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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252화 (253/260)

252화

그 힘은 일시적인 증폭에 불과해. 다른 놈을 먹고 새 힘을 얻을 때는 종종 그렇거든. 차츰 익숙해질 거고, 그러면 이제 그 힘을 네 것처럼 쓸 수 있게 되겠지. 놈이 원래 살아 있을 때만큼 노련하진 않겠지만, 그게 일반적인 힘의 습득 경로야.

꽤 쓸 만한 조언이다. 지호는 자기 머릿속에 있는 도훈의 정신체가 또렷이 느껴지는 것을 낯설게 여기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 안에 있는 게 진짜예요, 저기 여왕에게 처박힌 게 진짜예요?”

나는 언제나 너한테 진심인데, 우리 지호.

“이럴 때까지 헛소리하지 말고 정확히 이야기해요.”

여왕 쪽에 좀 더 많은 나들이 들어 있지. 알다시피 나는 좀 특이한 케이스라, 나를 쪼갤 때 나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거든. 그래서 이쪽에는 헌터였던 내가, 저쪽에는 괴물이었던 내가 나뉠 수도 있어. 최악의 사태는 나와 내가 싸우는 일이겠지.

다른 괴물들이 자신을 쪼개어 균열을 나가려 했을 때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말했던 도훈의 이야기가 새삼 머리를 스쳤다. 지호가 떠올리는 기억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도훈의 정신이 그의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동의를 표했다.

일부러 임보현을 부른 거야. 네가 진짜 여왕에게 넘어가 버리면 그 안에 갇힌 너를 불러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저 헌터일 테니까. 나름 비장의 카드였는데 상황이 너무 나쁜걸.

“저 폭풍을 멈출 수 없어요?”

여왕 주변의 이형 에너지를 역으로 이용해서 여왕의 힘을 억누르고 있는 거야. 저걸 멈추는 순간 네 안에 처박힌 여왕의 정신체가 바로 빠져나올걸. 여왕이 자기 몸으로 돌아가 포식자들의 시신을 집어먹는 순간 바로 게임 끝이야.

“생각보다 버틸 만한데.”

저 에너지를 다루는 게 나니까. 다른 둘은 오래 못 버틸 거야. 최대한 빨리 끝내지 않으면 위험할 수도 있어. 이 에너지는 결국 여왕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이걸 잘 다룰 수 있는 것도 나보다는 여왕 쪽이지. 내가 그의 기억이 있기에 쓸 수 있는 편법도 놈의 정신이 본체로 돌아와 완전해지면 당연히 사용하지 못하게 돼.

도훈의 정신이 발하는 언어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느껴졌다. 반강제적으로 얻게 된 이름 모를 포식자의 힘 덕분에 지호는 자기 안에서 도훈의 정신을 원하는 대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도훈은 언제 입을 다물었었냐는 듯, 느릿하고 확실하게 선언했다.

나는 네 안에 너무 오랫동안 내 정신을 심어 놨어. 나는 너를 무수한 나들 중에 하나로 여겨. 임보현에게는 그런 이유로 네 몸을 차지할 거라느니 하는 말을 흘렸지만……. 아마 안 될 거야.

지호가 손에 쥔 가시는 단창처럼 길어졌다. 지호의 의지가 흘러가는 대로 모습이 변하는 무기. 포식자의 마지막 목적을 위해 여왕을 향해 움직이며 지호는 창을 쥔 손을 내뻗었다. 이형 에너지 폭풍이 창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쫙 갈라졌다.

“당신이 죽어 가고 있어서?”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놈이거든. 이미 나로 생각되는 너를 어떻게 해칠 수 있어? 또 다른 나를 위해 앞길을 예비한다면 모를까.

“그건 이상해요. 나는 당신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껴. 나 자신은 언제나 나의 첫 번째 친구이자 조력자인 법이잖아. 죽어 가는 내가 산 나를 위해 남은 힘을 다 바치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지호는 이를 악물었다. 이형 에너지 폭풍을 타고 온갖 것이 다 휩쓸려 왔다. 눈도 제대로 뜨기 어려운 바람 속에서 흘러가는 에너지들로 자신을 보호할 방벽을 만들기 시작한 지호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렇게 죽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여왕을 물리치고, 사람들 사는 곳으로 넘어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균열 건너편에 세워지는 도시에 당신 자리도 있을 거라고요. 다른 사람들이 반대해도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러니까 죽겠다고 하지 말아요!”

대답이 들려오는 대신 움직이는 것이 좀 더 편해졌다. 도훈의 힘으로 일어나는 폭풍이다. 자기 자신의 힘에 휩쓸리는 멍청이는 없는 법이며, 지호는 그 에너지들이 자신을 위해 순순히 길을 열어 주는 것을 느끼며 울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지호가 여왕의 본체 앞에 도착했을 때, 그 몸에 파묻힌 도훈의 몸은 새까만 연기에 덮여 거의 보이지 않게 된 후였다.

