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0화
요정,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들은 이종족 중에서도 인간에게 친절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누군가를 고의로 해치는 법이 없고, 설사 죽임을 당하더라도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수는 적었다. 이종족의 신체는 마법사나 학자들에겐 훌륭한 연구 표본이었고, 호사가들에겐 좋은 눈요기였다.
요정들의 날개를 쥐어짜 만든 장신구와 그림. 날개 잘린 요정을 시종으로 부리는 귀족. 요정의 눈물엔 어떤 힘이 있는지 실험해 보겠다며 요정이 키운 아이를 눈앞에서 죽이던 마법사.
그 온갖 학대 속에서 요정의 수는 점점 줄어갔고, 이내 바제트의 세계에선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종족이 되고 말았다. 높은 신분의 귀족이나, 마법사가 아니면 보기도 힘든 존재였다.
그런 요정이 지금 진희의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작은 크기의 요정이 아니라, 명백히 인간 아이 수준으로 자란 요정이.
“……네 동생 요정이었어?”
“네.”
청하가 여전히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제야 까마귀파가 청하의 여동생을 납치해 간 이유를 알았다. 바제트의 세계에서도 귀하다고 노예 상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종족이다. 인간만이 존재하던 이 세계에서 민하는 그 자체만으로 탐할 만한 보물이었겠지.
왜 까마귀파의 간부가 ‘그것’이라고 민하를 칭했는지 알겠다. 그들은 민하를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혹시 조폭들이 보육원을 노린 것도 그것 때문이야?”
“……이것 말고도 이유가 있어요. 그건, 민하를 구하고 나서 설명해 드릴게요.”
“…….”
청하의 동생을 구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요정을 발견한 순간 진희의 눈동자엔 호기심보단 스산한 기색이 맴돌았다. 민하의 모습을 보니 어렸을 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말동무였던 요정. 그 요정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우선 민하를 구하고, 단숨에 도망갈 거예요. 도망칠 수 있는 가장 빠른 통로는 생각해 뒀어요.”
“…….”
“아마 바로 쫓아올 거예요. 하지만 여기 감옥에서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알고 있어요. 준비한 비상통로가 사실 아까 봤던 입구 경비병 바로 앞 하수구거든요. 경비에게 들키긴 하겠지만, 바로 달려버리면…….”
“…….”
“……누나?”
“아.”
진희가 뭔가 생각에 빠져 있던 걸 청하가 흔들어 깨웠다. 진희는 습관처럼 눈매 쪽에 손을 올리다, 이내 마스크가 있단 걸 깨닫고 손을 내렸다. 그녀의 맥없는 움직임에 청하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니, 괜찮아. ……너는 도망가.”
“네?”
“처음부터 말했지만, 난 여기에 볼일이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볼일이 하나 더 생겼다. 이 녀석들에게 깽판을 쳐줄 명분이. 아까처럼 간단한 심심풀이가 아니다. 명백한 짜증이 올라왔다.
“혼자잖아요! 위험해요!”
“됐으니까 가. 가다가 붙잡히면 그게 더 화날 거 같으니까. 동생 보호나 잘해.”
진희의 진지한 말투에 청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번에 나가볼까. 더 이상 떠들 생각은 없는지, 진희가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이따위 창살 굳이 자물쇠에 손댈 것도 없이, 단박에 잘라낼 생각이었다.
“오빠……?”
그 순간, 청하와 진희의 말소리에 깼는지 민하가 눈을 떴다. 민하는 잠시 두 눈을 비비며 꿈인지 확인하다, 이내 마스크 너머의 얼굴이 청하란 걸 확신했는지 무거운 철구를 끌며 다가왔다.
“오, 오빠! 진짜 오빠야?”
“응, 나야. 민하야. 다친 데 없어? 괜찮아? 응?”
청하의 목소리엔 이미 울음기가 가득했다. 발목이 끌려 아픈지 인상을 찌푸리던 중에도, 철구를 어떻게든 굴려 문 근처까지 온 민하의 눈에도 이미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역시나 요정이야.’
진희는 민하가 가까이 오자 풍기는 마나의 기운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마나 감응력이 뛰어난 그녀는 민하의 주변을 떠도는 농밀한 마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날개에서 나오는 향기에 짜증으로 흥분되었던 가슴이 점차 진정되었다.
이것이 요정이 가진 힘이었다. 주변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고, 감정이 진정된다. 물론 작정하고 거부하려면 못할 것도 없는 미약한 기운이지만, 무의식을 조종하는 힘이란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대단했다.
만약 까마귀파에서 이 힘을 눈치채고 그것을 이용하려고 했다면.
“…….”
바제트 때 보아왔던 수많은 ‘요정 상품’이 떠올랐다. 다시금 그녀의 두 눈에 미약한 살기가 감돌려 할 때, 창살 바깥으로 민하의 손이 다가와 진희의 손을 마주 잡았다. 보드라운 손이 차가운 진희의 손을 감싸 쥐었다.
“괜찮아요.”
“……뭐?”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괜찮아요.”
“…….”
읽었구나, 진희가 이내 눈에 힘을 빼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가 민하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결코 사납지 않게 부드럽게.
종종 이런 일이 있었다. 요정족은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인간의 감정이나 표면 의식을 때때로 읽곤 했다. 과거의 바제트도 자주 경험했던 일이었다. 바제트가 화가 나거나 슬퍼할 때, 요정은 이렇게 위로하곤 했다.
“아, 민하야. 이분은 날 도와준 분이야.”
“…….”
“괜찮아, 날 여기까지 오게 도와주는 분이라 걱정은…….”
