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여왕의 힘을 그 신체에서 빼내는 속도가 아주 빨라졌다. 가슴에 차오르는 묘한 따스함 때문일까. 세 사람이 아니었다면 포식자의 사체를 먹는 최악의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지호는 보현 외에도 자신에게 남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재차 되새기며 에너지를 다루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포식자에게서 얻은 정신계 능력 덕분에 에너지가 보급되는 것만으로 여왕의 영향력에 충분히 저항할 수 있었다.
여전히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본래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했으나 도훈과 지호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버거운지 여왕은 좀처럼 지호의 몸을 차지하지 못했다. 고무적인 일이었다.
여왕의 거체는 마정석이 만들어지는 곳에 가까운 부분부터 부서졌다. 특히 다리는 이제 거의 없는 것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날개와 다리를 잃은 여왕은 무수한 팔들로 곤충처럼 바닥을 기며 지호를 공격하려 했다. 막을 수 없다. 맞으며 버틸 수 있을까? 지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충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공격이 들어오지 않는다. 슬며시 뜬 눈으로 지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낯설고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도준우? 언니는 어떻게…….”
“어떤 헌터들이 왔어. 내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임보현이 지키려 하던 놈을 지켜야지.”
여왕의 공격을 교묘하게 쳐 낸 준우의 얼굴은 야차에 가까웠다. 그가 자기 몸을 돌보지도 않고 그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을 본 지호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 흘리던 보현의 모습이 떠올랐다. 홀로 막아 내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공격에 순식간에 바닥까지 처박힌 도준우는 부러진 팔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다시 튀어 올랐다.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몇 번의 교전.
에너지 폭풍 때문에 바람 소리가 미친 듯이 휘몰아치고 있었기에 조금만 멀어져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 와중에 도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본디 듣기 어려운 소리였겠지만, 신체 계열 능력자 특유의 청각으로 그가 내지르는 소리를 들은 지호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그는 여왕을 향해 보현을 살려 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머리를 때리는 충격에도 지호의 무의식은 착실하게 마정석을 빚어냈다. 준우가 모든 공격을 자기 등이나 다리, 팔로 쳐 내고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보현의 몸이 흔들린다. 지호는 눈으로는 그들을 쫓으며 여왕의 에너지원이 반쯤 뽑혀 나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막대한 에너지다.
보현의 죽음이 너무 큰 충격이 되어 지호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그 때문에 지호의 몸은 오히려 착실하게 하던 행동에 집중했다. 다른 쪽으로 소모되는 것은 정신뿐이다. 영혼이 깎여 내려가는 기분.
죽기는 누가 죽어.
한때 그의 구원자였던, 그리고 내내 그의 버팀목이 되어 준, 단 한 번도 지호의 앞에서 물러났던 적 없었던 이가 일어나지 않았다. 지호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 어떤 말도 명확한 단어로 튀어 나가지 못했다.
여왕에게 몸을 빼앗겼을 때는 버틸 여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겨울바람 앞에 맨몸으로 선 기분이다. 본디 멀쩡한 무릎이 푹 꺾이는 듯한 기분. 지호는 간신히 버텼다.
여왕의 몸 상당수가 마정석으로 화해 사라지자 빠른 속도로 쌓인 이형 에너지들은 그 축적량이 소모량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도훈이 바로바로 써 가며 막아 내야 했던 것이 차츰 약해졌으니 더더욱 그랬다. 빨아들인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자 폭풍이 천천히 잦아든다.
시야를 가로막던 기상 현상이 가라앉자 네 사람이 보였다. 쓰러진 보현과 사방을 날아다니는 온갖 것을 막아 내려 방벽을 유지하고 있는 하나, 그곳까지 그들을 데려간 소민, 그리고 보현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지윤까지.
준우는 미약하게나마 치유 계열 능력을 갖춘 능력자다. 그가 단순한 이유로 보현을 포기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연신 불안이 지호의 몸을 타고 올랐다.
“여왕을 먹어, 이지호.”
도준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신체가 차근차근 분해되는 동안 지호를 향해 퍼부어진 폭력들을 감내한 도준우는 거의 살아 있는 것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지호는 세상 무엇도 압도할 수 있을 에너지를 손에 든 채 준우를 응시했다.
“그렇게 하면 언니가 돌아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돌아오나? 나보다는 네가 가능성 있어. 네가 놈의 힘을 더 빠르게 습득할 수 있고, 저 녀석을 다시 눈뜨게 할 가능성도 네게 있잖아. 못 하겠으면 나라도 한다. 놈을 먹겠어.”
“내가 여왕의 몸을 먹으면? 내 안에 들어 있는 놈의 정신과 어떤 상호 작용이 있을지는 생각 안 해?”
