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3화
약초밭 던전의 입구는 강남역이었지만, 건너편 입구는 커다란 산맥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공간이 뒤틀린 게이트에 조심히 들어가자 높은 산 특유의 희박한 공기가 그들을 반겼다.
그리고 발아래엔 비탈길에 심어진 수많은 약초가 보였다.
약초가 심어진 비탈길엔 나무 한 그루 없었고, 그 때문에 산맥 한가운데에 마치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 같았다. 딱 봐도 누군가의 손이 탄 약초밭임이 분명했다.
‘이게 5급이란 말이지.’
진희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약초밭 주변에는 야생동물 몇 마리 말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던전의 등급은 던전을 드나드는 탐사대, 헌터들에 의해 매겨진다. 약초밭 던전은 생성된 지 일 년이 막 지난 던전이었고, 위험성은 5급 던전들 중에서도 최하위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위험성도 낮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그다지 없는 던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던전을 애용하는 헌터는 안전 주의자가 많았다.
이 던전은 헌터치고는 박봉이지만, 일반인치곤 제법 많은 금액을 보장해주는 던전이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일이다. 아무리 헌터라는 멋진 닉네임의 직업이라고 해도, 결국 본질은 현대인이니까. 안전하고 편하게 돈 벌 방법이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쳇, 이딴 재미없는 일도 헌터라고.”
“…….”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는 무리도 분명 꽤나 많았다.
바로 진희의 곁에 있는 소년, 이시영과 같은 이들이었다.
안전 제일주의란 곧 도전하지 않는다는 말을 뜻한다. 헌터는 일반적인 방법으론 강해질 수 없다. 마나, 마력을 계속해서 사용해야 하고, 생사를 넘나들거나 그만큼의 지식적 성취가 있어야만 등급을 올릴 수 있다.
몸을 단련하거나 공부를 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지만, 아무래도 전투직 헌터는 게이트를 넘어서 전투를 해보는 게 가장 빠른 성장 방법이었다.
그런데 김유진이란 헌터는 마법사임에도 약초밭 헌터를 자처하고 나섰다. 위로 올라설 생각이 없단 이야기였다.
사실 매우 상식적이고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이시영처럼 욕심이 있는 헌터들에겐 다르게 보였겠지.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한 이들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같은 헌터입니다. 이곳이 5급이라 해도…….”
“웃기고 있네. 이게 무슨 헌터 일이야? 약초 캐고 돌아가서 푼돈 버는 게?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박준이란 헌터는 비교적 예의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진희는 흘끔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김유진 일행은 약초밭 한복판에서 약초를 캐고 있었다. 호위를 맡은 다른 일행은 그 주변을 둘러보기만 하면 됐다.
박준은 또 시작이네 하는 표정이었고, 이시영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연신 혀를 찼다.
“그러니까 내가 3급 던전 가자고 했잖아.”
“3급은 B급 이상이 도전하는 던전입니다.”
“그게 뭐? 내가 B급보다 못해 보여? 나 곧 올라간다니까?”
“도련님이 못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 사람도 고생이네. 진희는 더 이상 그쪽에 신경을 안 쓰기 위해 아예 고개를 돌렸다. 부잣집 자식의 투정을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에서 보는 건 처음이어서 보는 재미는 있었지만, 괜한 불똥이 튈까 싶었기 때문이다.
진희는 그들과 반대편 방향으로 순찰했다.
‘평화롭긴 하네.’
공식 헌터가 되고 나면 파티장을 할 수도 있고, 직접 던전 공략에 나설 수 있기에 간단한 임무를 받은 거긴 한데, 그런 걸 차치하고 생각해도 과하게 평화로운 임무이긴 했다.
되도록 약초를 밟지 않으며 주변을 산책했다. 그리고 일행과 멀리 떨어졌을 때,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아 들었다.
장식이 거의 없는 심플한 검으로, 길이는 숏소드에 버금갔다. 국가에서 임대하는 장비라 내구성과 위력은 형편없다고 사람들이 곧잘 말했지만, 진희가 보기엔 이것도 충분히 괜찮은 검이었다.
