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기사와 헌터의 겸직 1화
0. 프롤로그
“아빠, 나 전생에서 기사였어.”
“엉?”
저녁 식사 시간. 아빠가 만든 괴멸적인 작품(요리)을 먹으며 그의 딸 진희가 말했다.
“정확히는 제국의 수도 방위 기사단 단장이었고 이름은 바제트였는데, 가주가 되던 날 남동생한테 독살당해 죽었어. 근데 그 기억이 이제 떠올랐네.”
“어…….”
진희는 습관처럼 건조한 두 눈을 비볐다. 그리고 숟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직장 때려치우고 헌터로 돈이나 좀 벌게. 아, 그리고 오늘 저녁 최악이야. 어묵국에 삼겹살이랑 고사리 넣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보양식 같지 않아?”
“먹다 탈 나.”
그럼 잘 먹었어. 진희는 자신의 식기를 들고 싱크대에 가져다 두었다. 오늘 저녁 당번은 아빠 차례다.
딸이 자리를 떠난 식탁을 멍하니 보던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야심작이었는데.”
1. 겸직
요즘 세상은 요지경이다.
세계 곳곳에 궤도 뒤틀림 현상이 발생하여 이세계와 이어진 게이트가 출몰했고, 그곳에서 나온 마나(MANA)로 지구의 인간들은 오염되었다.
마나를 느낀 인간들은 초인이 되었고, 국가는 그 초인들로 하여금 게이트를 닫거나 지구의 평화를 지키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하나의 직위를 주었다.
헌터(Hunter).
이세계의 괴물들을 사냥하는 존재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네.”
진희는 <헌터가 되는 법>이란 시답잖은 자기개발서 책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게이트가 열린 지 20년이 지났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진희는 어릴 적에 게이트가 열려, 게이트와 헌터의 존재가 곧 상식인 세계에서 자라왔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현실에 아무런 저항감도, 이상함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前生)의 기억이 떠오르니 이만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차원을 이어주는 마법보다 더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니. 전생에서 그녀가 살던 세계의 마법사와 학자들이 들었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뒤집어질 일이었다.
세계와 붙어 있는 정령계의 존재를 부르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 칭하는 판국에, 생판 모르는 세계가 갑자기 게이트를 열었다니.
게다가 연결된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정령, 마족, 마수,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까지 별의별 세계가 엉켜 있었다.
심지어 이놈의 세상은 이 사태에 익숙해져, 게이트 너머에서 자원을 캐 오거나 이세계 괴물들의 사체와 마석으로 산업혁명을 이루었다.
그 선봉장은 초인들, 헌터들이었고 곧 헌터란 직책은 떠오르는 유망 직업이 되었다.
마나에 선택받은 인간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었으며, 곧 누구보다도 존경받는 위인이기도 했다.
이세계의 괴물들에겐 지구의 무기가 통하지 않았다. 괴물들의 마석엔 자체적인 실드 기능이 탑재되어 있어, 마석과 같은 종류의 공격이 아닌 이상 그 가죽에 심한 손상을 입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지구의 학자들은 ‘사상 방어’라고 칭했고, 진희는 ‘마나의 축복’이라고 정의했다.
태생적으로 마나를 품고 있는 괴물이나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인간들은, 마나로 인한 공격이 아니면 어지간해선 죽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 아파트 서너 채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대형 괴물은 수류탄을 소나기처럼 맞아도 상처 하나 없을 것이다.
마나는 그만큼 불합리하다. 그렇기에 인간은 마나를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나를 다루는 헌터를 숭배할 수밖에 없다.
현대 인간들의 전쟁에선 군대와 병기가 아직 큰 힘을 발휘하겠지만, 이세계에 한해선 헌터가 곧 유일한 대응책인 셈이었다.
헌터의 처우, 민간인의 안전, 정치세력, 게이트가 열리고 온갖 사건이 있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은 제법 안정되었다.
눈치 빠른 국가에선 빠르게 헌터들의 조직을 재정립했고, 헌터 기업 혹은 조합을 만들기 시작했다.
게이트는 위협적이지만 그만큼 탐스러운 보물이었다.
괴물의 마석에서 나오는 에너지 방출량은 그 어떤 자원보다 효율이 좋았고, 괴물의 가죽, 치아, 혈액은 산업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주었다. 이세계의 식물 종자로 만든 거대 밀이나 새로운 과실들은 이미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게이트 덕에 인류는 위험에 빠졌지만, 헌터의 등장으로 이것이 역전되었단 이야기였다.
과학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세계의 경제는 이만큼 호황을 누렸던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대충 그런 내용이네.”