“네가 힘을 얻는 만큼 위협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모든 괴물은 다른 놈을 먹을 때 그런 위험을 감수해. 위험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거기 딸려 오는 위험이 너무 커. 그런 도박은 하지 않아. 정신 차려. 코앞만 보느라 뒷일 생각도 않는 머저리 짓 하지 말라고.”
지호는 침착하려 노력했다. 멀쩡해 보였던 도준우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지껄여 댈 만큼 맛이 가 있고, 한때 지호에게 조언을 해 주었던 많은 이들은 곁에 없다. 이제 내리는 모든 결정은 지호 책임이었다.
어깨가 무겁다. 여왕의 힘이 매력적인 건 사실이고, 그걸 얻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지호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선택으로 눈을 돌렸다.
도훈과 지호의 합작 덕분에 여왕은 본디 팔이나 어깨, 정강이나 꼬리로만 이루어진 생물로 보일 지경까지 나누어져 있었다.
여왕의 허리는 진작 절단되었고 팔꿈치나 다리 일부, 꼬리 같은 부속지들이 각기 산 생물처럼 퍼덕인다.
여왕의 의지가 느껴지며 공격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머리뿐이었다. 다른 부위는 마치 괴물들이 자신의 몸을 잘라 냈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각기 다른 존재가 된 듯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싫다면 내가 해.”
석상이라도 된 듯 멈춘 채 지호를 노려보던 준우가 번개처럼 움직였다. 지호는 가까스로 그 속도를 따라붙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여왕의 신체를 뜯으려던 준우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들고 있던 것을 놓쳤다.
“멍청한 짓 하지 마.”
지호는 여왕을 먹지도 않았고, 도준우가 그걸 먹게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멀쩡해 보이는, 혹은 힘을 일부 담고 있는 신체 부위들이 일시에 거대한 힘에 눌러 밟히듯 납작해졌다.
짓밟히거나 뭉개지고 밟히거나 터진 신체 부위들은 곧 망가져 살아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것들이 흡수되자 마정석은 더더욱 크기를 키웠다. 도준우는 이를 악물었다.
“괴물과 어울리더니 멍청해졌어? 내가 여왕을 먹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여왕에게 협조하는 길이 될 수도 있어. 나는 그 일말의 가능성까지 빼앗을 거야. 이것이 괴물들이 가장 바라지 않는 최악의 죽음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네가 먹어 봐야 먹히는 건 당연한 순서일 거고.”
“임보현을 살려 줘.”
그럴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그를 무너뜨리기 충분한 슬픔과 절망 속에서 지호는 보현이 가장 사랑하던 이를 걷어찼다. 상태 멀쩡하지 않은 몸이라 준우는 그걸 보고서도 피하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괴물의 방법으로 언니를 살리면, 언니는 절대 기뻐하지 않을 거야. 아마 엄청 화낼걸.”
각성자는 괴물과 다르지 않은 몸이다. 그럼에도 지호는 그들이 전혀 다른 존재라고 믿었다. 언제나 그렇다. 지호가 각성자가 아닌 시절부터 배웠던 견고한 믿음.
이런 상황일수록 사람답게 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법이 무너지고 질서가 어지러워져도 규칙을 지키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들의 발버둥이 그들을 사람으로 만드니까. 심지어는 인간의 기준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미증유의 재난 속에서도, 지호는 사람답게 살려는 노력이 그들을 사람으로 남게 해 준다고 믿었다.
죽었던 사람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했던 첫 만남 때보다 훨씬 죽은 눈을 하고 있던 도준우를 내려다본 지호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듯이 강하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 도준우. 언니가 마지막까지 너한테 실망하게 할 셈이야?”
“저 녀석이 없으면 난 더 이상 너희와 협력할 이유가 없어.”
“안 하면 어쩌게? 이제부터 우릴 공격하기라도 할 셈이야? 그 잠깐의 힘으로 언니를 살릴 방법이 있다 해도, 그 후에 여왕이 깨어나 버리면 정말 가망 없어. 그걸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잖아, 너. 그냥 아무 소리나 되는 대로 뱉는 거잖아. 정신 똑바로 차려. 나는 언니를 그런 지옥으로 두 번 밀어 넣을 수 없어.”
지호 안에 여왕의 호위대가 남아 있고, 또 그 이전에 죽은 이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처럼. 여왕은 언젠가 다른 것의 몸을 통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호와 같은 헌터가 없을 것이며, 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해 줄 도플갱어 역시 없을 것이다. 보현이나 김 반장 같은 뛰어난 능력자들까지 없다면 더더욱 최악이겠지.
