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21화
비죽 웃은 서한이 턱을 괴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 소중한 동생을 구해준 보상으로 보육원을 후원해 달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유가 뭐지?”
“제가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없긴 해. 궁금해서 그렇지. 뭐, 네가 보육원 출신이거나 접점이 있나 싶어서 조사해 봤는데 그것도 아니더라고. 순수한 호의인가, 아니면 무슨 생각이 있는가 싶었지.”
진희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작게 웃었다.
“놀랍네요, 벌써 뒷조사를 다 했나 봐요.”
“당연히 하지. 난 B급 이상의 헌터는 가족관계까지 다 외워두고 있거든. 게다가…….”
마침 다음 요리가 나왔다. 식탁에 올리려던 종업원에게서 접시를 빼앗아 냉큼 요리를 입에 집어넣은 서한이 말했다.
“성인이 되고 마나를 각성한 A급 수준의 헌터라니, 그냥 흘려들을 수는 없는 농담이라서 말이야.”
‘과연 그런가.’
자신을 보고 싶다고 했던 이유가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 아니란 걸 확실히 알았다.
진희는 자신의 자리에 놓인 나물과 생선조림을 보며 생각했다.
맛난 음식으로 시영의 부탁을 들어주도록 유도한다거나, 시영을 구해준 답례로 대접한다거나, 그런 속 편한 이야기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니었다.
이 남자, 이서한은 진희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건 좀 재수 없는데.’
어느새 케네스가 눈앞에 있단 사실도 잊을 만큼, 진희의 얼굴에 뚜렷한 짜증이 일었다.
“마치 제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은 말투네요.”
“의심하고 있단 사실은 부정하진 않겠어. 박준은 착한 사람이라고는 하는데, 뭐 아는 게 있어야 평가하지 않겠나. 갑자기 튀어나온 신입 헌터, 근데 실력은 A급, 전투에 대해 뭘 배운 경력도 없는데 검은 귀신같이 잘 쓴다. 그리고…….”
서한이 시영을 바라보았다. 깨작깨작 밥을 먹고 있던 시영은 서한의 눈빛이 느껴지자 어깨를 움츠렸다.
“소중한 동생이 의지하는 상대라든가.”
“…….”
진희가 딸칵, 소리 나게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귀찮으니 까놓고 말하세요. 제가 테러범이라 생각하나요?”
“거기까진 아니야, 테러범이었다면 오히려 신분을 숨기고 행동했겠지 싶거든. 하지만 금강에서 나오는 콩고물 얻어먹으려고 수작 부린 게 아닐까 생각하긴 해. 그런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차라리 대놓고 말하니 그나마 나았다. 괜히 여기서도 속내를 숨기고 속을 긁었다면 진희도 대놓고 독설을 날렸겠지.
하지만 그가 선을 넘은 건 사실이었다.
“제가 그딴 의심에 해명해야 할까요?”
“해주면 고맙겠고, 안 하면 난 계속 의심하고 조사하겠지.”
“하시든가. 대신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거 들키면 가만 안 둬.”
“…….”
“…….”
진희의 살벌한 말에 방 안이 얼어붙었다. 시영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희를 올려다보았고, 박준은 올 게 왔단 표정이었다. 진희의 앞에 있던 서한만이 진희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묘한 대치였다. 서한은 방금까지 비아냥거리던 태도와 다르게 진희를 탐색하듯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밥맛 떨어져.”
진희는 여느 때와 같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느 때란 건, 던전에서 몬스터를 상대할 때와 같단 이야기다.
물론 서한의 의심은 이해가 가는 수준이긴 했다.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엄청난 실력자가 대기업의 막내아들을 도와주고 혜택을 받았다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태도가 욕 나올 정도로 무례한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럼 박준 씨, 이 꼬맹이는 알아서 연락하게 해요. 이번 주는 좀 바쁘니까 다음 주쯤에 보면 되겠네요. 던전은 알아서 좀 찾아주시고요.”
“아……. 예.”
“그리고 다음부터 이런 자리 부를 거면 돈부터 내놔요. 돈 받고 먹어도 고민할 점심 식사니까.”
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찬을 올려주려던 종업원을 만류하고, 불량스러운 발걸음으로 장지문을 열었다. 서한이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말을 걸었으나.
“그럼 이 누나는 간다.”
“이봐.”
“이봐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야지, 양아치 새끼야.”
진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 * *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뭐가.”
그녀가 나가고서 십여 분 후, 이미 음식이 식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선뜻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시영은 계속 서한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어딘가 개운한 얼굴이었고, 박준은 연신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정말로 의심하고 있던 겁니까?”
“저 여자를? 조금은 했지.”
서한은 진희를 떠올렸다.
나른한 눈매와 세상 풍파를 겪은 듯한 메마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객관적으로 미인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호감이 가는 인상이 아니었다.
박준이 그녀를 맹목적으로 칭찬한 것도 이해가 갔다. B급에서도 성장 중인 박준이 보기에도 강력한 힘을 가졌으며, 서한의 무례함에 화낼 줄 아는 정직한 사람이었으니까.
“……이번 행동은 무례하셨습니다.”
“…….”
서한은 박준의 무술 스승쯤 되는 인물이었지만, 간혹 그 비틀린 성격이 만들어 내는 사건 사고엔 제자도 질릴 정도였다.
“그냥 적당히 굽혀줄 줄 알았지.”
“진희 씨가 왜 굽혀야 합니까?”
“…….”
