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7화
저쪽 세상에선 이렇게까지 하는 일이 없어 사용한 적이 별로 없었지만, 기사단장으로서 수습 기사들을 양성하는 건 당연한 의무이기에 방법을 숙지해 뒀었다.
“그런고로, 당장 오늘 오후에 게이트로 출발할 테니까 편한 복장으로 기다리고 있어.”
“지, 지금 당장이요?”
종혁이 불안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아무리 진희가 자신들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하더라도,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곳에 각오 없이 가기엔 두려움이 앞섰다.
“이 근처에 적당한 게이트가 있거든. 무리는 안 해도 돼. 너희도 다음에 갈래?”
“……갈 거예요.”
“갑니다.”
소라와 민혁은 고민 없이 승낙했다. 소라는 여전히 뭔가 불만인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헌터가 되고 싶단 마음에 거짓은 없는 듯했다. 종혁은 둘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럼 들어가서 쉬다가 부르면 나와.”
“네.”
“아, 청하도 갈 거야?”
“물론이죠!”
곁에서 듣고 있던 청하는 자기는 왜 빼놓느냔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청하의 나이는 고작 열한 살이었다. 굳이 이런 방식으로 훈련을 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 생각이 진희의 얼굴에 떠오른 것인지, 청하가 그녀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저도 잘할 수 있어요. 보셨잖아요.”
“음…….”
봤다니, 내가 본 건 조폭한테 얻어터져서 눈물 콧물 짜던 모습뿐인데.
그렇게 말하면 울 게 뻔하니 진희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청하의 각오는 나이치곤 대단하단 사실은 인정하고 있었다. B급 헌터한테 개기면서 욕을 내뱉는 초등학생이라니,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카온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데리고 가도 좋을 듯합니다.”
“왜?”
“안 가면 어떻게든 쫓아올 겁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마치 청하를 잘 안다는 듯 말하는 카온에게 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감옥에서 탈출했을 때, 이 아이는 어떻게든 마스터를 찾으러 가야 한다며 나가려 했습니다.”
“진짜?”
“예, 그것도 혼자서요. 물론 제가 붕대로 묶어 막아놨습니다만. 안 데려가면 또다시 그런 짓을 할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진희가 새삼스럽단 눈으로 청하를 바라봤다. 청하는 이제야 자신의 각오를 알아봐 주냐며 어깨를 당당히 펴고 에헴, 헛기침을 했다.
“그래 뭐, 병아리 손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병아리 아닌데요.”
농담이야, 진희가 피식 웃으며 청하의 머리를 두드렸다. 청하는 불만인 듯 입술을 쭉 내밀었지만, 그 손을 치우진 않았다.
이윽고 청하까지 방으로 돌려보내고 진희는 카온과 마주했다.
“그런데 이제 말 좀 해봐.”
“어떤 것을……?”
“네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유.”
카온의 눈이 가만히 진희를 향했다.
진희는 강당 구석의 허름한 의자에 앉은 채였고, 카온은 진희의 앞에 기립한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진희가 고개를 올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모릅니다.”
“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지금 얘가 뭐라고 하는 거야? 진희가 고개를 갸웃했고, 카온은 표정의 변화 없이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진심인가? 용인은 상급자에게 거짓말하지 않는다. 강박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규칙과 규율을 신봉하는 그들에게 거짓말이란 단어는 곧 죄악이었다.
하지만 진희는 카온의 말이 진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왜 기억을 잃었는데?”
“모르겠습니다.”
말의 앞뒤가 없었다.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왜 기억을 잃었는지, 카온은 그 어떤 말도 붙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진희의 나른했던 눈매에 짧게 경련이 일었다. 메마른 두 눈동자엔 약간의 노기와 호기심이 동했다.
“흐응, 그래.”
“…….”
카온은 여전히 말을 잇지 않았다.
진희는 의자에서 일어나 카온에게 다가갔다. 키가 165㎝ 남짓한 그녀와는 머리 하나쯤 더 차이 나는 거구의 카온이었지만, 진희의 기세에 압도되어 마치 자신이 더 작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또각또각 걸어온 그녀가 카온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
카온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 또한 이 행위가 얼마나 불충(不忠)한지 알고 있었다.
진희와는 만난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녀의 성격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람을 챙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어떤 손해를 보든, 귀찮음을 감수하고도 모르는 척 나서준다. 자신의 재화를 보육원에 나눠주고, 굳이 후원자를 자청했던 것처럼.
반대로 자신의 사람이 아님을 안다면, 거리낌 없이 검을 들 것이다. 진희의 검의 편린(片鱗)을 본 카온은 그녀가 그 지하 감옥에서 덤벼드는 모든 적을 죽였으리란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무자비한 검을 쓰는 사람은 곧 적에게 어떤 기회도 베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진희의 성격을 알면서도 카온은 굳이 거짓말을 하였다. 이것이 불충임을 알면서도, 그녀를 위하여 거짓말을 택했다. 자신이 어떤 벌을 받게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듯.
“……뭘 그렇게 긴장해?”
푸하, 하고 웃은 진희가 카온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렸다.
카온이 눈을 뜨자, 유쾌하게 웃고 있는 진희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드물게 눈꼬리를 크게 휘며 웃고 있었다.
“걱정 마, 고작 거짓말 같은 걸로 검이라도 들겠어?”
“…….”
“네가 날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게. 굳이 캐묻고 싶진 않으니까.”
