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23화
거대한 무기를 손에 쥐었을 때, 창술은 주체가 자신이 아닌 무기 그 자체가 된다. 몸은 그 창을 휘두르는 축이 되고, 최대한 넓은 반경을 베고 찌르기 위해 회전을 가속한다.
마치 물레방아의 중심이 되듯이, 회전축을 담당하는 몸은 쉴 새 없이 창을 휘두른다. 가로 베고 회전하여 적을 내려치며, 창대를 발판삼아 도약하여 거석상의 머리를 노린다.
“……!”
강력한 마력을 품은 할버드의 회전은 곧 폭풍과도 같다. 강력한 마력을 품고 덤벼오는 거석상들은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해 하염없이 물러난다. 팔과 다리가 잘려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 터프한 점은 몬스터다웠지만, 그럼에도 진희에게 유효타 하나 먹이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인간 태풍이다. 무덤 안은 이미 할버드가 땅바닥과 거석상을 긁고, 타격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굉장하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곰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름 강하리라 예상했지만, 이토록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 거석상에게 둘러싸여 불안한 얼굴을 하던 독수리와 너구리도 이내 진희의 무용에 안심하는 눈치였다.
[시스템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러나 곰만은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진희가 대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에 이견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궁금한 건, ‘일대일의 전투’란 룰을 설명했음에도 일 대 다수로 싸우는 현 상황이었다.
조건부 던전에서 룰, 조건은 절대적이다. 그가 지금껏 다녀왔던 그 어떤 던전에서도 이것을 거스르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뭐 하세요?”
“잠깐만.”
곰은 다시금 돌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돌 탁자 앞에 주저앉았다.
[일대일의 전투. 4명의 전사, 4전 3승.]
적혀 있는 글귀는 똑같았다. 곰은 혹시나 다른 글이 숨겨져 있진 않을까 돌 탁자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때, 마치 주의사항을 적어놓은 것처럼 작은 글자로 강조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하, 그랬군.”
곰이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이제야 알겠다. 파티는 애당초 생각을 잘못한 것이다. 이 던전의 룰은 거석상과의 일대일의 전투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세요?”
너구리가 곰에게 다가왔다. 고개를 갸웃하며, 혹시나 새로운 룰이 생겼나 싶어 물어오는 너구리를 향해 곰이 웃었다.
그래, 이 녀석들에게도 알려줘야겠지. 양심에 찔리고 싶진 않으니까. 곰은 그들이 결코 알고 싶지 않아 할 진실을 입에 담았다.
* * *
오래간만에 즐거운 전투다.
확실히 다 때려 부숴 버리는 전투란 스트레스 풀기에 적합했다.
창술은 검술에 비해 숙련도가 깊은 편은 아니었지만, 간혹 크기가 큰 적들을 상대할 때는 이만큼 적합한 기술이 없었다. 현재 진희의 신체로는 팔과 다리에 큰 무리가 갔지만, 그 피로감마저도 스트레스를 푸는 데 딱 알맞은 수준이었다.
검처럼 영역을 살펴 가면서 마력을 컨트롤할 필요도 없다. 그저 무작정 할버드의 날에 마력을 머금게 하고, 적이 가까이 올 때마다 온 힘을 다해 내려치거나 휘둘러 박살 내 버리면 그만이었다.
거석상의 공격은 곰과 독수리를 상대할 때보다 배는 날카롭다. 삐걱거리던 관절은 마치 사람인 양 부드러웠고, 그 안에 담긴 마력과 파괴력은 일반 검이라면 두 동강이 날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진희에겐 하등 상관없었다. 그보다 더 강한 마력으로 공격을 퍼부으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아…….”
이윽고 모든 거석상을 처리했다.
그녀가 지금껏 만나왔던 상대 중, 까마귀파 두목 이후 가장 강한 상대가 아니었나 싶었다. 약초밭에서 만났던 녀석들처럼 몰개성한 전투방식도 아니었고, 일반 몬스터들처럼 막무가내 돌진도 아니었다. 거석상은 정말 기사들인 것처럼 체계적인 창술과 진영으로 진희를 압박해 왔었다.
