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단창 끝에서 시퍼런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도훈을 향해 빨려 들어가던 이형 에너지 폭풍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며, 지호는 여왕의 몸 그 자체의 힘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극도로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눈앞이 눈물 때문에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차피 보이지 않던 몸, 이제는 기억 속에만 남은 얼굴. 다시는 볼 수 없는 웃음 같은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빠져나오기를 거부하던 힘이 지호의 인도를 따라 느릿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날뛰던 에너지 폭풍이 더더욱 격렬해진다. 도훈과 여왕의 싸움일까? 그의 몸이 곧 꺼질 바람 앞 불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지호의 몸을 휘저으며 극심한 고통을 주던 가시는 기어코 그의 팔을 뚫고 빠져나갔다. 옆구리를 타고 흐르는 피로 허리 아래가 뜨끈해졌다. 치료로 주의를 돌릴 수 없었다.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려는 찰나, 뒤에서 다급히 그의 눈을 덮는 손이 있었다.
“지호 씨, 망할! 안 늦었죠? 안 늦은 거죠? 아직 여왕에게 넘어간 거 아니죠?”
보현이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 폭풍 너머에서 준우가 반쪽짜리 이야기를 전해 준 것인지 도훈의 정신이 그쪽에도 말을 건 것인지 확실치 않다.
둘은 맨몸으로 에너지 폭풍에 저항했다. 보현은 지호 안에서 튀어나오려는 여왕의 정신을 제어하는 것으로 힘에 벅찬지 방벽을 포기했고, 덕분에 준우와 보현은 거의 휘날려 가기 직전인 꼴이 되어 지호 뒤에 바짝 붙었다.
준우가 여왕의 부러진 갑각에 자기 발을 찔러 넣은 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던 지호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온 힘을 집중했다. 버텨 줄 거라고, 버티지 않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모두가 악을 쓰며 발버둥 친다.
산 몸에서 이형 에너지를 뽑아내 마정석을 만들어 내는 건 지나치게 힘을 요하는 작업이다. 땀은 흐를 새도 없이 폭풍에 휘말려 날아가 버리고, 마정석 추출 작업 때문인지 여왕의 몸에서 일어나던 진동이 거칠어졌다.
곧 깨어날 것처럼 떨리는 신체 때문에 준우는 온 정신을 놈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여차하면 보현을 들고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한 탓일 것이다. 보현을 바짝 끌어안은 팔에 다시는 놓을 생각 없단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지호는 솜사탕을 뽑듯이 느릿하게 팔을 돌리며 단창을 위로 치켜들었다. 여왕의 몸에서 뽑혀 나오던 에너지에 박차가 가해지기 시작하고, 보현은 거의 모든 힘을 쏟아 내느라 더는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지호에게만 매달렸다.
단창 끝에 맺히기 시작한 마정석은 점점 그 크기를 불려 나가기 시작하더니, 곧 가속도가 붙은 것처럼 세차게 커졌다. 창을 매개체로 거꾸로 된 고드름처럼 길게 붙은 마정석은 순식간에 몇 미터쯤 솟아오르더니 곧 그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두족류의 것이었던 다리가 녹아내린다. 온갖 포식자의 날개를 이어 붙였던 등짝에서 날개들이 떨어지고, 무수한 팔 중 일부가 추락했다. 연결부가 녹아내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하게 지면을 뒤흔든 것들은 곧 형체가 뭉그러지며 이형 에너지로 화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럴 수 없어. 감히 내게 죽음을 내릴 수 없어! 고작 인간 따위가!
여왕의 목소리가 머리를 쪼갤 것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나 여전히 지호의 머릿속이다. 지호는 그가 새로이 얻게 된 포식자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했다. 주변을 휘몰아치는 이형 에너지의 폭풍은 지호에게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한히 에너지를 공급해 주었다.
“너는 도훈 씨한테 진 거고, 나한테도 진 거고, 사람에게 진 거야.”
앞이 보이지 않는 와중이었으나 지호는 꿋꿋이 할 말을 뱉으며 팔에 느껴지는 무게감을 느꼈다. 마정석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지호에게서 빠져나갔던 가시는 폭풍에 휘말려 꽤 오랫동안 허공을 날아다니다가 벽에 박히기 무섭게 진흙으로 빚은 것처럼 바스러졌고, 동시에 여왕의 본체가 번쩍 눈을 떴다.
어리석은!
