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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22화 (22/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22화

진희는 그간 몬스터 사냥이나 아이들 수련을 위해 던전을 찾은 게 십 수 번이었지만, 이처럼 정식 파티를 짜서 돌입한 적은 처음이었다. 나름 설레는 마음에 던전으로 입장했으나.

“…….”

“강아지! 이쪽도요!”

결과는 싱거웠다.

진희의 무력이 던전과 수준이 차이 난다…… 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이 파티의 절대적 안전주의 때문이었다.

던전에 입장하고 처음 30분, 전투를 2번 정도 치르며 진희는 이 파티의 수준이 제법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독수리와 너구리의 실력은 어림잡아 C급은 돼 보였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곰도 C급 중 상위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진희도 딱 C급에 맞을 정도의 활약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던전은 너무나 쉬웠다. 비홀더는 한 마리씩, 아무런 특수 능력이 없는 거대 쥐는 많아봤자 다섯 마리씩 출몰했고, 이마저도 전위 선에서 정리되는 경우가 잦았다. 너구리가 공격 마법을 사용할 틈조차 없었다.

게다가 독수리는 어찌나 정찰에 신중을 기하는지, 몬스터를 만나 싸우는 시간보다 가만히 서서 정찰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었다. 게다가 전투도 무조건 각개격파 위주. 적의 수가 많아지면 그 즉시 후퇴한다.

이해는 한다. 이곳은 목숨이 달린 전장이니까. 안전을 지키는 습관이야말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헌터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겠지.

하지만 그러고 자시고 상관없이, 진희는 스트레스를 풀러 온 던전에서 스트레스만 쌓이고 있었다.

정찰이고 뭐고 상관없으니 앞으로 나서서 싹 다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와, 강아지 정말 강하시네요!”

“아, 예.”

동물 이름에 ~씨 하고 호칭을 붙이는 것도 우스워서 이름만 부르고 있었는데, 강아지라고 불리자 기분이 묘하긴 했다. 독수리의 칭찬에 진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고맙다 대답했다.

“이제 곧 마지막 층이에요. 보물은 딱히 없었지만 음…… 그래도 비홀더 피를 채취는 했으니까, 나름 금액은 나오겠어요.”

“비홀더 피가 잘 팔리나 봐요.”

“네, 이게 이 근방에선 제일 잘 팔려요.”

비홀더는 눈알 빔으로 생명력과 마력을 빼앗고, 마비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비홀더의 혈액은 가공 후 투약 시 마취제로 활용할 수 있었다.

몬스터의 피가 인간에게 흐르는 건가, 생각해보면 참 대단했다. 저 징그러운 생명체의 혈액을 쓸 생각을 하다니. 진희가 비홀더의 시체를 발로 차며 전진했다.

“어? 마지막 층…… 인데 여기가?”

그러나 계단을 내려가고 그들을 반긴 것은 마지막 층이 아닌, 거대한 영릉이었다.

본래라면 관들이 여럿 있어야 할 복도가 아니라, 거대한 광장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돌 언덕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덕을 중앙에 두고, 사방에는 창과 방패를 든 거석상들이 서 있다.

“어, 어라? 원래 이런 장소가 아니었는데?”

“……그렇군, 이곳은 조건부 던전이다.”

“조건부요?”

지금껏 말 한마디 없던 곰이 입을 열었다.

“특정 조건이 있어야만 해금되는 던전이다. 파밍 던전이 아닌 경우엔 가끔 나타나지.”

“그, 그럼 저희가 조건을 통과했단 건가요?”

“모른다.”

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조건부 던전은 제법 자주 등장하는 던전이었지만, 대부분의 헌터들도 그 조건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템이라면 특정하기 편했겠지만, 간혹 사람 수나 성비, 강함의 수준, 심지어 날짜와 시간이 영향을 주기도 해서 조건을 알아보는 건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조건부 던전은 대부분이 클리어하는 순간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잘 찾아왔나 보군.”