진희의 손이 가슴팍을 넘어, 카온의 어깨로 올라갔다. 널찍한 어깨를 뱀처럼 기어오른 그녀의 하얀 손길이 카온의 목에 닿았다. 목의 경동맥에서 세차게 박동이 뛰고 있음이 느껴졌다.
“믿어볼게. 이번엔.”
“……감사합니다.”
고작 이 정도로 감사까지야.
진희가 작게 웃으며 카온을 지나쳐갔다.
“너도 나갈 준비 해. 수술한 후유증이 남아 있으면 말하고.”
“……예.”
가벼운 발걸음으로 강당을 나선 진희의 뒷모습을 보며 카온이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심장 박동은 빠르게 뛰고 있었으나, 그녀의 손이 닿았던 부분은 얼음처럼 차가운 감촉만이 남아 있었다.
* * *
“어쩔 셈이야?”
“뭐가?”
방으로 가던 길.
민혁은 소라를 불러 세웠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습관처럼 쓸어 넘기던 소라가 돌아섰다. 민혁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소라에게 말했다.
“너, 헌터가 돼서 뭐 하려고?”
“……네가 알 바야?”
“복수하려고 하는 거지?”
“…….”
복수란 말에 소라의 눈이 순간 스산하게 빛났다. 민혁과 소라 사이에 그 단어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그 형을 찾아가려고 하는 거잖아. 까마귀들한테 우리 정보를 판…….”
“그딴 인간을 형이라고도 부르지 마.”
“…….”
소라의 단호한 말에 민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라를 앞질러 걸어갔다.
“그러지 마. 결국엔 끝난 일이고, 복수해 봤자 너만 상처 입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딴…….”
“알아, 아니까 하는 말이야. 괜히 죄책감에 나쁜 짓 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우리 중 아무도 널 원망 안 해.”
“…….”
쓸데없는 참견이야, 발끈한 소라가 외치려 했지만 이미 민혁은 복도 갈림길로 사라진 뒤였다.
소라는 이를 악물고 욕을 참아냈다. 민혁이 말한 탓에 그 남자의 기억이 또다시 떠오르고 말았다. 그 사람.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우리들의 비밀을 까마귀파에 팔았던 남자.
착한 인상과 유려한 말솜씨에 순식간에 모두와 친구가 되었던 그 사람은, 헌터로서의 재능을 발견했단 말을 남기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우리를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엉망이 된 얼굴로 까마귀들에게 이곳이 바로 그 보육원이라고 소리쳤던 남자의 기억을 당장에라도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남자에게 보육원의 비밀을 알린 건, 다름 아닌 소라였다.
“……용서 못 해.”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소라는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소라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복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게 설령 목숨을 위협받는 게이트의 탐험이라고 해도, 믿지 못할 생판 남의 훈련이라고 해도 버틸 수 있었다. 그녀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건 가족이었고, 누구보다 용서 못 할 사람은 그 가족들을 위험에 빠지게 한 자신이었다.
속죄해야 했다.
내 손으로.
소라는 짜증 어린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그녀의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마법사에게 마법진, 술식이 있다면, 기사에겐 ‘영역’이 있다. 영역은 자신의 무기가 닿는 범위를 뜻하기도 하지만, 마력을 이용하여 얼마나 손을 길게 뻗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다.
현재 진희의 영역은 사방 5m 정도, 한 방향으로 특정한다면 15m까지 늘어난다. 이 정도의 거리에선 집중만 한다면 마력을 느끼고, 그 밀도를 조절하는 것도 가능하다. 구현화 같은 세세한 작업은 무리지만, 자연계 마나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작업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카온 넌 어느 정도 가능해?”
“……세 걸음 정도입니다.”
“방향을 한쪽으로 한정하면?”
“다섯 걸음입니다.”
카온에게 다섯 걸음이라면 대충 6~7m 정도 가능하단 이야기였다. 역시 태어날 때부터 거대한 마나홀을 가진 종족이어서 그런지, 요령을 알려주자 순식간에 활용 방식을 깨달았다.
“내가 앞에서 영역을 펼치면, 카온 넌 아이들의 바로 뒤에서 똑같이 영역을 펼쳐. 나와 너의 영역이 교집합이 되도록 만드는 거야. 내가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서 비워주면, 넌 안쪽에서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나의 수준을 결정해서 마나를 불어넣거나, 빼.”
진희가 수도를 연결해주는 메인 파이프라고 한다면, 카온은 그 파이프에서 필요량만큼의 물을 빼는 수도꼭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설명을 들은 카온은 새삼 대단하단 얼굴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좋은 훈련 방식입니다. 부작용 없이 마나를 느낄 수 있도록 인공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군요.”
“맞아. 너희 같은 용인들은 이럴 필요가 없지만, 인간 중엔 마나 감응을 하지 못해서 수련해야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거든.”
간혹 존재하는, 정말로 재능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방법이었다. 대개는 명상이나 스승의 지도를 통해 마나를 느끼지만, 지구의 인간들처럼 마나에 내성이 아예 없는 경우엔 이처럼 세세하게 가꿔진 환경에서 수련을 진행해야 했다.
현대에 이 방법이 알려지지 않은 건 사실 당연했다. 이것은 영역을 다루는 방법이 가능할 정도로 숙련된 헌터와, 마나 포화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피실험자가 있어야만 연습이 가능한 방법이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화약 창고에서 등유가 발라진 촛불을 들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