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1화
갈색 피부와 붉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흥분에 차 금색이 달아오른 눈동자. 그녀보다 훨씬 커다란 거구의 사내는 무릎을 꿇은 채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 인사를 했다. 진희는 일부러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지만, 용인은 끝까지 기다렸다.
한숨을 내쉰 진희가 용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용인은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아, 손목부터 손끝까지 총 네 번의 키스를 했다. 용의 발톱과, 용의 네 가지 마나 홀을 의미하는 네 번의 키스.
“목숨을 보전받은 은혜를 갚겠습니다. 귀인이시여.”
“됐어.”
“…….”
그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벅지엔 까마귀의 부리 흔적이 역력하고, 양팔과 다리는 마나 회로가 찢어져 힘을 주는 것마저 고통일 텐데 그는 의연하게 허리를 폈다.
“가자, 인간의 아이, 그리고 요정아.”
“네, 네?”
“……아저씨는 괜찮아요?”
“괜찮다, 요정아.”
민하는 철구를 바닥에 두고 창살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아직 불안감이 남아 있는 듯 제 오빠의 손을 꽉 붙잡았다.
용인은 진희를 흘끔 바라보더니, 청하와 민하를 각각 양어깨에 올렸다.
“저, 저 달릴 수 있어요!”
“저분에게 방해다.”
청하가 내려달라 했지만 용인은 단호했다. 얼른 나가보라는 진희의 손짓에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용인은, 이내 바깥을 향해 걸어 나갔다. 발버둥 치던 청하는 이내 한숨을 내쉬곤, 자신이 찾은 탈출구를 향해 그를 안내했다.
일회용이지만 감옥의 방 중 하나에 1층 입구 바로 앞 하수구로 통하는 굴이 존재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귀인이시여.”
“…….”
그녀가 얼른 나가라고 휘휘 손짓했다.
“누, 누나 힘내요! 아니, 꼭 탈출해서 봐요!”
“언니!”
“시끄럽다니까! 얼른 가!”
진희가 피식 웃으며 셋을 보냈다. 그들이 하수구로 향하는 굴로 나가려는 순간.
“……오네.”
애애애애앵-!
감옥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아마 문이 잘리고 나서 지하층 전체에 비상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 듯하다.
그녀는 느긋한 걸음으로 감옥 바깥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 걸음걸이와 달리 두 눈동자는 차분했고, 또 스산했다.
“침입자가 있……!”
“자, 두목한테 안내해 줄래?”
일검(一劍)에 일살(一殺). 수많은 까마귀파 조직원 앞에서 진희가 여느 때처럼 검을 휘둘렀다.
한순간이었다. 진희가 수많은 까마귀파의 전투원들을 물리치고, 그 중심으로 나아간 건 단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좁은 골목의 특성만 아니었다면 더 짧은 시간 내로 싸움을 끝냈을 것이다.
“이 XX가……!”
“다물어.”
간부도 나타났다. 어디서 자고 있었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난 간부는 거대한 태도를 휘두르며 달려왔지만.
“허억!”
단 한 칼에 썰렸다. 진희의 검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태도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마력의 칼날이 단숨에 간부의 목을 잘라냈다.
그 말도 안 되는 무용에 까마귀파 조직원들이 뒷걸음질 쳤다. 보기만 해도 자신들과는 상대가 안 될 수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내빼는 건 빠르네.”
그녀는 도망가려던 까마귀파의 조직원 한 명을 사로잡았다. 목에 검을 들이대자 그는 무슨 말이라도 하겠단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너희 두목 어디서 사니?”
“아, 안쪽에요!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시면 끝에……!”
“그래, 알았어.”
고맙단 말을 하고 놓아주자, 그는 냅다 달려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진희는 안내한 곳으로 걸어 나갔다. 이만큼 난동을 피웠으니 민하와 청하는 잘 도망갔겠지.
‘……근데 걔들 보육원이 어디지?’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듣지 못했는데. 그녀가 문득 든 생각에 아차 싶었다. 요정과 용인의 출현으로 잠깐 당황해서 당연한 걸 까먹고 있었다.
“지금!”
“죽어라!”
그녀가 턱을 괴며 이걸 어쩌나 하고 생각하던 도중, 복도의 갈림길에서 두 사내가 동시에 나타나 달려들었다.
뻔한 기습. 둘 다 B급 수준의 헌터로 보이니, 아무래도 까마귀파의 간부겠지. 전투에 들어서자마자 마력으로 주변을 살피던 진희였기에 그들의 등장은 예상된 바였다.
청하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간부가 이들 중 최약체라는 게 거짓말이 아닌 듯, 이들의 몸놀림은 제법 재빨랐다.
그녀의 목과 가슴을 정확하게 노리는 두 개의 검. 좁은 골목에선 피하기가 힘들 양 점 돌파였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의 공격에 당황하진 않는다.
“왜 기습을 하면서 기합을 내는 거야?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어차피 공격은 찌르기다. 한쪽 주먹을 이용해 목을 찌르는 검의 면을 후려쳐 올리고, 가슴팍을 노리는 검은 자신의 검을 이용해 검로를 바꿔서 비껴 쳤다.
빠른 반격(Parrying)에 순간 두 사내가 경직했다. 피하는 것도 아니고 반격을 한 탓에 그들의 긴장되었던 자세가 풀렸고 진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단숨에 파고든다. 그들과의 거리는 두 걸음, 하지만 한 걸음만으로도 진희의 검이 닿는 영역에 이른다.
“……!”
받은 공격은 두 번이었으나, 받아치는 반격은 한 번으로 족했다. 검을 가로로 베자, 두 사내의 목에 동시에 깊은 검상이 생겼다.
“커헉!”
“확실히 B급은 다르네.”