곰은 독수리의 어깨를 두들기며 칭찬했다. 독수리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이 던전은 사람들이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해서 방치된 하급 던전이었다. 몬스터도 별 볼 일 없고 길이도 짧다.

독수리는 이 던전에 숨겨진 보물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꾸준히 파티를 짰고, 이처럼 처음으로 조건부 던전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지, 진짜인가 봐!”

너구리가 방방 뛰며 독수리의 손을 맞잡았다. 독수리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얼떨떨해했지만, 이내 자신도 소리 지르려던 걸 애써 참으며 기뻐했다.

숨겨진 보물이란 건 일반인에겐 로또와 같은 대박이었다. 적당히 좋은 아티팩트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고, 보물이란 표현이 들어가는 장비의 경우엔 억도 우습게 넘기는 수준이다.

돌파만 할 수 있다면 떼돈을 벌 수 있는 찬스다. 독수리와 너구리의 눈에 희망이 가득 찼다.

“그럼 들어갈 건가요?”

“가, 가야죠?”

“바로 가죠.”

이미 몸을 풀지 못한 스트레스 때문에 진이 빠지던 차였다. 진희가 재촉하자 독수리가 다시 진영을 짜고 안쪽으로 진입했다.

거석상들은 그들이 접근할 때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2m는 가뿐히 넘을 것 같은 거석상들을 지나쳐, 돌로 만든 언덕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무덤으로 추측되는 언덕 앞에는 돌로 만들어진 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진희가 탁자 위의 먼지를 손으로 대충 털어내고, 적혀 있는 글을 읽었다. 친절하게도 한글이다.

“일대일의 전투. 4명의 전사, 4전 3승.”

“……룰인가 본데요?”

4명의 전사란 파티를 말하는 것이었고, 4전 3승이란 최대 3번의 승리를 챙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근데 누구랑 싸우는…….”

쿠르릉.

독수리가 의문을 표하기 직전, 거대한 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영릉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던 거석상 중 넷이 이쪽을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저게 상대인가 보네요.”

진희는 독수리의 의문에 대답해 주었지만, 독수리는 이미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저, 저 돌덩어리랑 싸우라고요? 제 키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럼 포기하게요?”

“그, 그건…….”

그러긴 힘들었다. 당장 일확천금의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 지레짐작하고 도망치기엔 너무나 아쉬웠으니까. 독수리는 너구리를 바라보았지만, 너구리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지팡이를 꽉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곰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리고 있군. 우리가 한 명 나서야 하는 듯싶다.”

네 마리의 거석상은 파티의 정 반대편에서 다시 기립했다. 그중 거석상 하나가 창을 들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파티와 거석상들의 딱 중앙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았다.

“흠, 내가 먼저 나가보도록 하지.”

곰이 진희와 독수리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독수리는 아직 용기를 내지 못한 상태였고, 진희는 팔짱을 끼며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곰의 전투방식은 전형적인 방패병이다. 라운드 실드를 들고 적의 공격을 흘려낸 다음, 들고 있던 검으로 차근차근 적에게 대미지를 입히는 방식이다. 파티에 있어서 단단한 전위에 탁월한 전투방식이었으며, 일대일 백병전에도 좋은 전법이었다.

진희가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워하는 전사이기도 했고.

반대로 거석상은 거대한 창을 들고 나왔다. 삐걱거리는 움직임은 좋게 말해도 부드럽다고 볼 순 없었지만, 그 거구에서 나오는 파워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하압!”

곰이 가운데로 나서자마자 거석상도 창을 들고 덤벼왔다.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곰은 방패로 공격을 막기보단 흘려보내거나 피하기를 선호했고, 상처를 조금씩 입히기 시작하며 승기를 넘겨받았다.

“방어력은 별 게 없네.”

