왜 그래?’
다시 돌아오는 카온을 향해 진희가 입 모양으로 말하자, 카온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짜증 나는 얼굴입니다.”
“엉?”
“느낌이 그렇습니다.”
느낌이 그렇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영문 모를 말을 하곤, 그는 다시 진희의 뒤로 가서 섰다.
“큼, 그럼 사과는 받아주는 거지?”
“네? 뭐…….”
받아 줘야 하나, 그냥 무시해야 하나. 하지만 이대로 가면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될 것 같았다.
“알아서 하세요.”
“……그래.”
진희가 설렁설렁 대답하자 서한은 곧장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이번 테러범들이 여길 노릴 수 있다고 들었어.”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시영도 너와 같이 다닌다던데.”
“……그건 그렇죠.”
“그럼 이시영을 노리는 적이 같이 노리겠지.”
그렇게 되긴 하겠네. 시영은 당장 이번 주부터 그녀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지금은 손이 아파서 무리지만, 완쾌된다면 바로 나서볼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 많아지겠네.’
자신과 카온, 시영과 박준, 그리고 잠행하겠다는 현성과 그 동료까지 합하면 벌써 6명이나 된다. 파티 하나 구성하기엔 딱 알맞은 인원수였다.
“그래서 이쪽 분이 지켜준다던데요?”
진희가 턱 끝으로 현성을 가리켰다. 시영이 진희와 같이 다닌다는 소리는 또 처음 들은 현성이 이런저런 작전을 생각하던 중, 자신에게 시선이 돌아오자 고개를 들었다.
“……뭘 봐요?”
“…….”
어째서인지 서한이 끔찍하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자신을 노려봤다.
“……금강에서도 사람을 뽑고 있어. 저 녀석보다 안전한 호위를 붙여주지.”
“당신이 왜요?”
왜 굳이 날 도와준단 거지? 진희가 의문스럽다는 듯 묻자 서한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사과의 표시 겸, 내 동생을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당신 동생 싫어하지 않아?”
“…….”
이제 또 할 말이 없네. 가만 지켜보니 제법 재밌었다. 현성은 턱을 괴면서 진희와 서한의 묘한 대치상황을 지켜보았다. 서한 성격에 뭐라 한 마디 쏘아붙일 줄 알았는데, 그는 진희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우물쭈물하는 그의 시선이 연신 진희의 손에 가는 것이 보였다.
다친 사람이라고 배려해 주는 건가? 그 이서한이?
현성도 이해가 가지 않았고, 말하고 있던 진희도 서한의 호의가 낯설었다.
시영은 그의 형을 무서워했다. 저번에 식사하던 도중에도 연신 눈치를 봤고, 서한은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리고 서한의 영문 모를 적개심에 진희도 발끈했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자신이 도움을 주었던 집단에게 일방적인 의심을 받는 건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사람이 바뀌었나 싶을 정도로 태도가 일변했다.
첫 만남과 대체 뭐가 다른 거지?
“게다가 저 사람보다 강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요.”
진희는 순수한 마음으로 현성을 칭찬했다. 빈말이 아니라, 현성의 강함은 진희도 쉽사리 예측하기 힘들 정도였다.
자세와 근육으로 봐선 체술에도 강점이 있을 것 같고, 주술을 사용하던 테크닉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마법사들보다 수준이 높을 것이다. 당장 까마귀파의 두목, A급 마법사도 현성처럼 우아한 마법을 보여주지 못했다.
진희의 칭찬에 조금 당황한 현성이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려 하자, 서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아니, 있어.”
“누군데요?”
“나.”
“예?”
뭐요? 진희가 되묻자, 서한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 돼. 난 저 녀석보다 강하니까. 내가 지켜줄 수 있어.”
“…….”
그 떡 벌어지는 자신감에 진희가 할 말을 잃었고, 괜히 가만히 있다가 욕먹은 현성은 뒤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저와 싸워서 이겨 본 적 있는 것처럼 말하네요.”
“던전 가지 않은 지 얼마나 지났지? 탁자 앞에서 일하는 헌터가 실무를 논하긴 이르지.”
“등 따시게 지원받아 가면서 커간 온실의 장미 님이 혀가 기시네요.”
하지만 현성도 말로는 지지 않는다. 얼굴이 굳어가는 둘의 대치상황을 보던 진희가 탁탁, 슬리퍼로 발을 굴렀다.
“이서한 씨, 당신 안 바빠요? 대기업 후계자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