지호를 향해 휘둘러진 팔은 그에게 닿기도 전에 에너지로 화해 마정석의 일부가 되었다. 여왕은 산 채로 뜯겨 나가는 생경한 공포에 발악하며 다리와 팔들을 휘둘렀으나 그의 일부가 된 도플갱어가 벌이는 공작으로 공격은 온전히 들어가지 않은 채 빗겨 나갔다.
여왕은 분노로 괴성을 질렀다. 온몸이 다 저릿해질 정도의 소리. 인간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낮고 높은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진다. 신체 계열 능력자가 아닌 보현이 제일 먼저 녹다운됐다. 지호는 자기 눈을 누르고 있던 손이 스르륵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언니!”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을 등한시한 채 지호의 정신을 보호하는 일에만 온 힘을 쏟아 버린 보현은 결국 준우의 품에 안긴 채 늘어졌다. 그와 눈이 마주친 지호는 당황했다. 무생물에 가까울 정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도준우의 눈에 드러난 건 공포였다.
단순한 기절로 그런 반응이 올 턱이 없다.
보현의 귀와 입가로 피가 흘렀다. 죽은 것처럼 늘어진 몸. 지호 역시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추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충격 때문에 더더욱 필사적으로 하던 일에 매달렸다. 그 순간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으니까.
당장 보현을 살필 수 없다. 살핀다 해도 그 미약한 치유 능력으로 그를 구할 수도 없었다.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보현이 저렇게 되자 가뜩이나 온 힘을 다하고 있었음에도 더더욱 초조함이 밀려왔다.
여왕에게서 뽑혀 나오기 시작한 마정석은 거의 대형 차량 크기에 버금갈 크기로 굳어 가기 시작한다. 이걸 놓으면 이 모든 에너지는 빠르게 여왕에게 돌아갈 것이고, 지호는 도훈의 목숨을 바쳐 얻어 낸 기회를 흙바닥에 처박게 된다.
“언니를, 언니를 데리고 가!”
“어디로?”
헌터들이 있는 곳, 치유 능력자가 있는 곳으로! 지호의 생각은 말로 바뀌어 나가지 못했다. 이형 에너지 폭풍이 더더욱 거칠게 휘몰아쳤다. 도훈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인 현상에 준우는 속절없이 휩쓸려 갔다. 그 내부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 지호가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왕의 몸이 무너져 내린다.
강한 것들로 기워 만든 몸. 존재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의 경외와 두려움을 받던 몸이 무너졌다. 지호는 자기 안에서 여왕의 정신체가 사방을 찢어발기며 난폭하게 날뛰는 것을 느꼈다. 아직 지호 안에 있기에 본체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보현의 힘이 사라지자 여왕은 빠르게 자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곧 지호를 빠져나갈 것이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그러나 대항할 힘이 없다. 지호의 눈이 붉은빛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어 가자 지호는 좌절 속에서 살길을 찾아 주변을 헤맸다. 여왕에게서 뽑아낸 힘은 아직 여왕에게 속한 것이라 지호의 것으로 쓸 수 없었고, 주변을 휘몰아치는 에너지는 도훈이 여왕에게 저항하는 것에 사용하고 있어 더더욱 손대기 어렵다. 그토록 밀도 높은 이형 에너지 속에 있어 본 일이 없는데도 지호는 에너지 부족으로 허덕였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죽은 괴물들의 몸이 남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벼락같은 깨달음.
타의에 의해 괴물을 씹어 삼켰던 기억이 지호의 등을 떠밀었다. 저걸 먹으면 힘을 가질 수 있다. 괴물들이 그러하듯, 강해질 수 있다.
반쯤 만들어진 마정석을 들고 바닥을 향해 유성처럼 떨어진 지호는 거기에 남아 있는 포식자들의 사체에 손을 처박았다. 머리가 빠르게 상황을 분석했다. 이건 먹을 수 있는 것, 저것은 먹을 수 없는 것.
지호의 손이 무의식중에 포식자의 사체 중 먹을 수 있는 부위를 집어 들었다. 보현이 죽는다. 지호의 힘이 부족해 보현이 죽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공포와 두려움이 지호의 이성을 후려쳤다. 실낱같은 정신이 그러지 말라고 속삭이는 와중에 지호의 떨리는 손이 그것들을 그 입가로 가져갔다.
“안 돼!”