이런 던전이라면 몇 번이고 와줄 텐데. 간만에 전력 직전까지 낸 듯한 기분이라 후련해진 진희가 몸을 돌렸다. 아까 독수리가 하고 싶었던 하이파이브를 지금이라도 해 줄까, 그런 생각을 하고 돌아가려던 와중에.
“음, 빨리 정리했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 자리서 멈췄다.
진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언덕 앞에서 피가 묻은 채 서 있는 곰을 바라보았다. 곰의 손엔 독수리의 머리채가 잡혀 있었다.
“아, 악…… 도망…….”
독수리는 진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곰의 검이 목을 잘라버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너구리는 곰의 곁에 쓰러져 있었다. 출혈량으로 보아, 이미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
“…….”
“대체 무슨 짓인가…… 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이군.”
진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곰을 노려보자, 곰은 어깨를 으쓱하며 독수리의 머리를 바닥에 버린 후 돌 탁자에 앉았다. 방금 사람 두 명을 죽인 것치고는 태연스러운 말투였다.
“별수 없었네. 이 던전의 조건은 4전 3승이었거든.”
“뭐?”
“4명의 ‘전’사 중에 3번의 ‘승’리를 쟁취한 사람이 조건을 충족한다는 말일세. 그야 한국말로 보자면 4번 전투해서 3번 승리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래의 다른 문구를 읽어보니 뜻이 다른 걸 알겠더군.”
들어보게, 곰이 웃음기 어린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전투 시작 후 자리를 벗어날 시, 전투에 불응한다고 판단하여 병사가 길을 막는다’, ‘총 2번의 경고가 있으나, 3번째엔 탈주자를 처벌한다’. 알겠나? 거석상들은 애당초 일대일 전투 상대가 아니었어. 여기서 전투란 4명의 파티원이 서로 대결하여, 총 3번의 승리를 한 자가 우승하는 룰이란 말일세.”
불합리한 룰이다. 4명이 서로 대결을 하는데 승리는 총 3번을 취해야 한다.
이 던전은, 즉 ‘한 명이 다른 세 명을 모두 이겨야만 충족되는’ 조건의 던전인 셈이다.
“그리고 마지막 글귀는 이것이더군. ‘그러나 예외적으로, 병사를 이긴 자에 한해 1승을 추가한다’. 음, 헌터로서 말하자면 이 던전의 가장 효과적인 공략 방법은 이렇겠군. 총 2번의 ‘약한’ 거석상 병사를 이기고 나서, 아군 파티 중 한 명을 배신해서 죽이는 거지. 그럼 굳이 마지막 대장들과 싸울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야.”
물론 진희처럼 압도적인 힘으로, 파티원이 아니라 거석상들을 총 3번 다 이겨 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이 던전은 애당초 ‘파티원들을 배신하라’는 조건이 기본적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명의 전사 중에 3번의 승리를 가져간 사람이 이긴다. 승리는 거석상을 상대로도, 파티원을 상대로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거석상은 반드시 ‘세 번째’ 차례에 대장전을 거행한다.
곰은 ‘한 번’ 거석상을 이겼다.
그리고 독수리와 너구리를 죽이며, 총 ‘세 번’의 승리를 가져가게 된 셈이다.
[시스템이 종료됩니다.]
“거봐, 내가 조건을 충족했지?”
“……야, 그게 지금 변명이냐?”
진희가 할버드를 어깨에 멘 채로 다가왔다. 방금까지 동료였던 사람이 죽었다 해서 크게 당황하거나 슬퍼할 성격은 아니었지만, 좋았던 기분이 다시 추락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험악한 그녀의 눈에 곰이 껄껄 웃었다.
“역시 아직 초보로군. 이곳에서 이런 일은 허다해. 오히려 속은 이들이 잘못한 거지. 헌터란 모름지기…….”
“아직도 개소리네. 대체 속은 사람이 무슨 잘못이야? 사기 친 놈이 잘못이지. 꼭 사기꾼들이 자기변명 하려고 그런 소리 하더라.”
“……허허.”
아직도 여유로운 곰을 보며 진희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딴 짓 하고서 내 앞에 서 있는 건 무슨 자신감이야?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아니지. 내가 봐도 자네는 나보다 강한 것 같거든.”
