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4화
쨍!
마치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약초밭의 중앙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산산조각이 나는 풍경, 그 잔해 사이로 보이는 것은 검은색 후드티를 입은 한 소년이었다.
코 아래만 보이는 얼굴은 이시영의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창백한 피부를 가진 그 소년이 혀를 차며 말했다.
“뭐야, 어떻게 알았어?”
그와 동시에, 박준을 향해 덤비던 적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마네킹이라도 된 듯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이들을 보며 당황한 박준이 뒤로 물러났다.
“이, 이게 무슨……?”
“기척을 아예 숨기고 있었는데. 잘도 찾았네. 야, 너 제법 눈이 좋다?”
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다시 뒷걸음질해 박준의 앞에 섰다. 박준은 그게 자신이 숨을 돌릴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란 걸 눈치챘다.
“가, 감사합니다.”
“물러나세요. 이것들 다 인형이에요.”
“인형이요?”
“네.”
진희는 마침 이시영을 건드리려고 했던 적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감촉은 사람과 같았지만,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 있던 그는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잘 아네. 맞아, 걔들은 내 인형이야. 정확히는 패러사이트지.”
패러사이트, 즉 기생충.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뻔했다.
“이 녀석들 모두 자아가 없어요. 자동인형이나 마찬가지니까 상처를 입더라도 멈추지 않죠.”
그제야 박준은 자신의 사투가 쓸모없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창을 휘둘러도 인형의 움직임엔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박준은 차츰 체력이 떨어지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둔해져 인형들에게 죽임을 당했겠지.
“무기도 아마 주구(呪具)일 거예요. 몸, 느려졌었죠?”
“그, 그러고 보니…….”
“당사자가 못 느끼는 걸 보니 신체 약화보단 인지력 저하 같은 종류겠네요. 상처 입힐수록 환각을 더하는 종류인가.”
마치 유추하는 척 말했지만, 사실 마나의 태동이 눈에 보여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적 무기에 상처 입을수록 박준의 머리 쪽에 해당하는 마력들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검은 후드의 소년은 호오, 하고 입을 벌렸다.
“와, 대단한데? 이렇게 완벽하게 맞추는 사람은 지금껏 본 적이 없어. 태어나서 처음이야.”
“태어난 지 한 삼십 년은 된 것처럼 말하네. 아가야, 유희왕 카드 만질 나이잖아?”
“……좋아, 주둥이도 꽤나 다룰 줄 아네.”
소년이 입술을 비죽이며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멈춰 있었던 적들이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근데 그래서 뭐가 달라져? 날 찾았다고 해서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면, 그 애 같은 C급 애송이랑 신입 둘이서 싸울 수 있어? 너희의 보호자는 이미 반쯤 죽어가잖아.”
“웃기지 마라.”
박준이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도련님을 건드리다니, 넌 이곳만 나가면…….”
“아아, 알고 있다니까 그래. 그것도 모르고 습격했을 것 같아? 금강 기업의 넷째 아들이잖아? 뭐더라, 셋째와 띠동갑인 어화둥둥 애새끼라고 했던가.”
“입조심……!”
“당연히 알지. 그래서 죽이러 온 건데.”
죽이러 오다.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이시영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무, 무슨 소리야! 날 왜 죽여! 너희가 뭔데!”
“악당이지 악당. 아니다, 의적이라고 하자. 히히, 서민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금강 기업을 혼내주는 의적.”
소년이 씨익 웃었다. 이시영은 말도 안 된다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며 발악했지만 이내 박준이 손으로 막자 입을 꾹 다물었다.
“거짓말이지?”
“응, 구라야.”
진희의 물음에 소년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하여간, 뭐 이유는 알 것 없고. 이제 시간도 별로 없으니 슬슬 죽어. 이제부터 제대로 갈 테니까.”
“제, 제대로라고?”
“그럼 여태껏 내가 제대로 싸운 것 같아 아저씨? 저 여자가 언제 나서나 싶어서 힘 빼고 싸운 것뿐이야. 근데 이쯤 됐으니 그냥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
소년의 손짓에 인형들이 무기를 강하게 쥐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마력이 그들의 손에 깃들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가시적인 마력 강화 현상. 안 그래도 안 좋던 박준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느껴지는 마력의 크기가 하나하나 장난이 아니었다. 마치 B급의 헌터들을 보는 듯하다.
자신이 완벽한 상태였어도 방어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렇게 된 이상, 도련님과 진희만이라도 도망치게 해야 한다.
박준이 창을 곧게 쥐고 앞으로 나서려 했다. 전력을 다한 그의 몸엔 폭발적인 마력이 깃들었다. 아직 남은 힘이 있었네, 소년이 흥미롭다는 듯 뭐라 말하려던 순간.
“괜찮겠다. 나도 손 좀 풀고 싶었으니까.”
“……뭐?”
진희가 던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발검(拔劍)했다.
싹둑. 마치 색종이가 가위에 잘리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고.
동시에 그들을 압박하고 있던 전사들의 목이 모조리 떨어졌다.
“어?”
“자, 다시 일으켜 세워봐. 죽지 않는 인형이라니, 재활운동으로 이만한 게 없겠네.”
진희의 눈매가 곱게 접혔다.
“방금…… 마력이.”
검 끝에서 나오는 마력의 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건 이 자리에서 오직 박준뿐이었다.
허리춤에서 순식간에 발도해 중단을 베어버린 검의 끝엔, 수 미터에 해당하는 마력의 검이 달려 있었다. 얇고 긴, 마치 와이어처럼 생긴 그 마력은 순식간에 인형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신체 강화를 넘어서 무기에 마력을 입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B급 헌터는 물론이고, 상위의 C급 헌터도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저렇게 또렷한 현상으로, 그리고 무기로 사용되는 걸 보는 건 박준으로서도 처음이었다.