도준우조차 버티지 못하고 날려 가 버린 폭풍 속에서 익숙한 음성과 함께 세 사람이 덩어리째 나타났다. 날려 오던 속도 그대로 지호에게 그들을 내던졌기에 하마터면 마정석을 놓칠 뻔한 지호는 자신이 무엇을 입에 넣으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리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여기에 어떻게?”
“아, 망할! 뒈질 뻔했다고요! 진짜 몇 번이나 뒤져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알아요? 사실 한 번 더 뒈졌을지도 모른다고! 오다가 놀라서 심장 밟아 터뜨린 것 같은데!”
긴장하고 흥분하면 횡설수설하는 지윤 특유의 목소리가 지호를 현실로 끌어왔다. 그는 자기가 쥐고 있던 포식자의 살점을 툭 떨어뜨렸다. 괴물에게 지배당하지도 않는 와중에 무슨 짓을 하려고 했나.
하나의 방벽이 종잇장처럼 얇아졌고 지윤의 안색도 눈에 띄게 창백하다. 소민은 지나친 이동 능력 사용으로 갓 태어난 염소처럼 후들거리고 있었으나 아무튼 셋 모두 지호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그를 붙잡았다. 지윤의 과격한 욕설을 뒤로한 하나가 지호를 들여다보며 간절히 말했다.
“지호 씨. 거의 다 왔어요. 진짜 힘들게 버텼잖아요. 아까 지호 씨 눈 새빨갛게 변했을 때 또 여왕한테 몸 뺏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잖아요. 우리가 너무 늦었죠? 그래도 잘했어요. 버텼잖아요. 여왕한테 다시 몸을 빼앗기지도 않고 이렇게 버텼잖아.”
“하지만 언니가, 언니가…….”
지호의 시선이 지윤에게 돌아갔다. 하마터면 무의식중에 괴물들과 같은 선택을 할 뻔했던 지호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언니가 다쳤어요. 치료해 줘요.”
“뭐라고요? 여기서 어떻게 임보현 헌터를…….”
“언니가 살아야 해요. 언니를 살려야 해요.”
지윤은 그 간절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다. 여기서 지호가 인간의 모습을 반쯤 탈피한 채로 인간들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유의 꽤 큰 지분이 보현일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던 병아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민은 떨리는 손으로 지호를 꽉 끌어안은 다음 반쯤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가 가서 임보현 헌터님을 찾을게요. 그리고 이거. 지호 씨 전투복에 쪼금 들어 있던 건 다 썼어요. 이건 남의 거.”
소민은 주머니 이곳저곳에서 소량의 마정석을 꺼냈다. 하나와 지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윤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악을 썼다.
“협회에서 게이트로 이어지는 에너지를 끊어 버려도 이쪽에서 게이트를 열 수 있도록 예비해 둔 마정석들이에요. 솔직히 말도 안 하고 들고 와서, 저쪽에 무슨 일 있으면 우린 진짜 쓰레기 되는 거예요. 근데, 근데요. 저기 있던 사람들 몇 명 돌아가는 것보다 이게 중요할 것 같았어요. 지호 씨가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게, 지호 씨한테 아무 일 없는 게. 그래서 여왕한테 한 방 먹여 줄 가능성을 지켜 내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았다고요. 무슨 말인지 알죠? 이길 수 있는 거죠?”
“노력할게요. 언니를, 언니를 살려 줘요.”
셋은 지호를 꽉 끌어안았다. 지호가 턱짓으로 가리킨 쪽은 보현과 준우가 날아가 버린 쪽이다. 그 폭풍에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시각각 생명력이 깎여 나가는 얼굴을 하고 있던 하나는 다시 방벽 유지에 집중했다. 소민이 창백한 얼굴로 좌표를 확인한 뒤 그들과 함께 이동해 갔다.
소민이 떠난 뒤 본디 남는 이동 능력자 특유의 에너지는 금세 도훈에게 빨려 들어갔다. 지호는 친구들이 남겨 준 마정석에서 허겁지겁 에너지를 빨아들였다. 서둘러 취하지 않으면 이 폭풍에 휘말려 갈 것이다.
산 몸에서 강제로 빼내야 하는 여왕의 에너지들과 달리, 주인을 잃은 지 오래된 힘들은 순순히 지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다시금 힘이 차오른다. 다른 괴물들이 그러하듯, 그것들을 먹어 삼켜 그들처럼 살지 않아도 할 수 있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방법이 있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