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5화 (5/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5화

“…….”

소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진희가 말했다.

소년의 주특기는 물량전이다. 절대 죽지 않는 인형들을 앞으로 내세워 적들을 죽이는, 다수 대 다수의 전투에 특화된 특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역량보다 아래인 상대에게 통하는 수법이다.

역량이 비슷한 상대 한 명보다, 역량이 자신보다 아래인 상대 열 명을 상대할 때 더 승률이 높은 주특기.

심지어 진희의 역량은 소년의 마법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차라리 박준 열 명이 있는 것이 소년에겐 더 싸우기 편했으리란 이야기였다.

박준 스타일의 우직한 검사였다면 소모전이 통했겠지만, 적의 빈틈을 기막히게 찾아내는 진희에게 인형은 수준 이하의 적수였다.

“너…… 기억해 두겠어.”

소년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임무는 실패했다. 저 여자가 있는 이상 이시영에게 손을 댈 방법이 없다. 차라리 진희가 힘이 빠지길 기다려야 하나 싶었지만, 그러기엔 지체된 시간이 너무 길었다.

“아, 도망가게? 하긴, 이제 곧 지원이 올 시간이네.”

“…….”

다 알고 있었나. 소년이 들으란 듯 침을 뱉었다.

아까 게이트를 나선 김유진 일행이 지금쯤 지원군을 몰고 오고 있을 것이다. 이시영은 무려 ‘금강’ 기업의 후계자 중 하나다.

비록 그 나이가 적고 능력이 별 볼 일 없다고 해도, 금강 그룹의 헌터들이 몰려온다면 소년이라고 해도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똑바로 기억해 둬. 다시 올 거야. 다음엔 네 목을…….”

“응, 그건 좀 그렇네.”

진희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년의 말을 잘랐다.

사실 진희는 소년을 살려 보낼 생각이었다. 살인에 거부감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 죄책감이 들 만큼 그녀는 어리숙하지도, 선한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자신의 재활운동에 도움을 줬으니까.

그리고 이런 적들은 놔두면 더 재밌는 적이 되어 돌아오니까 살려둘 셈이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좀 그랬다.

“헉!”

그녀의 발검이 또다시 빛을 발했다. 그러나 이번엔 목이 아니라 몸체다. 인형들은 두 동강이 난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저 소년은 분명 모종의 그룹에 속해 있을 것이다. 이시영이 이곳에 들어올 걸 예상한 그 계획성을 보면 뻔했다. ‘의적’이라고도 장난삼아 말했으니, 저들은 분명 무리 지어 다니는 도적 떼 같은 놈들이겠지.

이 녀석을 보내버리면 또 어떤 방해가 올지 모른다.

강한 적과 싸우는 건 즐거웠지만, 그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이 오는 건 탐탁지 않았다. 그녀에겐 밉지만 가족도 있었고, 쉬는 날 느긋하게 퍼져 있을 집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제트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아쉽게도 너와의 인연은 끝이겠다.”

“뭐, 뭐?”

인형들이 한꺼번에 무너지자 마력에 타격이 온 소년이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 있었던 그 자리에, 그녀는 없었기 때문이다.

“……!”

어느새 소년의 눈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다시 한번 발검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죽는다.’

소년의 동공이 확장된다. 시간이 늘어진다. 주마등이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과 놀아주고 있던 참이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억류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소년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었다.

한순간이었다. 그녀가 모든 인형을 해치우고, 소년의 앞에 도달한 것은. 그녀는 이 싸움을 단 수 초 만에 끝낼 자신이 있었다.

분명 소년 주변엔 방호 마법진과 함정이 깔려 있었음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가 발을 들이자마자 파훼되었다.

죽는다. 저 검에 매달린 금색의 마력이 눈에 보였다. 아무리 마법 방비를 해놓더라도, 저 마력에 닿는 순간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저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목은 허공을 날게 되겠지.

‘안 돼!’