서한은 S급, 등급 외의 헌터이고 금강 기업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하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진희가 서한을 거리낄 만한 입장도 아니었다.
그녀는 A급, 혹은 그 이상의 힘을 가졌는지도 모를 강한 헌터였고, 이는 금강뿐 아니라 다른 기업에서도 엎드려 절하며 모셔가도 이상하지 않을 헌터였다. 게다가 금강 기업의 부하직원도 아니었다.
“제가 알던 도련님은 이렇게까지 무례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제게 언질도 없으셨잖습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뭐지?’
가만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그도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한은 진희를 의심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이처럼 적대적인 관계가 되길 원한 것도 아니었다.
기선 제압을 할 생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화나게 만들려고 계획한 적도 없었다. 그저 애물단지인 자신의 동생 시영을 노린 사람인지 아닌지, 딱 그 정도만 판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희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분명 서한은 진희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 특이하지만 눈길이 가는 얼굴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잊었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마치 과거의 인연이라도 있던 것처럼 진희를 보는 순간 반가움과 적개심이 동시에 일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깨작깨작 젓가락을 드는 것도, 시영을 다독이는 것처럼 소매를 붙잡고 늘어지던 그의 손을 맞잡은 것도, 박준을 바라보는 것도. 자신에게 말이 없는 것도.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왜지?”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 날이 선 말을 하며 무례하고 굴었는지.
이 시원한 방 안에서 왜 이렇게 목 주변이 뜨거운지.
“…….”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나야겠다. 서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5. 얼굴 봤어
“던전 좀 갔다 온다.”
“예?”
벌컥 문이 열려 목소리가 들린 후, 다시 쾅 문이 닫혔다.
은정을 따라서 어린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던 카온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말을 한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진희 누나였어요.”
“…….”
“근데 엄청 화나 보였어요.”
곁에서 밥을 먹고 있던 청하의 증언이었다. 카온도 목소리에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대체 뭐지? 왜 화가 났지? 카온은 얼떨떨한 얼굴로 의아해하면서도, 숟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아아!”
유치원생 아이가 얼른 달라고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상을 엎었어야 했나?”
“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진희는 던전에 들어와 있다. 스트레스가 도저히 풀리지 않아 검이라도 휘둘러야지 하는 마음에 신림역으로 달려와, 딱 봐도 초보자 티가 나는 파티에 합류해 던전에 진입했다.
혼자서 던전을 들어가도 괜찮았지만, 그러다 간혹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에 이번엔 파티에 들어가고자 마음먹었다.
게다가 그녀가 이후 파티를 이끌게 됐을 때, 헌터들의 생태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럼 얘기했던 것처럼 진영을 짤게요.”
파티의 인원은 총 네 명이었다. 전위 전사인 진희와 탱커 한 명, 전방 정찰을 담당하는 보조 전사 한 명, 마법사 한 명.
진희를 제외한 모두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신림에서는 신분을 숨기고 일을 하는 게 평범한 일이었다. 진희도 파티장에게 마스크를 하나 얻어서 착용했다.
신분을 숨기다 보니 당연히 이름도 별명으로 불렸다.
탱커는 ‘곰’, 보조 전사는 ‘독수리’, 마법사는 ‘너구리’, 그리고 진희는 ‘강아지’였다.
굳이 강아지를 쓰셔야겠어요? 라고 독수리가 물었지만, ‘왠지 오늘은 개XX란 말을 쓸 거 같으니까 강아지로 할래요’라고 의미 불명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파티가 초보자 티가 나는 이유는 장비에서 드러났다. 곰과 독수리는 사실상 평상복에 무기만 갖춘 지경이었고, 너구리만이 마법사다운 오브(Orb)와 아티팩트를 들고 있었다.
너구리와 독수리는 서로 지인 관계인 듯했고, 곰과 진희만이 서로에 대한 일면식이 없었다.
“대문자 Y 느낌으로 진입할 거예요.”
들어가려는 던전은 거대한 무덤 형태의 지하 던전이었다. 거대 쥐와 비홀더, 거미 등이 출몰하는 이 던전은 현재 낮은 난이도에 비해 성과를 얻은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즉 이 파티는 아직 발견 못 한 보물을 찾기 위해 꾸려진 파티였다.
진입하는 진영은 Y자 형식, 끝의 두 꼭짓점에 전위인 진희와 곰이 서고, 가운데엔 오더와 딜러 역할의 독수리가, 아래쪽 꼭짓점엔 너구리가 전위를 보조하는 방식이었다. 안전하고 단단한 진영이었다.
그 이후 독수리는 던전에 입장하기에 앞서 위험한 점을 하나하나 짚어주기 시작했다. 거대 쥐의 이빨에 다치면 병균이 생길 수 있으니 전투가 끝난 즉시 소독을 해야 한다거나, 비홀더가 눈깔 빔을 쏘기 전에 처치해야 한다거나, 장비 아티팩트가 나오는 경우엔 직군에 맞는 사람에게 돌아가고 대신 입찰 가격을 설정해야 한다거나.
‘이런 면에선 게임인데?’
듣고 나니 온라인 게임과 매우 흡사했다. 진희가 간혹 즐겼던 게임의 파티 시스템과 대부분이 동일했다. 그만큼 게임 시스템이 완성도가 높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 이상으로 공평한 시스템을 찾아내지 못한 것일까.
“들어갈게요!”
이윽고 모든 설명이 끝났다. 독수리의 말과 함께, 파티는 던전에 입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