속절없이 무너지는 두 사내의 사체를 뒤로 두고 진희가 중얼거렸다.
까마귀파의 간부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진희는 방금 기습에 대해 혹평했지만, 속도와 그 날카로움만큼은 수준급이었다. 검술을 차치하고 힘만 따지자면 어지간한 기사와도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두목은 얼마나 강하려나. 복도를 나아가며 진희가 기감을 넓게 펼쳤다.
“응?”
이윽고 그녀의 감지 범위에 커다란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장소는 복도의 끝. 그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방의 문을 열었다.
그곳은 거대한 집무실이었다. 동굴인 주제에 사방을 나무 벽으로 마감하고, 고급스러운 그림들이 장식되어 있다. 앤티크한 테이블 앞에는 한 남자가 중역 의자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오게, 좀 앉지.”
“…….”
중년으로 보이는 사내는 멋스러운 수염과 회색빛 정장을 입고 신사처럼 웃었다.
“당신이 까마귀파 두목?”
“두목이란 말은 난폭하지. 사장이라고 불러주게.”
“조폭이 웃기지도 않는 소릴 하네.”
“……입이 걸걸하군.”
마찬가지로 조폭에게 듣고 싶은 소린 아니다. 진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숨어 있는 사람이나 마법적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두목과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어디 무슨 소릴 하려고 저러는지 볼까. 진희는 바닥에 검을 꽂고, 두목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놀랍군. 지금껏 침입자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호쾌한 침입자는 처음 보았어.”
그는 다리를 꼬며 무릎 위에 깍지를 꼈다. 그 느긋하고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진희는 코웃음이 나오려던 걸 꾹 참았다.
귀족이 된 기분을 누리고 있는 듯했다.
귀족은 난데 말이지.
“그건 그렇고, 자네는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되겠나?”
“됐어. 여기 공기가 더러워서 싫어.”
“흐음, 그렇군. 뭐 정체를 숨기고 싶은 것도 이해는 가.”
그는 뭔가를 오해한 듯 그녀의 말을 곡해해서 들었다.
“난 굳이 자네가 속한 단체를 캐내려고 한 건 아니야. 어차피 우리 조직의 사업을 알고 있는 자들이야, 거기서 거기지. 역전 조직인가? 아니면 ‘바깥’일 수도 있겠군. 요샌 금강과 브리온이 이쪽 산업에 눈독 들이고 있다던가?”
“……글쎄, 마음대로 생각해.”
날 떠보려고 하네, 진희는 마스크 속에서 작게 웃음 지으며 생각했다.
“이것 참, 우리 조직도 규모가 커지다 보니 정보가 샐 일이 많아서 말일세. 적어도 반년은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무리했어.”
“……잘 좀 숨기지 그랬어. 그렇게 대놓고 움직이는데 소문이 안 날 것 같았어?”
이렇게 된 이상 좀 더 들어볼까.
두목은 아무래도 진희를 외부의 단체 혹은 조직에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상황이 오묘했다. 이종족인 요정과 용인을 사로잡아 뭔가를 하려던 와중에, 갑자기 간부들을 모조리 물리치며 그 둘을 잡아간 정체불명의 헌터라니. 상식적으론 절대 일개 개인 헌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심지어 그녀가 한바탕하는 사이 요정과 용인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출구를 통해 나갔다.
제삼자가 보자면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흐음, 그렇군. 가람 보육원 때부터 알고 있던 건가?”
청하와 민하가 있던 곳이 가람 보육원이었구나. 이제야 이름을 알았다. 그녀는 모른 척 잡아떼며 대답했다.
“억지로 거길 인수할 때부터지. 당연하잖아? 너희 같은 조폭이 그런 좋은 일을 할 리도 없고.”
“하긴, 급한 사업이긴 했지. 하지만 별수 없다네, 그곳엔 보물이 있으니까.”
“……요정 말이지.”
“그래.”
두목이 씨익 웃었다. 느긋했던 그간의 웃음이 아니라, 뒷골목에 잘 어울리는 악한 웃음이었다.
“‘그건’ 사용 방법이 무궁무진하지. 조금만 더 활용 방법을 알아낸다면, 일확천금도 꿈이 아니야.”
“…….”
“뭐, 그건 자네의 무용(武勇) 덕에 못 하게 되었지만 말일세.”
아쉽다는 듯 말하는 것치곤 태도가 의연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가 싶었던 진희는 태연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날 막기 위해 싸움이라도 할 거야?”
“내가? 자네와?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지금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내 자비로 만들어진 걸세.”
순간 두목의 마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땅과 물의 마법을 사용하는 A급의 마법사라고 했던가. 그가 마력을 해방하자 마치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주변 벽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진희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기운에 압도되었다거나, 무서워서 몸이 굳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양반은 꼭 힘을 숨긴 강자 같은 상황을 좋아한단 말이지.’
역시나.
그녀가 말이 없어지자, 두목은 이내 마력을 풀고 신사적으로 웃었다.
“이런, 실수했군그래. 농담일세, 자네와 싸우기 위해서 부른 게 아니야.”
“……그래?”
아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은 그녀가 침착을 가장하고 다시 질문했다. 마치 아까 전의 기운 때문에 조금 힘이 빠진 듯, 목소리가 낮았다.
“난 거래를 하고 싶다네.”
“거래?”
“그래.”
두목은 책상 안쪽에 있던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상자를 책상에 올렸다. 보석함이었다.
“이 안에는 최상급 마정석과 영약이 들어 있지. 그 가치는 십수 억쯤 될 거야.”
“…….”
아무리 헌터들의 재산 수준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지만, 십억은 쉽게 부를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물론 이건 선금이네. 자네가 나와 거래를 진행할 시, 바로 주도록 하지.”
“거래 내용은 뭔데?”
“계약일세.”
“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