노후화가 된 탓인지, 곰의 검은 거석상을 상대로도 쉽게 박혔다. 마력을 두른 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한 거석상은 10여 분 후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후우.”

“고생했어요.”

곰이 다가오자 어느새 회복한 독수리가 신이 난 얼굴로 손을 들었다. 하이파이브를 하겠단 뜻이었지만, 곰은 무시하고 진희에게 다가갔다.

“힘은 적당하군. 내가 1승을 챙겼으니, 독수리와 너구리 중 한 명만 이기면 된다.”

곰은 진희가 당연히 이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너구리와 독수리는 모르겠지만 곁에서 싸워본 입장에서 진희의 무력은 자신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곰은 내심 진희가 B급 수준의 헌터가 아닌가 생각했다. 쉬엄쉬엄 움직이면서도 날카롭게 전위를 정리하던 진희라면 거석상도 어렵지 않게 이기리라 말하며, 독수리에게 2번째 싸움은 네가 하라며 떠밀었다.

“왜, 왜요?”

“승률이 낮은 사람이 처음에 하고, 좋은 사람일수록 마지막에 하는 게 좋으니까.”

“…….”

그건 그랬다. 독수리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독수리는 딱 평범한 검사 헌터였다. 검술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재주가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몸놀림이 조금 날쌔고 주변 기척을 잘 읽는 정도이기에, 거석상과 같은 몬스터에게 큰 힘을 발휘하긴 어려웠다.

“어라?”

그러나 어째서인지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곰과 싸웠을 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거석상은 더 느려진 움직임과 힘으로, 오히려 독수리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독수리도 이렇게 싸움이 끝날 줄은 몰랐는지, 온몸에 상처를 입고 무릎을 꿇는 거석상을 보며 어처구니없단 눈빛이었다.

그가 돌아오자, 곰이 진희에게 손짓했다.

“……저급 던전이라 그런지 어렵진 않군. 강아지가 마무리하면 되겠어.”

보고 있던 진희도 좀이 쑤시던 상황이었다. 이번에야말로 하이파이브를 하겠다는 듯 즐겁게 달려온 독수리를 지나쳐 광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응?”

그런데 아까와는 사뭇 상황이 달랐다. 분명 하나의 거석상이 나왔던 방금과 달리, 진희가 경기장에 나오자마자 사방에서 지켜보던 거석상들이 차례차례 진희를 향해 다가온 것이다.

“뭐야, 이거.”

진희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도와주기 위해 이쪽으로 오려던 일행의 앞에도 거석상이 앞을 가로막았다. 딱 봐도 진희 혼자서 이 거석상들을 다 상대하라는 의도였다.

“일대일이라며!”

[시스템을 다시 시작합니다. 대장전 시작합니다.]

진희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듯 던전에서 안내 음성이 울려 퍼졌다.

던전의 시스템은 진희를 파티의 대장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안내 음성이 끝나자마자, 진희의 주변에 기립했던 거석상들이 모두 창을 들었다.

조금 전의 독수리, 곰을 상대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마력을 휘황찬란하게 두른 창이 동시에 진희를 향했다.

“……하여간 성질 더럽게 건드리네.”

오늘 그 싸가지 없던 황태자도 그렇고, 지루한 던전을 돌파하고 왔더니 함정에 빠뜨리는 이 이상한 던전도 그렇고.

하지만 스트레스 풀기엔 딱 좋겠네.

진희는 검을 변화시켰다. 아밍소드가 아닌 그녀의 키에 근접하는 거대한 창.

꺼낸 것은 할버드(Halberd).

이런 거대한 적들을 상대할 땐 창만큼 괜찮은 무기가 없다. 진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바위 써는 맛은 별로일 것 같지만, 온종일 짜증 났던 기분 풀기엔 샌드백도 나쁘지 않겠지.

대장전이라, 듣기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기사단장님 나가신다. 진희가 창을 어깨에 올린 채 짐승처럼 자세를 낮추고 앞으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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