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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5화 (15/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5화

원장은 이미 작년에 별세했다고 한다. 은정은 서글픈 얼굴로 덧붙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은정에게 가람 보육원을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지병을 앓다 돌아가셨다. 그 때문에라도 은정은 여태껏 봉급조차 주지 않는 이 보육원에서 버티고 있었다.

“다시금, 정말 고마워요……. 아마 민하와 청하마저 사라졌다면, 전 정말 버틸 수 없었을 거예요.”

“…….”

이 감사 인사마저도 거절할 순 없었다. 진희가 거친 손으로 연신 악수를 하는 은정의 등을 토닥였다. 은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녀로선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은정이 진정되고 난 후, 진희는 까마귀파의 두목과 간부는 모두 죽었으며, 그들이 이곳을 노리진 않을 것이라 말했다. 덧붙여 서류 가방에 들어 있던 재화의 반을 은정에게 건넸다. 가방에 있던 현금 전체와 현물화하기 쉬운 소재를 건네주자, 은정이 한사코 거부하려고 했다.

“받아 두세요. 봉급이라 생각하시고.”

“보, 봉급이라뇨…….”

“애들 후원금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그렇게까지 말하자 은정은 거절하지 못했다. 그렁그렁한 눈망울은 지금 당장 절이라도 할 기세였지만, 진희가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마침 먹을 걸 산더미처럼 사 온 카온과 청하가 들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그건…….”

진희의 말에 은정이 입을 다물었다.

겉으로나마 후원하던 까마귀파는 사라졌고, 이젠 선생님 하나 있는 폐허와 같은 보육원이 남아 있었다. 이제 정말로 보육원을 해체하고 아이들을 다른 보육원으로 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은정은 생각했다.

진희는 가만히 창문 바깥을 지켜보았다. 보육원에서 나간 아이들이 달려나가 청하에게 매달리는 것이 보였다. 겁도 없는지, 몇 아이들은 카온에게 매달려 봉투 안에 있던 과자들을 빼가고 있다. 카온은 얼굴엔 티가 안 났지만, 아이들을 떼어놓으려는 시도를 하다 포기했다.

노을은 거의 끝물이고, 서서히 밤의 어둠이 보육원을 침범하고 있었다.

“……기사단 하나 있음 편하겠지.”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진희가 중얼거렸다.

지금도 과거 생각이 드문드문 났다. 진희는 느긋한 여가 생활을 즐겼지만, 그렇다고 단체 생활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사건이 많던 인생에서, 기사단에 있던 시간만큼은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단체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났다. 손이 많다는 이야기는 우두머리가 편하게 살 수 있단 이야기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 대상이 어린아이라 키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은 있겠지만.

그들 모두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미래를 생각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또한 그녀도 활동 하기 위한 거점이 필요하기도 했다.

“잠시만요.”

“네?”

“어쩌면 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진희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했다. 잠시 통화음이 울리더니, 너머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박준 씨. 부탁할 게 있는데요.”

-예?

이럴 때 대기업의 힘을 빌리는 거지. 설마 목숨을 구해줬는데 이런 일도 해결 못 해주겠어. 진희가 태연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가람 보육원이란 곳에 후원 법인이 필요하시단 이야기죠?

“네.”

-진희 씨가 후원자가 될 예정이고요?

“맞아요.”

-…….

박준은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일단 가능하단 대답을 해주었다.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금강 기업에서 보육원 하나 후원하고 법인 좀 내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박준은 그 금강에서도 나름 높은 위치의 헌터였다. 조폭 간부가 B급이라 진희의 마음속엔 별것 아닌 등급으로 생각되었지만, 사실 B급은 수십억대의 연봉을 보장받는 직종이었다.

게다가 보육원을 후원한다는 건 헌터들에게 종종 있는 일이었다. 헌터 중 자신의 이름이나 단체를 딴 보육원, 요양원 등을 후원하는 이는 제법 많았다. 기업이 이미지 쇄신을 위해 노력하듯, 기득권층인 헌터들 나름의 사회봉사였다. 다시 말해, 명분은 충분했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아마 진희 씨에게 갈 보상금은 이보다 더 금액이 클 텐데요.

진희는 자신에게 보상금을 주지 않고, 보육원에 후원해 달라는 요구를 전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전 위치도 신입이고 하니 일 벌이기가 귀찮아서.”

아무래도 진희에게 갈 금액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던 것 같다. 순간 그냥 직접 돈 받아서 일을 처리하는 게 나았을까 싶었지만, 이내 귀찮은 일이 많을 거란 생각에 후회를 접어두기로 했다.

이후 진희는 몇 마디 하다가, 전화를 은정에게 넘겨주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은 은정은 점점 경악하는 얼굴로 바뀌고, 수십 분 후에야 전화를 끊었다. 박준이 간략한 절차를 안내해 준 것 같았다.

“그, 금강 기업 헌터셨어요?”

“그건 아니에요. 그냥 일면식 좀 있어서요.”

금강이 어디란 말인가. TV 광고에선 하염없이 나오는 대기업이자, 국내 최고의 헌터들 중 1/3이 속한 곳이 금강이었다. 금강의 헌터란 헌터들의 등용문과 같은 이름이라,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진희는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 단호하게 말하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

“직원도 더 구하고 그래야겠네요. 음, 후원이 들어오긴 할 텐데 부족하면 말해줘요.”

후원이라 한들 A급 헌터마저도 무리 없이 상대한 진희에겐 부담하기 어려운 금액도 아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가요?”

은정이 나가려던 진희를 붙잡고 물었다. 진희는 마스크 때문에 건조해진 볼을 긁적거렸다.