“언니는 끝까지 나를 지키려고 했어. 자기조차 돌보지 않았다고.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언니의 선택에 먹칠하려고 해? 네가? 감히?”
“역시 너를 죽였어야 했어.”
“나를 죽여서 언니가 돌아온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해야 할 일을 할 시간이야.”
지호의 눈이 설핏 붉어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여왕의 정신체가 그의 내부를 요란하게 들쑤시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괴롭거나 견디기 어렵지 않다. 지호는 이제 그것에 어렵지 않게 대항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신체가 완전히 죽어 버린 것을 깨달은 여왕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지호가 여왕의 정신을 온전히 마주하고도 멀쩡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여왕에게 남은 것은 머리뿐이었다. 그 몸에서 빠져나온 에너지들은 곧 자신의 주인이 죽어 간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처럼 반항을 멈추었다.
아니야. 이럴 수 없어. 나는 이미 한 번 죽음을 피했다. 감히 너 따위 하찮은 것이 내게 이럴 수는 없어! 감히 내게서 비롯된 것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여왕은 허우적거리며 자기 머리를 변형시켰다. 머리에서 길게 돋아난 다리들이 거미처럼 그 머리를 운반했다. 그러나 지호는 놈을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네 목숨값으로는 너무 과했어.”
도훈의 몸은 더는 빛나지 않는다. 보현은 죽은 듯이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다. 지호는 고개를 떨구었다. 지켜야 할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며 버티던 때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왕에게는 산 채로 뜯겨 죽는 형벌조차 부족해 보였다.
그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존재에게, 이토록 평온하고 손쉬운 죽음은 사치스러운 것이 아닌가?
새로이 얻게 된 가족이었다.
설령 보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도, 한 집에서 한 공간을 공유하며 같은 일을 하며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이를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지호는 성난 눈으로 여왕을 노려봄과 동시에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었을 보현이, 지호를 위해 온 힘을 쏟아 내고 거기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 유쾌한 시선이 다시 지호를 향하는 일이 두 번 다시는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의 형제들을 속이고, 만들어 낸 이를 속이고, 나아가서는 친구까지 속여 가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낸 도훈의 죽음은 조금 덜 슬픈가? 알 수 없었다. 지호는 끝끝내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바라 마지않던 것이 죽음이라면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 주는 편이 옳지 않을까.
여왕의 몸에 속해 있던 도훈의 몸 역시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의 형태가 사라져 가자 그제야 이형 에너지 폭풍이 멈추었다. 이형 에너지로 화하여 마정석 덩어리 일부가 되어 가는 도훈을 본 지호는 기묘하게 가슴 한쪽이 뻐근해 옴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도 여왕은 달아나기 위해 자기 부속지를 끼워 맞추고 있었다.
지호는 여왕의 본체가 왜 그토록 어울리지 않는 부위들이 모여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자기 몸이었던 부위뿐 아니라 주변에 떨어진 포식자들의 사체까지 탐내는 모습을 본 지호는 그것이 어떤 지배자의 품위 있는 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것은 사냥이었다.
괴물 잡는 헌터의, 익숙하고 당연한 사냥.
“도망칠 거야? 이 하찮은 인간한테 당해 놓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며 죽은 자식들 살덩이나 주워 먹는 것이 여왕의 품위인가?”
여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그럴 수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발성 기관이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 대신 여왕은 익숙한 정신 언어를 날카롭게 발했다.
나보다 강하지도 않은 것이! 질서를 어지럽혔어!
“네가 내게 죽어 가는데, 이제 내가 더 강한 거 아닌가? 이긴 사람이 법칙을 정하는 거야. 아주 당연한 원리지.”
내가 세운 규칙은 그런 것이 아니야!
“왜 우리가 네 규칙을 따라야 하지?”
내게서 비롯된 힘으로 너희 또한 힘을 가졌잖아! 이제 나를 내버려 둬! 너는 이미 너무 많은 나를 가져갔잖아! 그건 삶의 순환도 아니야. 차라리 나를 먹어!
지호는 여왕의 정신을 들여다보았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압도적이었던 것은 자기 몸이 줄어든 것만큼이나 보잘것없는 형태로 전락해 있었다.
그가 내내 외면하던 자신 속 여왕의 정신에 주의를 기울인 순간 정신이 쑥 빨려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일전에는 느끼지도 못하고 휘말렸던 바로 그것이다.
여왕의 신체는 사냥에 적합하지 않았고, 그에게 바치는 것만을 취해 왔으니 신체적으로 강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착취하기 위해 정신계 능력이 강해진 것 역시도.
지호는 여왕이 만들어 낸 최후의 환상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