소년이 이를 악물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반사적으로 사용한 것은 후드의 주머니 속, 비상사태에 사용하라며 받았던 탈출구.

[게이트 생성합니다.]

“응?”

순간 허공의 일그러짐에 검의 궤도가 빗나갔다. 블랙홀처럼 생긴 자그마한 게이트가 그녀의 바로 앞에 생성되었다.

“아아악!”

게이트의 공간 왜곡으로 인해 크게 빗나간 검이었으나 소년은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살기 위해 들었던 그의 오른팔이 사선으로 베였고, 이내 떨어져 나갔다.

깔끔한 단면으로 베여버린 팔뚝에서 피가 솟구쳤다.

“주, 죽여버리겠어!”

생각지도 못한 게이트의 출현에 진희가 조금 당황하던 사이, 소년이 바닥에 떨어지려던 자신의 오른팔을 왼손으로 잡아챘다.

게이트는 소년의 신장 크기만큼 순식간에 커지더니, 그대로 소년을 집어삼켰다.

“가만 안 둘 거야, 기다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사지를……!”

“나 참.”

꼬맹이가 말투가 살벌하네. 진희는 검에 묻은 혈흔을 탁탁 털어내고 혀를 찼다.

그건 그렇고, 설마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도구란 게 실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이트를 인위적으로 만들거나 없애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게 상식이었다.

설마 게이트 때문에 숨통을 끊으려던 공격이 막히게 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굳이 말할 시간을 주지 말고 단숨에 찔러버릴 걸 그랬나, 진희는 살벌한 후회를 담담히 중얼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아직도 가슴팍을 꾹 누르고 있던 박준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뒤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이시영이 졸졸 따라다녔다. 이시영의 눈엔 공포와 묘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고, 박준은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짐이 된 것 같군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충분히 잘 싸우시던걸요.”

팔꿈치를 굽혀 옷 사이로 검을 닦아낸 그녀가 허리춤에 검을 꽂았다. 그 익숙한 몸놀림에 박준이 심각한 안색으로 물었다.

“……혹시, 당신 사실 신입 헌터가…….”

박준이 말을 이어가려던 그때, 게이트 쪽에서 큰 소란이 발생했다.

“서, 서진희 씨! 박준 씨!”

김유진이 헌터로 보이는 십여 명의 사람과 함께 게이트를 찾아온 것이다.

상황은 빠르게 전개되었다.

박준은 바로 응급실에 실려 갔고, 이시영은 금강 그룹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물론 진희를 신경 써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구급대원은 그녀에게 다친 곳은 없느냐고 물었으며, 사정 청취를 하던 김유진은 연신 진희에게 고맙다며 인사했다.

그들 모두를 돌려보내고 진희는 경찰서로 향했다. 그리고 게이트 내의 상황을 형사에게 진술하던 도중.

“제가 말하겠습니다.”

박준이 돌아왔다. 가슴팍을 붕대로 감고 시급히 달려온 듯한 그는 잠시 진희와 할 말이 있다면서 그녀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이번 일, 제가 처리했다고 말해도 될까요?”

“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진희가 고개를 갸웃하자, 박준이 조금 미안하단 얼굴로 말했다.

“이건 사실 기밀입니다만……. 오늘의 습격은 저희 건 하나만이 아닙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어요.”

“그래요?”

“저희와 같은 기업의 수뇌부나 간부, 헌터 길드의 길드장, 주요 국회 인사까지 공격당했습니다. 그들은 생각보다 거대한 조직이었어요. 그러나 저희 쪽에선 이미 국가든, 기업이든 그들이 숨어 있으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습격 타이밍이 공교로웠고, 심지어 자택이나 여행 중에 당한 사람도 많아요. 아마 이 사건도 위에 보고가 올라갈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절 걱정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공적을 가로채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진희의 눈으로 보기에도 박준이 그런 성격은 아닌 듯했다. 그는 그저 뚜렷한 배경이 없는 진희를 걱정하는 것이었다.

‘하긴.’

