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20화
성인이 돼서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업적이 없으면 금강의 사람이 될 수 없다.
시영은 아직 성인이 아니지만, 그의 형이나 누나가 회장이 되는 순간 내쳐질 것은 분명했다. 돈독하지 않은 대기업 남매들의 결말로는 뻔한 클리셰였다.
“그래서 진희 씨를 찾아온 겁니다. 회장님 명령으로 한동안은 파티를 찾을 수 없는 시영 도련님을, 진희 씨의 파티에 넣어주실 수 있나 싶어서…….”
“게다가 넌 강하잖아.”
시영이 진희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나도 A급 헌터의 전투를 본 적 있지만, 넌 분명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강하잖아. 그 테러범도 너한테는 상대도 안 됐고.”
“그건 그렇긴 한데.”
애당초 그 후드티를 입은 인형술사는 진희와 상성이 안 좋았다. 진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영이 절박한 얼굴로 진희에게 말했다.
“바깥에서 다른 헌터를 찾으려고 해도 소용없었어. 금강이란 이름을 듣고 빨대 꽂으려던 놈들도 있었고, 지레짐작하고 내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A급 수준의 힘을 가진 사람은 파티에 끼워 주지도 않아.”
“흐음.”
이러려고 날 부른 거구나. 굳이 비싼 한정식집으로 불러서 배라도 채워준 후에 꼬드기려고 했나?
진희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박준을 바라보았다. 박준은 명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던전에서 나오는 보물은 다 양보할게. 그냥 업적만 쌓을 수 있게 도와줘. 나 C급 마법도 충분히 잘 쓴다니까? 배울 수 있는 마법은 다 외웠어!”
진희에게도 마법사가 필요하긴 했다. 그녀와 카온은 전사, 기사로서의 소양을 보육원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지만, 마법에 대해선 문외한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헌터를 지원했던 아이 중 마법사를 희망하는 애들이 있다면 다른 마법사들을 과외로 불러야 하는 판국이었다. 정 안 되면 비싼 돈을 들이고 애들을 헌터 학원에 보내는 수밖에 없겠지.
그런 면에서 시영의 수준은 아이들 선생으로도 딱 좋았다. 나름 가성비 좋은 C급에다가 마법사, 돈도 많으니 수업 기자재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D급 기초 마법을 배우는 강의가 한 달에 300만 원이었던가 그랬지……. 진희의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제법 괜찮은 제안이긴 하네.
테러범이 걱정되긴 했지만, 어차피 시영을 직접 보육원에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애들을 데리고 바깥(던전)으로 나가서 배우게 만들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들이 공격해 온다면 상대해 줄 의향도 있었고.
진희가 고개를 내려 시영을 바라보았다. 오동통한 볼살과 조금 치켜 올라갔지만 땡글땡글한 검은 눈과 눈매. 묘하게 어울리는 가르마 펌.
얼굴도 귀엽고, 보고 있기 좀 괜찮긴 해.
“……야.”
“응? 받아줄 거야? 돈은 얼마나 줄까? 던전 하나에 이 정도는 어때? 아니면 마정석을 줄 수도……!”
“근데 넌 왜 반말이냐?”
“……어?”
유교적 사회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갑일 땐 갑질하는 것만큼 재밌는 일이 없지. 진희는 시영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찻잔을 들고 들어 있던 차를 원샷 했다.
“아까부터 ‘너’라고 말하지 않나, 반말을 하지 않나.”
“어…….”
“자, 따라 해봐. ‘누나, 도와주세요’ 하고. 부탁을 하려면 자세가 되어 있어야지.”
볼에 손가락을 얹고 뿌잉뿌잉도 해봐라.
마치 청하와 종혁을 놀렸던 것처럼 진희의 비틀린 비웃음이 작렬했다. 그 웃음을 정면에서 보고 있던 박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
그로부터 10분.
새로운 손님이 방으로 찾아오기 전까지, 진희는 호칭과 애교를 들먹이며 시영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장지문을 열고 들어온 검은 정장의 훤칠한 사내는 중얼거렸다.
시영이 눈물 어린 얼굴로 진희를 향해 ‘누나를 사랑하는 동생의 귀여운 부탁’을 하던 도중이었다. 사내는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시영을 내려다보았다.
“오셨습니까, 첫째 도련님.”
“오랜만이군, 박준.”
“응?”
진희도 고개를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박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사내의 정장 재킷을 받아들고 있었다.
사내는 딱 봐도 헌터, 그것도 전사인 듯 근육이 잡힌 몸을 가지고 있었다. 정장을 입고 있음에도 그 태는 뚜렷하게 보였다. 박준보다 조금 더 큰 키의 그는 그간 답답했는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고, 박준의 옆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케네스?”
“응?”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진희는 시영을 놀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깔, 그리고 묘하게 턱선과 목선이 다르긴 했지만.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과거 바제트가 기억하는 제국의 제1 검이자 황태자로서 존재했던, 고집스럽지만 강렬한 눈매를 가진 ‘케네스’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제국의 황태자이며, 검으로 유일하게 경합(競合)을 다퉜던 사내.
그리고 자신의 동생에게 독약이 담긴 술을 건네준.
원수와도, 은인과도 같았던 그 사내가 진희의 앞에 존재했다.
“차는 안 마시니까 맥주나 좀 가져오라고 해. 생맥으로.”
……왠지 예전보다 쪼끔 불량스러운 어조로 말을 하면서.
* * *
‘검은 검으로 남아야 한다.’
그 권위적인 말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말을 들었을 때, 바제트는 올 것이 왔음을 예감했다.
너무 나댔다.
