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13화 (13/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3화

“…….”

“여기 사람이면 조금 늦긴 했네. 왜, 싸울 생각이야?”

“……굉장해.”

“……?”

사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낮지만 또박또박 들리는 말소리.

“검사인가. 이만큼 마력을 측정할 수 없는 헌터는 오랜만이야.”

“……당신은 누군데?”

“이름은 없어.”

“뭐?”

사내는 흠, 하고 턱을 괴더니 작게 말했다.

“하지만 마스크가 아쉽네. 그림은 좋은데, 그 외모를 가리다니.”

“…….”

얜 또 무슨 미친놈이지? 진희가 어처구니가 없어 다시 계단을 오르려 하자, 사내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다음에 보자. 또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너 정도의 사람이라면.”

“야, 너 잠깐만 기다려 봐.”

이렇게 일방적인 이야기는 달갑지 않다. 진희가 일단 한 대 쥐어박고 생각하자 싶어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그럼 안녕.”

그러나 그와 동시에 사내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마치 그 자리에 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의 형체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고, 주변에서 인기척 또한 발견할 수 없었다.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보겠네.”

진희가 허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까마귀파와의 전투보다도 더 인상적인 일이었다.

* * *

가람 보육원은 신림역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었다. 버스 타기도 귀찮아 몰래 인적 없는 거리를 달려서 도착하자, 작은 놀이터가 앞마당에 있는 보육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 폐허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전등이 켜져 있는 곳이었다.

3층 정도의 작은 두 건물이 붙어 있는 형태의 건물 입구엔, 아까 보았던 용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옷을 챙겨 입었는지 청바지와 하얀색 면 티를 입고 있다. 깔끔하게 씻은 그는, 생각 이상으로 미남이었다.

그녀가 알던 용인은 우락부락한 인상이었는데, 그는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져 용인이 아닌 한 명의 인간을 보는 듯했다.

그녀가 보육원에 다가서자 용인이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석양이 놀이터를 비췄고, 그의 갈색 피부가 더욱 붉게 보였다. 그는 다시금 진희의 앞에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럴 줄 알았어.’

그녀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일어나란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용인이랑 친해지면 귀찮은데.’

용인족은 진지하다. 그들에게 농담이란 전해져 내려오는 속담을 이용한 말장난 정도고, 예의를 어지간히 중요시하는 일족이다 보니 함부로 대화를 나누기도 힘들다. 우스갯소리로 용인이 모시는 주인이나 친한 친구를 모욕하는 날엔 누구 한 명이 피를 볼 때까지 결투를 해야 했다.

게다가 선천적인 신체 능력이 어찌나 좋은지, 기사 아카데미 원생이나 스콰이어(수습 기사) 중에서는 군기반장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든 규칙을 어기면 가감 없는 처벌을 내리는 종족이었으니까. 그런 용인들에게 덴 적이 있던 진희는 용인과 어울리는 걸 기피했다.

싫어하진 않지만 굳이 친해질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 안 하면 안 일어나겠지.’

그녀가 흘끔 용인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붉은색 머리카락은 씻은 덕에 때가 빠져, 제법 멋지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아무런 말 없이 이곳을 지나쳐간다고 해도 그는 하루 꼬박 이곳에서 대기할 것이다. 용인은 그런 종족이었다.

“일어나.”

“예.”

결국 백기를 든 건 진희였다. 그녀의 명령에 따른다는 이야기는, 이 용인이 ‘목숨을 구한 은인’으로 진희를 택했다는 말과 동일했다.

“저기, 난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별로 구하려고 거기에 간 것도 아니야. 이렇게까지 안 해도…….”

“귀인은 제국 출신이시지 않습니까?”

“…….”

“드라고소드를 사용하는 ‘인간’은, 제가 알기론 제국의 그 가문 말곤 없습니다.”

“……홧김에 쓴 게 잘못이네.”

그냥 쓰지 말걸. 용인이 고문당하고 있고, 요정까지 붙잡혀 있단 사실에 순간 화가 치솟아 그가 알아볼 만한 검술을 쓴 게 잘못이었다.

드라고소드(Dragosword)는 용인이 충성을 다하는 이들, 바제트의 가문이 사용하는 용인식 검술이었다. 용인의 체술을 따라 만든 그 검술은 가문의 비전 검술이었다. 검술의 원조 격인 용인이라면 알아보는 게 당연하겠지.

“맞아, 하지만 진짜는 아니야.”

“……가문 출신이 아니시란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게…….”

음……. 하고 말을 고르던 진희가 이내 설명하길 포기했다.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귀찮았고, (용인은 분명 믿을 테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사정이 있다고 생각해.”

“예, 알겠습니다.”

“……아으, 정말.”

그녀는 예전부터 깍듯한 사람들에게 약했다. 그녀가 대답해주지 않으려 하자 용인은 그럼 안 들은 걸로 하겠다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당신의 주인이 될 생각 없어.”

“하인이라도 좋습니다.”

“마찬가지야. 당신을 구한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니까.”

“우연이라도, 제겐 운명이었습니다.”

……아니 이 도마뱀 인간이 지금 무슨 오그라드는 대사를 하는 거야? 진희가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지만, 이내 ‘그래, 얘들은 원래 이런 종족이었어’ 하고 생각하며 팔을 긁었다.

지금은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대사였지만, 용인들은 그런 정형화된 말을 숨 쉬듯 내뱉는 종족이었다.

“당신이 가문 출신이 아니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드라고소드를 쓰는 분이시며, 곧 저를 구해주신 은인이십니다. 제 목숨을 이 자리에서 끊으시든, 혹은 일개 병사로 쓰시든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는 당신의 발톱이 되겠습니다.”