박준의 선택이 옳았다. 그녀의 무력은 박준도 보았다시피 대단한 것이었지만, 결국 개인의 힘이었다. 보고가 올라가면 분명 주목을 받을 테고, 그럼 적들도 진희를 특정하기 쉬워질 게 뻔했다.

“그리고 금강은…… 아마 돕지 않을 것입니다.”

강하다지만 결국 C급 헌터다. 진희가 위험에 빠진들 금강은 돕지 않을 것이다.

국가에서 도와줄 수야 있겠지만, 게이트를 조작하고 동시다발적인 테러까지 저지르는 이들의 힘을 무시할 순 없었다.

게다가 박준 말마따나 국가나 기업 어느 쪽에 적이 숨어 있으리란 의심도 간과할 순 없었다. 동시다발적인 테러, 그것도 주요 요인의 경로를 완벽히 예측한 테러란 조직 내 공모자가 있을 것이란 예상을 하는 게 옳았다.

그렇기에 박준의 제안은 해당 테러를 모두 자신이 막은 것으로 하고, 진희가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다행히 신입 헌터셨으니까 그간 헌터 활동 이력은 없겠군요. 스마트 워치의 파티 기록도 제가 모두 삭제했어요. 조심히 다니신다면 한동안 괜찮을 겁니다. 적들을 찾아낼 때까지만 쉬시면 됩니다.”

“…….”

“물론 비용적인 부분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구해준 답례로…….”

“네, 돈은 받을게요. 박준 씨가 말한 것처럼 진술서도 작성하도록 하죠.”

진희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준이 도리어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괘, 괜찮으십니까?”

“상관없어요. 그거 구했다고 업적 인증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테러를 막아낸 신입 헌터라고 언론에 소개되는 것도 싫었다. 명예는 좋아했지만, 무분별하게 얼굴이 팔리는 건 딱 질색이었다.

진희는 그럼 얘기 끝났죠? 하고 되물은 다음, 다시 형사가 있는 사무실로 걸어갔다.

“……호쾌한 분이시네.”

그 뒷모습을 보며 박준이 뺨을 긁적였다.

사실 무례하고 억지인 제안이었지만, 그렇게 단숨에 허락할 줄은 몰랐다.

“아, 그래도 집에서 쉬고 있고 싶진 않아요.”

“네?”

“활동은 할 거라고요. 돈은 줄 거죠?”

“…….”

마음대로 하세요, 박준이 진희의 생각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 * *

“어라, 안녕하세요?”

“……?”

진술서를 다 작성하고 나서 돌아가려던 길이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택시를 타야 할까 고민하던 중,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엷은 눈썹과 쭉 째진 눈매, 미려한 턱 선을 가진 사내는 진희보다 머리 하나쯤 컸다.

딱 정리하자면, 마치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한다면 이런 얼굴이겠지 싶은 사람이었다.

“자주 뵙네요.”

그는 씨익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내가 이런 사람과 만난 적이 있었나 진희가 되짚던 사이, 그는 복도 벽에 기대면서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이런, 까먹으셨나 보네. 저번에 그 평가실에서 만났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아.”

그 과자 까먹고 있던 양반. 진희가 이제야 기억난다는 듯 말했다.

“기억나네요. 근데 무슨 일이세요?”

“그냥 지나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여서 와봤어요. 게다가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셨다면서요?”

“네. 그렇죠.”

끔찍한 사건이라. 하긴 그 약초밭 광경을 보면 끔찍한 사건이 맞겠지. 신원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이 이등분 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대기업의 B급 헌터란 사람은 어깨에 창까지 맞았다.

진희야 그런 사건이 있었지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주변인에겐 아니었다.

“이야,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사망자가 없어서요. 이번 테러는 총 스무 군데에서 발생했는데, 사망자가 없는 곳은 딱 두 곳이었거든요. 진희 씨가 있던 곳이 그중 하나죠.”

“…….”

진희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사내의 반대편 벽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