진희는 책을 덮었다. 책 내용은 하나같이 헌터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정작 헌터가 되는 방법은 ‘해당 인증 지점에 가서 헌터 인증을 받으세요’ 정도로 정리되는 2페이지의 내용이 끝이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읽지 말고 마지막만 읽을 걸 그랬나. 진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책을 책꽂이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은 서점이었다. 근처에 있는 헌터 센터가 마침 점심시간이라 시간을 보낼 겸 들렀던 곳이었다. 하지만 결국 영양가 없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낭비했다며 진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의 현 상황이나 찬양은 대중 매체에서 접한 걸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또 한편으론 헌터 제도가 가져온 문제점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헌터란 직업이 승승장구한다는 이야기는, 헌터가 아닌 사람들은 그만큼 빈부 격차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단 이야기였다.
진희는 서점을 나서며 헌터 센터로 향했다. 주변 상가 건물 사이에서도 월등히 높고 화려한 유리 건물이 눈에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진희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나요?”
“헌터 인증 때문에 찾아왔는데요.”
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차분히 안내했다.
“평가 신청서를 작성하신 후, 2층의 평가실로 향하시면 됩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겠어요?”
진희가 운전 면허증을 건네자 직원의 눈동자가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성인이 오는 게 드문가 보죠?”
“네? 아……. 네. 아무래도 그렇죠.”
직원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헌터로서의 각성은 보통 사춘기 때에 일어난다. 늦어도 고등학생 때. 성호르몬과 2차 성징의 시작 때문에 각성이 시작되는 건지, 아니면 별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인 이후에 헌터로 각성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마나 감응력이 너무 낮아서 평생 모르고 살다가 감지기에 걸리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직원은 진희가 그런 케이스인가 싶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진희를 위층으로 올려 보냈다.
건물 외관만큼 내부 또한 화려했다. 강철색의 바닥과 바깥이 훤히 보이는 벽, 복도 드문드문 있는 화분은 모두 생화다. 디퓨저도 없지만 복도를 가득 채우는 꽃향기에 마음 같아선 하나 꺾어 가고 싶었다.
진희는 2층 복도의 ‘감응력 평가실’이란 문패가 달린 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
“아,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커다란 강당이 그녀를 반겼다. 중앙에 공터를 두고, 네모난 패널이 그 중앙에 서 있었다. 푸른색의 얇고 커다란 패널은 마치 물이 차 있는 것처럼 빛을 난반사하며 주위를 밝히고 있었는데, 그 앞에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있는 사내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안녕하세요, 평가실 담당 헌터 나윤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진희입니다.”
“네, 헌터 인증을 위해 찾아오셨다고요?”
“네.”
윤수는 주변에 놓인 책상 위에서 패드 하나를 꺼냈다. 휙휙 뭔가를 넘기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서진희 씨, 나이는 만 22세이시고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두 번 다 감응력 테스트를 받으셨는데, 그땐 아무렇지 않았나요?”
“네. 마나를 느낀 건 최근이에요.”
“그렇군요…….”
흔하지 않은 일이다 보니 익숙지 않은지 몇 번이고 패드를 넘기다, 이내 윤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뭐, 직접 해보면 알겠죠. 그럼 이쪽에 와서 서 보시겠어요?”
윤수가 진희를 패널의 정면을 보는 자리로 안내했다. 바닥에 발바닥 표시 스티커가 있는 곳에 서자, 문득 강당 구석에 어떤 사람이 있음을 눈치챘다. 한 사내가 의자에 앉아 멀뚱히 이쪽을 보며 과자를 먹고 있었다.
“…….”
“…….”
와작와작, 과자를 먹는 소리만이 조용한 강당을 울렸다.
“아, 그……. 저분은 신경 쓰지 마시고 하세요.”
“……네.”
윤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진희의 시야를 가렸다. 진희는 윤수의 상사나 그런 사람일까 싶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아, 이제 이 투명막이 진희 씨의 몸을 훑어갈 겁니다. 이때 맞춰 체내의 마나, 마력을 끌어올리시면 되는데,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총 다섯 번 반복하니까 침착하게 하시면 됩니다.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은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마법을 쓰시거나 신체를 강화하셔도 무방합니다. 대신 최선의 힘을 다해 써주세요. 그래야 감응력을 최대치로 잡아 등급이 높게 측정되니까요.”
“……선생님은 등급이 어떻게 되나요?”
“저요?”
윤수가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전 B급이에요. 음, 국제 기준으론 B급, 한국 기준으론 2급이네요.”
생각보다 높은 등급에 진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놀란 모습에 윤수가 헤헤 하고 실없이 웃어 보였다.
B급이라고 하면 어지간한 중소기업에선 간부급 헌터고, 노력으론 도달할 수 없는 등급이었다.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나이에 B급이라, 어지간한 엘리트인가 보다.
‘그럼 딱 저 정도 아래 선으로 잡아야겠네.’
진희가 기억 속의 ‘바제트’를 떠올렸다. 기사로서 사용했던 마나 호흡법을 하며, 천천히 신체를 강화했다. 그녀의 눈엔 윤수의 가슴팍에 자리 잡은 마나홀의 수준이 어림잡아 보였다.
“자,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