“아니야, 오빠. 걱정하는 게 아니야.”
민하는 청하의 손을 맞잡았다. 눈물이 맺혀 있던 동글동글한 눈매가 방긋 미소 지었다.
“의심하지 않아. 괜찮아.”
“그, 그래?”
“응, 왜냐하면 이분은…….”
요정을 아시는 분이니까, 민하는 말을 삼켰지만, 그 뒤에 이어질 말을 진희는 잘 알고 있었다.
요정인 민하가 자신에게 향하는 진희의 감정을 몰라볼 리 없었다.
“……좋아, 그럼 일단 거기서 물러서 줄래? 이 창살을 자를 거니까.”
“아, 그전에 혹시……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
“네, 다른 게 아니라, 여기에 갇혀 있는 분을 좀 구해주셨으면 해서요.”
구해야 하는 다른 사람이 있나? 청하가 고개를 갸웃하자, 민하가 진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처럼……. ‘다른’ 사람인 분이세요. 바로 옆방에 계세요. 제가 울거나 잠을 못 잘 때, 계속 말을 걸어주셨던 분이에요. 다 괜찮아질 거라고 응원해 주셨어요.”
진희와 청하는 고개를 돌려 옆방을 바라보았다. 민하가 있던 방과 달리 여타 감옥들과 마찬가지인 감옥이 있었다.
다른 방과 다른 점은, 불빛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어두운 방이란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안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희는 그 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스산한 살기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두운 방,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는 그곳엔 한 사내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시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마력으로 주변을 살핀 그녀에겐, 그 사내가 똑바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당신은…….”
이런 맙소사. 진희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을 통해 그를 살펴보니,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용인(龍人)이네.”
모습은 인간 사내의 모습이지만, 그녀에겐 또렷하게 보였다. 용인, 드래고노브 특유의 불꽃이 담긴 마나 홀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진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창살에 다가갔다. 사내의 살기가 한층 더 흉흉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날…… 아는가?”
“당연히 알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진희의 전생, 바제트의 가문의 문양은 용(Dragon)이며, 가문의 시조 중 한 명이 용인이었다. 그 때문에 용인 종족과는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호위 기사 중엔 실제로 용인인 자도 있었다.
미약하지만 불타는 마나홀을 그녀가 몰라볼 리 없었다.
“그분이에요. 절 도와주신 게.”
민하가 곁에서 말했다. 제발 도와달라는 듯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청하도 진희를 올려다보았다.
“후우, 그래, 알았어. 일단 본 이상 넘어갈 순 없으니까.”
진희가 한참을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녀의 어릴 적 친구였던 요정과, 가문의 상징이었던 용인. 그 둘이 눈앞에 있는데 두고 간다니, 장난으로라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꺼져라, 인간. 도움은 필요 없다. 난 어디까지나 요정족을 위하여…….”
“됐고, 가만히 있어. 문을 자르고 동시에 다리의 사슬도 풀어줄 테니까. 팔다리 마나 회로가 잘리긴 했어도 달릴 순 있지?”
“…….”
용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필요 없다.”
“시끄러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당신 의견이야말로 필요 없어. 진희가 중얼거렸다.
“나중에 어떻게 된 상황인지 설명할 수 있게 말이나 정리해 둬. 들어야 할 게 많으니까.”
“……인간, 넌 믿을 수 있나?”
“말해 뭐해. 드라고로드 가라사대, 민물 속 미꾸라지를 잡을 바엔 인간과 손을 잡겠다고 했지? 기회조차 없이 용생 마감하고 싶지 않으면 말 좀 들어라?”
“……!”
용인의 두 눈이 번뜩였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순간 금색의 눈동자가 빛을 냈다.
그 속담은 용인들이나 그의 친인척들만 아는 속담이었다. 하잘것없고 성과 없을 시도를 할 바에야, (배신당할 걸 알아도) 이득 있을 도전을 해보겠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너, 설마 제국……!”
“시끄럽고.”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검을 빼 들었다.
“청하, 뒤로 물러나.”
“어, 어? 네.”
“바로 부술 거야. 네 여동생이랑 이 양반 둘 다 데리고 바로 도망쳐. 둘 중 누구라도 빼먹거나 다치면 가만 안 둬.”
“누, 누나는요?”
“난 여기 두목 좀 패러 갈 거야. 물어볼 게 많거든.”
진희가 검에 힘을 주었다. 곧장 가시화(可視化)된 마력이 검의 위를 덮어씌워, 얇고 긴 또 하나의 검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용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맙소사, 검성급…….”
“입 다물어, 혀 깨물라.”
발검(拔劍)
드라고소드(Dragosword) 일보(First step) 중단 베기 용 발톱.
“……!”
총 네 번의 검격. 두 번의 검격은 각각 쇠창살의 위와 아래를 갈랐고, 세 번째 검격은 민하의 쇠사슬을, 마지막 검격은 용인의 사슬을 잘라버렸다.
소리조차 없다. 바람이 휘둘리는 비명만이 들린 후, 단숨에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마치 용의 발톱을 연상케 하는 네 번의 발톱. 그러나 각각의 발톱은 모두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목표물을 베어냈다.
모든 것을 베어내고 남은 것은 그녀가 착검(着劍)하는 소리뿐.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도 눈치 못 챈 청하는 입을 떡 벌렸다.
“……설마, 당신은.”
“말 필요 없고, 얼른 나가.”
“……알겠습니다. 당신의 말을 따릅니다.”
어느새 사납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정중해진 말투로 용인이 말했다.
그는 천천히 감옥서 걸어 나와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