“……아휴, 무거워라.”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포기하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다. 현대에서 만난 용인이라도 그 특성만은 변한 게 없었다.

용인은 이런 특성 때문에 노예가 되지 않는 유일한 이종족이기도 했다. 노예가 되는 순간 어떻게든 자결하거나 복수를 다짐했고, 모진 고문에도 주인을 배신하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한번 은인, 주인을 섬기면 하늘이 무너져도 배신하지 않았다. 그런 극단적인 성격 탓에,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종족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새삼 진희는 용인을 훑어보았다. 키는 190㎝는 될까, 용인치곤 조금 작은 키지만 현대인치곤 매우 큰 키다. 떡 벌어진 어깨나, 상의 안에 보이는 근육은 쇠약해졌다 해도 그가 전사였단 것을 암시할 정도로 균일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용인의 양 팔꿈치 부분을 매만졌다.

“……?”

용인은 순간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띄웠지만, 이내 순순히 팔을 내줬다.

왼팔과 오른팔의 근육이 생김새가 다르다. 특정 부위에 근육이 몰려 있는 왼팔과 고른 근육을 가진 오른팔로 보아서, 그는 검과 방패를 주로 쓴 전사였던 듯싶다.

하긴, 이제 던전 드나들 때 짐꾼도 필요하겠지. 당장 지금만 봐도 서류 가방 두 개를 직접 들고 다니느라 귀찮지 않은가.

‘그리고…….’

그녀는 팔에서 손을 떼고 용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갈색 피부에 조금 어두운 적발을 가진 미남이 보였다. 짐승처럼 동공이 작았지만 굵은 눈썹과 잘 어울려 굳건한 인상을 주었고, 곧은 코와 묵묵한 입술, 날카로운 턱은 꼭 영화에서 나오는 배우처럼 느껴졌다.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진희는 제법 얼빠였다.

“……이거 받아.”

“예.”

진희는 들고 있던 짐을 모두 용인에게 맡겼다.

“이름은?”

“카오톨로메오입니다.”

“카온이라고 부를게.”

“알겠습니다.”

용인, 카온은 정중하게 짐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감사 인사를 하려는 그를 손으로 막아서고, 진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잘 따라와. 난 불평하거나 뒤떨어지는 애들은 내 사람으로 안 두니까.”

“명심하겠습니다.”

“…….”

너를 받아주겠다는 일종의 허락이었다. 진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지나간 광경이지만, 무뚝뚝한 카온의 입매가 살짝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누구도 정하지 않았고,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카오톨로메오. 카온. 불과 용암의 용인은 그렇게 처음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3. 병아리 기사단

청하가 밖으로 나간 후 보육원은 비상사태였다.

민하가 까마귀파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육원은 한참을 고민했다. 민하를 구해야 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까마귀파의 본거지를 알고 있는 건 오로지 청하뿐이었다. 그렇기에 보육원의 원생들은 청하를 독촉했지만, 청하는 끝끝내 까마귀파의 본거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원생들이 아무리 달려들어 봤자 까마귀파의 간부 한 명도 이길 수 없단 사실을, 까마귀파에서 일했던 청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청하는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혼자 움직이기로 다짐했다.

청하가 알고 있는 비밀통로는 인원이 많을수록 들킬 가능성이 높은 데다가, 어떻게 궁리해도 본거지에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갈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체를 들킨다면 과거 까마귀파에서 일한 경력이 있던 청하야 두들겨 맞고 내쫓길 뿐이지만, 일면식이 없던 다른 원생들은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청하가 보육원에서 나가 민하를 찾으러 갔단 사실이 알려졌을 때, 보육원의 모두가 청하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나서려고 했다.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온다거나, 빗자루를 들고 능력을 발휘할 기회라고 떠드는 녀석도 있었다.

유일하게 보육원에 남아 있는 지도원 선생, ‘지은정’은 학생들을 막으려 했다. 은정은 청하의 결심을 알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학생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정과 학생들의 실랑이가 일던 중.

청하가 돌아왔다. 그것도 민하를 끼고서. 심지어 거구의 사내까지 데리고.

“……정말, 정말 고마워요.”

“괜찮아요.”

보육원의 작은 사무실, 먼지가 쌓인 서류들 사이에서 은정과 진희는 대면했다. 은정은 청하의 말을 듣고 진희가 자신들의 은인임을 알게 되었다.

은정의 곁에선 청하 또한 같이 앉아 있었다. 이젠 붓기가 제법 가라앉은 얼굴엔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활기찼다.

“아니에요. 정말…… 민하뿐 아니라, 청하가 어떻게 되었다면…….”

은정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나이 마흔이 넘은 사회복지사로서, 지금껏 가람 보육원에서 나간 적이 없던 유일한 선생님이었다.

다른 동료들이 까마귀파의 등쌀에 밀려 나갈 때, 그녀는 모진 핍박에도 기어코 보육원에 남았다. 보육원이라고 하기 어려운, 구청에서조차 외면한 이 기관에 남아 있는 마지막 기둥이었다.

“……음. 다른 것보다, 사정을 좀 듣고 싶은데요.”

“어, 어떤 사정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사무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유리문 바깥엔 어린아이들이 이쪽을 빼꼼 지켜보고 있었다.

“근데 쟤들 밥은 먹었나요?”

“아, 아뇨. 아직…….”

“그럼 카온.”

“예.”

그녀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카드가 통하지 않는 신림에서 사냥할 걸 생각해 많이 뽑아놓은 현금이 있었다. 대충 오만 원권을 몇 장 골라 곁에서 열중쉬어 자세로 기립하고 있던 카온에게 건넸다.

“이걸로 편의점이나 슈퍼에서 먹을 것 좀. 없으면 빵이나 음료수라도. 팔다리 마력 신경은 없어도 체력 회복은 나름 했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