하지만, 하고 곰이 자신의 마스크를 벗었다.
“……!”
마스크를 벗자마자, 곰의 신체가 변형되기 시작했다. 듬직하던 어깨가 줄어들고, 머리와 가슴팍, 다리, 모든 신체가 ‘여성’으로 변화한다.
저 마스크는 폴리모프 아티팩트였나, 진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눈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복잡한 마법이 단숨에 곰을 변화시켰다.
키는 진희보다 조금 작았다. 대신 여우처럼 날렵한 눈매와 엷은 입술, 짧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여성이 그곳에 나타났다.
“후우, 역시 이건 오래 할 만한 게 못 돼.”
그와 동시에 곰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아무래도 마스크의 기능은 폴리모프뿐 아니라, 마력을 제한하는 역할도 했던 듯싶었다.
진희는 급격하게 늘어나, 이내 자신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진 곰의 마력에 창을 꽉 쥐었다.
어림잡은 수준만 보자면, 경찰서에서 만났던 신현성이나, 이서한에 필적한다.
“……왜 굳이 변장까지 했지?”
“여기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거든. 여기 독수리란 꼬맹이가 입이 무거워서 말이야. 초짜 헌터가 아니면 파티에 끼워주지도 않아서 이렇게 변장까지 했다니까.”
말투까지 바뀌었다. 자신이 배우라도 된 듯, 그간의 연기를 버리려는 것처럼 태도를 일변했다. 진중하던 어투는 어디 가고 하이톤의 목소리로 독수리의 머리를 차며 툴툴거린 그녀가 돌 탁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돌 탁자가 마치 상자처럼 열리며 작은 수정 구슬이 튀어나왔다. 그것을 거머쥐고 몇 번 둘러본 그녀가 진희에게 말했다.
“여기 던전의 보물은 알고 있었지만, 조건을 몰랐거든. 괜히 내가 들어가기도 귀찮아서 이 던전을 잘 알던 파티에 들어가기로 했지. 뭐, 언니처럼 강한 사람이 여기 올 줄은 몰랐어.”
“내가 왜 네 언니야.”
“그럼 동생인가?”
언니 몇 살이야? 그녀가 빙긋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수정 구슬을 흔들었다.
그 장난스러운 모습에 순간 짜증이 일던 진희가, 단숨에 땅을 박차고 앞으로 돌진했다.
“엇차차.”
“……!”
초 단위의 빠른 움직임이었다. 바람마저도 따라가지 못할 완벽한 기습, 코앞까지 곰의 앞에 도달했을 때, 진희는 자신의 창이 그녀를 꿰뚫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게이트’였다.
“이건…….”
“와우, 놀랐다. 언니 진짜 세긴 하구나. 나 소름 돋은 거 봐.”
가로로 길게 쪼개진 게이트가 곰의 전방에 나타나, 진희의 공격을 방패처럼 막아버린 것이다. 창은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창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게이트에 묶인 창은 아무리 힘을 줘도 움직일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너…….”
“내가 설마 언니 같은 사람한테 괜히 얼굴을 보였을까 봐?”
곰이 배를 잡고 깔깔 웃더니, 들고 있던 수정 구슬을 가방에 집어넣고 피가 묻은 검을 꺼내 들었다.
“다아 예상이 갑니다요.”
“……!”
아직 창을 쥐고 있어 움직이지 못했던 진희를 향해 곰의 검이 빠르게 찔러 들어왔다. 본래의 마력이 해방된 탓인지, 대단한 빠르기와 공격력에 진희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완벽히 피하진 못해, 그녀의 뺨에 기다란 상흔이 남겨졌다.
“하, 진짜.”
진희는 뺨에 손을 올렸다. 마력에 당한 열상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었고, 피가 흘러 턱에 핏방울이 맺혔다.
“이제 창도 못 쓰지?”
게이트를 없앤 곰이 창을 잡더니, 뒤로 휙 던졌다.
승리를 확신한 듯 자신만만한 비웃음을 띄운 곰을 보며 진희가 중얼거렸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응?”
“너, 그 테러범들이랑 한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