“그냥요.”

괜히 이유 하나하나 설명하긴 귀찮았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유였기도 하고.

* * *

“너 치료부터 좀 하자.”

저녁은 은정과 원생들이 만들어주었다. 간단한 찌개와 밥을 말아서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진희가 카온을 불렀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용인족은 그저 신체 능력만 강한 인간일 뿐이었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초인과 다름없었지만, 아무래도 진희와 같이 사냥을 다니기엔 손색이 많았다.

“음, 근데 신분증도 없단 말이야.”

헌터 병원엔 마력 회로가 끊긴 헌터들의 수술이 빈번하게 이뤄진다. 하지만 문제는 수술할 때 당연히 필요한 헌터 면허가 카온에게는 없단 사실이었다.

아무리 숱한 전쟁을 겪어온 진희라지만, 그녀도 마력 신경이 자연 치유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 그럼 의사한테 가 볼까요?”

그때, 밥을 다 먹고 진희를 찾아온 청하가 마침 생각났다며 말을 꺼냈다.

“의사? 카온은 신분증 없다니까?”

“아뇨, 신림 쪽엔 야매도 많아요.”

야매란 무자격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야매 의사라, 하긴 신림 같은 곳이라면 몇 명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서라도 청하와 함께 카온을 치료하기 위해 가보자 말하고, 진희는 폰을 꺼내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디에 전화 거세요?”

“아빠.”

“……아빠요?”

“응. 한동안 외박할 거 같다고 말해줘야 하거든.”

“…….”

청하가 잠시 할 말을 잃고 진희를 올려다보았다. 왜? 진희가 입 모양으로 되묻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청하가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마치 ‘괴물도 부모님은 있구나’ 하는 충격 어린 모습이었다.

“응, 아빠. 나 바깥이야. 아마 한동안 안 들어갈 거야. 걱정 마. 어, 필요 없어. 응 필요 없어. 아무 데도 필요 없어. 응, 안 먹어.”

뚜-뚜-

전화를 끊은 진희를 보며 청하가 물었다.

“무슨 통화하신 거예요? 말이 뭔가…… 좀 이상하던데.”

“기사회생할 찬스를 달라잖아. 그래서 안 된다고 했지.”

“기사회생이요?”

“이번에야말로 보양식을 맛있게 했대. 오리 백숙에 삼겹살이랑 고사리를 넣고 굴 소스와 두반장으로 맛 낸 저녁을 해놨는데 왜 안 오냐고 하더라고.”

“…….”

“오늘 아빠가 저녁 당번이었거든.”

……강해지려면 저런 음식을 먹고 커야 하는 걸까? 태연스럽게 ‘안 먹어서 다행이네’ 하고 중얼거리는 진희를 보며 청하가 복잡한 얼굴로 고민했다.

‘그놈의 삼겹살과 고사리에선 언제 벗어나려나.’

한동안 집에선 배달음식을 시켜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진희는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 * *

다음 날, 야매 의사는 카온의 상태를 보고 바로 수술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건강 검진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호쾌한 수술 방식이었다. 태양 빛을 받은 카온의 몸은 거의 치유가 되어 있던 상황이었고, 근육에도 손상이 크게 없어 수술을 즉시 진행해도 별문제가 없다고 했다.

대신 마취제를 놓고 잠이 들어야 한단 말에 카온이 눈을 부릅뜨며 전사는 칼(메스) 앞에서 잠들지 않는다는 헛소리를 했다가, 진희의 주먹에 넉아웃 되어 수술을 진행했다는 작은 트러블은 있었다.

마취에서 깬 카온은 의사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진희가 ‘내가 했다 꼽냐?’는 말에 고개를 숙였다.

“우선 애들을 좀 모아볼래?”

“원생 전부요?”

“응.”

마침 날짜는 주말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원내에 있는 강당에 모두를 집합시켰다.

학생 수는 총 20명이었다. 고등학생이 셋, 중학생이 다섯, 초등학생이 열이고, 두 명의 유치원생이 모였다.

의외로 연령이 가지각색이라 마치 대가족들을 나이 순서대로 정렬시킨 것처럼 보였다.

“안녕, 얘들아.”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일단 할 말이 있어서 모아놨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야겠는데, 저 경계 어린 표정을 풀 만한 위트 있는 말을 꾸며내긴 진희의 능력이 모자랐다.

그래서 들이박았다.

“너희 목숨을 구해준 은인 서진희라고 해.”

“…….”

“…….”

“아차, 순간 본심이.”

강당은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초등학교 쪽 줄에 서 있던 청하는 풉,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서둘러 틀어막았다.

“너희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건 들었어.”

강당 입구 쪽에 서 있던 카온이 노려보는 걸 눈치챈 청하가 가까스로 웃음을 멈췄고, 그에 맞춰 진희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 보육원을 도와주는 건 바로 너희의 능력을 보고 싶기 때문이야.”

“……저희한테 일을 시키려는 건가요?”

고등학생 줄 쪽에 있던 한 여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진희는 고개를 저었다.

“보육원에서 지냈다고 일로 갚으란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야. 그저 선택지를 하나 더 줄 뿐이지.”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정은 가만히 진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헌터가 될 기회를 말이지.”

“……!”

듣고 있던 아이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헌터란 영웅과도 같은 존재였다. TV에서 방영되는 헌터들의 영웅적 면모와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하지만 헌터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마나 감응력이 없는 사람들은 헌터는커녕 게이트 주변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이 보육원엔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모두 여덟 명 있었지만, 개중에 헌터로 각성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난 일반인도 헌터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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