마력을 실처럼 뽑아낸다는 건 그만큼의 집중력과 재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당장 박준만 하더라도, 창에 일렁이는 마력을 입힐 순 있어도 단단하게 구조화된 무기를 구현할 순 없었다.
“무, 무슨 짓을 한 거야!”
후드티의 소년은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당황한 듯 소리쳤다. 목이 사라진 인형들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듀라한처럼 자신의 머리를 들고 목에 꽂았다.
“음, 오래간만에 써서 위력이 별로인가.”
과거라면 발검 시 마력 구현화는 5m까지도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감이 덜 돌아온 탓인지, 아니면 신체가 못 버티는 탓인지 2m를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다.
발검은 준비 자세나 집중할 시간이 필요해 애용하는 기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기술을 써봐야 손이 풀리는 법이다.
그녀의 검술의 원류는 용병 전투술이다. 검, 단검, 창, 칼, 온갖 무기를 사용해서 적을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술이며, 세상 곳곳의 검술이 섞여 있어 좋은 말로도 정련된 검술이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오히려 더 활용도가 높은 검술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검의 활용 방식은 제한이 없다.
형(形)이 없기에 무작위적이고, 로(路)가 다양하기에 예측할 수 없다.
진희는 이번엔 검을 역수로 잡았다. 숏소드다 보니 그 생김새는 마치 비수를 든 것처럼 보였다.
“한 번 가지고 건방 떨지 마!”
아까보다 더욱 강한 기세를 되찾은 인형들이 그녀를 향해 쇄도해왔다. 이번엔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단숨에 달려오는 그들을 향해, 진희도 허리를 숙여 돌진했다.
“조심!”
당장에라도 공격에 당할 것 같은 진희의 진입에 박준이 비명을 질렀지만, 진희의 움직임은 민첩했다.
가슴팍을 똑바로 노리는 검을 몸을 비틀어 피하고, 역수로 들었던 검을 위로 휘두른다.
단숨에 턱이 갈라지는 적, 몸을 반대편으로 자연스럽게 돌린 진희의 검이 이번엔 창을 찔러오던 적의 목에 박힌다.
이미 한 번 잘린 적 있던 목은 그 내구가 취약해, 또다시 머리가 떨어지고 만다.
“……!”
석궁의 볼트가 마력을 품고 총알처럼 날아온다. 목적지는 그녀의 이마. 그러나 종이 한 장 차이로 어깨를 돌려 피하곤, 역수로 쥐고 있던 검을 던졌다.
적의 머리에 정확히 박히는 그녀의 검. 마찬가지로 마력을 품고 있어, 인형의 두개골은 두부처럼 갈라졌다.
다시 회복해 오는 적들이 그녀의 뒤를 잡으려 했지만, 아까와 똑같이 허리를 숙여 돌진한 그녀가 석궁을 들고 있던 적의 앞에 도착, 박혔던 검을 꺼내고 몸을 돌림과 동시에 가로로 휘두른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에, 적의 머리는 또다시 떨어져 갔다.
“괴, 굉장해.”
멀리서 바라보던 이시영이 입을 떡 벌렸다.
춤과 같은 검이었다. 어깨를 비틀고 허리를 반전하는 것만으로 검이 적의 머리를 계속해서 가져간다.
이시영이 지금껏 보았던 단단하고 정형화된 검술과 달리, 마치 합을 맞춘 연극을 보는 듯한 검술이었다.
곁에서 보던 박준 또한 두 눈을 의심했다. 이시영이 그녀의 몸짓을 보고 놀랐다면, 박준은 그녀가 공격한 적의 부위가 모조리 머리와 목이란 것에 두 번 놀랐다.
그녀는 정말로 적들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팔과 다리를 잘라내면 적을 잠깐이라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인데, 그녀는 일부러 목과 머리만을 노렸다. 좀 더 싸워보자는 듯이.
“이익!”
후드티의 소년은 이제 마법까지 사용해 왔다. 어느새 꺼낸 검은색 뼈 지팡이를 휘두르자, 수많은 마력의 화살들이 진희를 노렸다.
하나하나 큰 위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 수가 스물이 넘으면 그것도 하나의 병기다. 허공을 수놓는 날카로운 화살이 석궁의 그것처럼 똑바로 진희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진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인형을 다루고 있는 중엔 마법을 잘 쓸 수 없나 봐?”
그 말 그대로다. 소년의 화살 적중률은 형편없었다. 스물 넘는 화살 중 그녀에게 제대로 도달한 것은 다섯 개쯤. 그것들 모두를 적들의 신체를 들이밀어 막아낸 그녀가, 또다시 춤을 추듯 몸을 날렸다.
숏소드는 타격 범위가 짧다. 그 범위를 이용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다리를 사용하는 것. 멀리서 창을 이용해 거리를 넓히려는 적에게 다가갔다.
창으로 베려 했지만, 그보다 발이 더 빨랐다.
호쾌한 뒤돌려 차기로 창이 입사각을 만들기 전에 그 대를 걷어찬다. 그리고 그 회전력으로 한 번 더 돌아, 접근함과 동시에 검을 휘두른다.
또다시 떨어지는 창병의 머리.
“말도 안 돼…….”
수십 분의 싸움이 지속되었다.
적의 머리가 떨어진 횟수는 셀 수도 없다.
후드티의 소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와 자신은…….
“넌 나와 상성이 안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