“확실히 현대는 현대네.”
대장간에서 만든 잡철 섞인 검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정도 검이라면 바제트 시절의 세계에서 쓴다고 해도, 명검 소리는 못 들으나 나름 고가의 장비로 거래될 터였다.
그녀는 손을 풀 겸 검을 몇 번 휘둘렀다. 신체는 바제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연약했지만, 그 재능만은 여전했다. 근력이 부족하다 싶어 마나를 이용해 신체를 강화하며 휘두르자 금세 과거의 위력이 드러났다.
“키가 좀 더 컸음 좋았을 텐데.”
바제트의 키는 진희의 키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컸다. 신장 차이가 난다는 건 검로 또한 수정해야 한단 이야기였다.
나중에 천천히 수정해 봐야겠지. 그래도 오래간만에 검을 잡았더니 몸에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숲속에 들어가 수련이나 좀 할까 하던 그때.
“응?”
그녀의 기감에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어? 야, 저거 뭐냐?”
진희가 있던 곳과 반대되는 위치, 그러니까 이시영과 박준이 서 있던 쪽의 숲속에서 인영(人影)이 보였다. 마침 그쪽을 바라보던 이시영이 박준을 불렀다.
박준은 무슨 소린가 싶어 몸을 돌렸다가, 이내 그것을 발견하고 주머니에서 작은 오브(Orb)를 꺼냈다.
그 오브는 단숨에 한 자루의 창으로 변했다.
“뒤로 오세요, 도련님.”
심상치 않았다. 진희야 저들의 존재를 감지했지만, 박준은 그들이 근처까지 올 때까지 감지하지 못했다.
“누구냐.”
“…….”
대답이 없었다. 수많은 인영이 숲의 그림자에서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검은색 가죽 갑옷과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이들은 천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도 박준처럼 오브를 이용하여 검, 석궁, 지팡이 등 갖가지 무기를 소환했다.
“저, 저기?”
박준이 정체 모를 이들과 대치하는 사이, 진희가 빠르게 김유진 일행에게 달려왔다.
“바로 게이트로 달려가세요.”
“네, 네?”
“몬스터 아닙니다. 사람이에요.”
게이트는 약초밭 바로 위에 있으니, 적어도 파티가 들어온 후에 입장한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보다 전에 게이트에 들어와서 기다리고 있었단 이야기겠지.
그렇다면 이야기는 뻔했다.
‘살수(殺手)다.’
“제가 뒤를 봐줄 테니 게이트까지 바로 달려요. 그리고 신고하세요.”
“그, 그렇지만…….”
김유진이 이시영과 박준을 가리켰다. 적들은 천천히 둘을 감싸고 있었다.
“도와줄 수 있어요?”
“…….”
말의 앞에 ‘당신들 실력으로’라는 말이 빠졌다. 하지만 김유진은 알 수 있었다. 자신 같은 D급 헌터가 백 명이 모여도 상대가 안 되는 게 B급 헌터다. 이 자리는 빠지는 게 옳았다.
진희는 검을 들고 김유진의 앞에 나섰다. 김유진은 작게 힘내란 말을 하곤, 동료와 함께 곧장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당신도 가십시오.”
진희는 천천히 박준 쪽으로 걸어갔다. 김유진이 도망치는데도 적들은 아무도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역시나 목표는 박준, 혹은 이시영이다.
진희가 가까이 오자 적들은 이제 박준뿐 아니라 진희를 같이 사정거리에 두고 주변을 둘러쌌다.
“받은 원한이 많나 보네요.”
“제 업은 아닌 듯싶지만요.”
박준이 긴장된 얼굴로 창을 바로 쥐었다. 진희는 흘끔 이시영을 바라보았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건지 얼떨떨한 얼굴의 소년이 보였다.
‘의외로 거물 집안인가 보네.’
던전 안에서 헌터 간의 이권 다툼은 제법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일을 벌일 줄이야. 괜히 B급 헌터를 호위로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네. 진희는 태평한 얼굴로 검을 쥐었다.