황태자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제트는 흔히 말하는 전쟁 영웅이다. 그녀는 제국이 영토 전쟁을 벌였을 때 가장 큰 무훈을 쌓은 기사이자 장군이기에, 그 공훈으로 수도 방위 기사단장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귀족 중 머리가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이것이 상이 아니라 족쇄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전선에 나갈 일 없는 수도 방위 기사단. 황궁의 근위 기사단의 하위 격이며, 제국의 수도를 지키는 일종의 ‘경비병’과도 같은 업무를 하는 이 기사단은, 바제트가 더 이상 공훈을 쌓을 수 없도록 만드는 일종의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바제트는 기사단장에 위임될 때만 해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전쟁은 질릴 만큼 했고, 느긋하게 쉬면서 지낼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강한 힘을 가지고, 유력자의 가문에 태어난 그녀는 결국 정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제트가 눈치가 없거나 어리석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황궁의 귀족들이 그녀보다 남을 이간질하는 것에 더 특별한 능력이 있었을 뿐.
스캔들과 이간질. 모략과 누명.
기사단장이 되고 2년 만에, 그녀는 ‘하는 것 없는 무능한 기사’란 이름을 얻고 만다.
그럼에도 바제트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황궁의 귀족들이 남을 험담하는 것이야 일상적인 일이었고, 귀족들 사이에선 말이 나오더라도 그녀와 같이 지내는 기사 중에서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전장에 한 번이라도 나가봤다면, 그곳에서의 바제트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녀의 험담을 입에 담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수도 테러 사건에서 시작된다.
정체불명의 단체가 대규모 마법과 몬스터 소환으로 수도를 테러했고, 그것을 바제트가 막았다. 규모에 비해 큰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문제는 그 테러로 죽어버린 사람 중 바제트를 험담했던 귀족들이 소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윽고 음모론은 그 크기를 부풀렸다. 전쟁에 미친 기사가 황궁을 쿠데타 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는 말부터, 자신을 업신여기던 귀족들을 숙청하기 위한 황제와의 연극이라는 말까지.
그 모든 논란이 있었던 후, 바제트를 부른 황태자가 꺼낸 말이 바로 저것이었다.
더 이상 나대지 말고, 입을 닫고 고개를 숙이며 살아라 이 말이겠지. 수도 방위 기사단장이란 직위에 걸맞게 전투는 나가지 말고 안전한 자리에 머물면서.
바제트는 가만히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변했다. 전장에서 서로를 돕던, 야차 같지만 아군이기에 든든했던 그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정치에 물들어버린 냉철하고 잔혹한 군주만이 그 자리에서 기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받듭니다.’
바제트는 쓰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 * *
“……진희 씨?”
“……아, 네.”
한동안 넋이 나가 있던 진희는 박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습관적으로 눈가를 매만진 그녀가 다시금 박준의 곁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언론에도 제대로 얼굴이 나왔던 적이 없던, 베일에 싸인 ‘금강 기업’의 후계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진희를 지켜보고 있었다.
“……?”
진희는 뭔가가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시영이 고개를 숙인 채 진희를 붙잡고 있었다.
이제 보니 사내가 바라보던 대상은 진희가 아닌 시영이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금강 기업 회장님의 첫 번째 아드님이신…….”
“이서한이다.”
박준의 말을 끊고 사내, 이서한이 말했다.
“한번 보고 싶었다. 내 소중한 동생을 지켜준, B급 헌터보다 강하다는 신입 헌터를 말이야.”
“…….”
진희는 말없이 서한이 아닌 박준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 시영은 진희를 향해 ‘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라고 말했었다. 그 이야기는 원래 이 자리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이 시영이 아니라 서한이었다는 이야기다.
박준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첫째 도련님께서 진희 씨를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보자고 했지. 어째서 내 매우 소중한 동생이 이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중한’ 그 수식어에 묘한 강약을 섞은 서한이 인사했다.
그제야 진희는 시영이 벽장 구석에서 튀어나왔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시영은 올 예정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진희에게 부탁하기 위해서 몰래 나왔을 뿐이었다.
“뭐, 괜찮겠지. 오래간만에 형제간에 식사도 하고. 식사는 준비됐겠지?”
“바로 부르겠습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진희와 서한이었다. 둘 모두가 자리에 앉기까지 식사를 내오지 말라고 했던 터라, 박준이 장지문을 열고 말하자 곧장 식탁에 음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코스 요리처럼 차근차근 반찬이 나오기 시작했다. 식욕을 자극하라고 나온 동치미 무를 호쾌하게 씹어 먹어버린 서한이 중얼거렸다.
“여기 음식은 다 좋은데 양이 적단 말이지.”
“……더 시킬까요?”
“됐어, 귀찮으니까.”
케네스를 닮은 얼굴이었지만, 서한의 성격은 사뭇 달랐다. 아니, 정반대라고 해도 좋았다.
절제된 말투와 근엄한 태도, 청렴한 인생을 살아가던 케네스와 달리 서한은 호쾌하고 무례했다. 그는 진희가 아직 숟가락을 들지 않은 것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안 먹나? 여긴 코스라서 한 명이라도 음식을 다 안 먹으면 다음 음식을 안 준다고.”
“…….”
나 오늘 손님 맞지? 밥 안 먹는다고 지적질을 당할 줄은 몰랐다. 진희가 작게 헛웃음을 짓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근데 들은 것과는 다르군. 박준의 말을 들었을 때는 좀 수다스럽거나, 자신만만한 여자인 줄 알았는데.”
“……저도 들었던 거랑은 다르네요. 금강 후계자는 신비주의적이고 위치에 맞는 진지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럼 서로 쌤쌤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