“…….”
싸움 개시는 돌발적이었다. 얘들이 언제까지 대치하려나 생각하던 순간, 가장 앞에서 검을 들고 있던 살수가 달려들었다.
직선적인 공격, 목표는 확실하다. 이시영이다. 박준이 차분하게 그 앞을 가로막았지만, 노리는 무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석궁의 볼트가 날아오고 가장자리에선 창 한 자루가 찔러 들어온다.
“……핫!”
동시다발적인 공격이었지만 박준은 침착했다. 검을 흘려낸 직후 창대로 살수를 밀어내고, 동시에 이시영의 고개를 잡아 바닥으로 내리눌렀다.
지나쳐가는 볼트 사이로 주먹을 올려쳐 찔러 들어오던 창을 후려쳤다. 어느새 그의 손엔 징이 박힌 건틀릿이 끼워져 있었다.
방어와 반격은 동시에 이뤄진다.
박준의 창날이 그 방향을 돌려 다시금 공격하려는 검의 주인에게 찌르기를 가했다.
같은 창을 쓰던 살수와는 차원이 다른 찌르기에, 검의 주인은 단숨에 가슴을 찔렸다.
‘내가 도울 필요도 없겠는데.’
살수들은 진희를 노리지 않았다.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이시영에게 달려들었지만, 그 모두를 박준이 차분히 격파하고 있었다.
확실히 B급이라 몸놀림이 남달랐다. 인터넷에서 간혹 보던 헌터들 전투 영상보다 빠르고 강력했다. 현대식 무술을 보는 건 진희도 처음이라 슬쩍 뒤로 빠져 제법 흥미로운 눈빛으로 전투를 지켜보았다.
“……응?”
그러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도련님 고개 들지 마세요!”
“으, 응!”
박준의 유효타는 천천히 쌓이고 있었다. 검을 들고 있던 살수는 가슴팍에 상처를, 창을 가지고 있던 살수는 허벅지를 찔렸다. 분명 승기는 박준에게 있었다.
이시영이란 짐을 지고서 안전하게 싸우고 있어 시간이 길어질 뿐, 박준의 본래 실력이라면 수 분 안에 결정이 났어야 할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적은 쓰러지지 않았다.
허벅지에 자상이 생긴 적은 움직임이 느려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빨라졌다. 상체가 난자당한 검사는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반대로 박준의 움직임은 느려지고 있었다. 본인은 못 느끼고 있을지 몰라도, 바깥에서 싸움을 구경하고 있던 진희의 눈엔 보였다. 박준의 움직임은 반 박자가 느려지고, 반대로 적들의 움직임은 한 박자가 더 빨라지고 있다.
“큭!”
또다시 볼트가 날아왔다. 이번엔 이시영이 아니라 박준을 노린 궤적.
박준은 황급히 허리를 숙여 피했지만, 하단에서 양쪽으로 찔러오는 검과 창을 다 피할 순 없었다. 어떻게든 창을 가로로 들어 내려찍는 검을 막아냈으나, 찔러오는 창을 막을 순 없었다.
어깨의 반 뼘가량이 창에 찔렸다.
이를 악물고 참아내, 발을 들어 적을 걷어찼다.
“허억!”
동시에 거칠게 빠져나가는 창. 박준이 이를 악물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더 깊게 찔렸다면 위험했을 부위였다.
‘……어디 있지?’
쉴 새는 없다. 다시 박준이 적들과 마주할 때, 진희의 눈은 전투가 아니라 주변을 훑고 있었다.
상처 입어도 흔들리지 않는 적. 반대로 상처 입을수록 약해지는 아군. 짧은 전투를 보고 진희는 돌아가는 상황을 완벽히 파악했다.
‘주동자는 누구냐.’
분명 존재한다. 이 인형들을 통솔하는 자가.
그리고 발견했다. 진희는 냉큼 바닥에 있는 돌 하나를 들어, 약초밭 한가운데를 향해 내던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