퀸 패러사이트의 마지막 호위대가 너를 도울 거야. 그래야만 놈이 지키려 하는 그 헌터가 살 수 있으니까. 공교로운 우연이지만, 내겐 잘된 일이었어. 놈의 힘의 근원이자 그 주인의 명을 어길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임보현의 목숨이었거든. 그걸 취하려 하건, 이용하려 하건. 당연히 너는 반대했겠지. 내가 이렇게 이기적이야. 아무리 네가 나들 중 하나로 느껴진다 해도, 네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까지 애틋하게 느껴지진 않거든.

“처음부터 언니를 이용할 생각이었어요?”

네 기억 속에서 놈을 본 그 순간부터 세운 계획이야. 퀸에게 몸을 내주면 당연히 들킬 계획을 놈과 함께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나는 이중적인 의미로 말해야 했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을 취해야 했어. 계획대로 퀸 패러사이트가 놈의 몸에 깃들었을 때 그 기억을 온전히 훑어볼 상황은 아니었지. 너희와 싸워야 했으니까.

지호는 당황과 분노가 속에서 부딪치는 것을 느끼며 이제는 형체조차 다 뭉그러진 도훈을 노려보았다. 미워하려 해도 얼굴을 마주 볼 수 없고, 분노를 표하려 해도 이미 그에게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지호 본인을 위해 행동하고 희생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 지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눈을 굴리다가 도훈이 들러붙은 부위가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본디 일반적인 생물은 한 가지 형태를 가진다. 그러나 여왕의 신체는 기형적이라고 해도 이상치 않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부자연스러운 접합부에 혹처럼 솟아난 도훈은 여왕의 구조를 효과적으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물론 지호가 거기까지 알 수 있을 턱이 없으나, 도훈의 지식이 흘러들어 오고 있어 미약하게 추측할 수 있었다.

여왕은 분명 강한 존재지만, 본디 강한 것들의 강한 부분들을 기워 만든 것 같은 몸을 갖고 있었다. 지호는 여왕이 그 위협적인 신체들을 동시에 다루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포식자들을 그토록 피하려 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누구보다 강한 존재인 줄 알았던 여왕조차 완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지호가 그런 추측을 떠올리기 무섭게 여왕의 본체에 묻혀 있던 도훈의 몸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지호는 황급히 거기 손을 얹으려다 멈칫했다. 아까처럼 여왕의 본체가 다시 깨어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웠던 탓이다.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도훈이 긍정했다.

맞아. 우리 지호 금방 배우는데.

“만지지 못하면 어떻게 떼어 내요?”

누가 떼어 달라고 했어?

“그럼 어떻게 하란 거예요! 날 여기 왜 불렀어요. 도와달란 거잖아요! 여왕 물리치는 걸 도와달라고, 그러니까…….”

아니야. 네게 마지막 요청을 하려고 부른 거야.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네게 내 목숨을 주겠다고 했었잖아.

너무 어처구니없이 튀어나온 요구사항에 지호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폭풍이 요란하게 휘몰아쳤다. 여왕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 없어. 내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 봐. 필요한 순간이 올 거라고 했잖아. 네게 하기엔 너무 잔인한 부탁이 되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할 수밖에 없어. 나를 죽여야 해.

“당신을 죽인다고 여왕이 죽는 것도 아니에요. 개소리 작작하고 상황 타개할 방법이나 생각해 보자고요. 잘 모르겠어요. 나도 모르겠고 당신도 사실 모를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 있을 거라고요. 죽느니 마니 하는 그런 소리가 아니고!”

여왕을 막기 위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너는 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야, 지호야. 괴물이 괴물을 먹어 다음 생을 이어 가는 것 말고 너희의 방식으로 죽음을 내려 줘.

지호는 충격과 분노 때문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감정이 너무 격해졌으나 마치 본래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세워지는 정신 방벽이 지호를 냉정하게 만들었다.

“내게 죽여 달라고 하기 위해 여기까지 날 부른 거였군요.”

다른 놈들은 불가능해. 버티는 것조차 무리잖아.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지. 너는 곧 나니까. 내 힘에 밀려나거나 위협받지 않으면서 나를 죽여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친구라고 했잖아요. 누가 친구한테 이렇게 잔인한 요구를 해요?”

여왕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지호는 자기 팔에 꽂혀 있던 가시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빠져나가려고 비틀어지는 것을 느끼곤 그것을 꽉 붙잡았다. 자신을 상하게 하는 꼴이지만, 그렇게 해야 했다.

동시에 도훈이 여왕을 억제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깨달았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지.

알고 있으면서도 화가 났다. 그것밖에 되지 않아 모자란 힘에도 화가 났고, 이렇게까지 치달아 버린 상황에도 화가 났으며, 계획이니 뭐니 있어 보이는 말로 그를 움직이려 들었던 많은 이들에게도 화가 났다.

지호는 가시를 한 손으로 움켜쥔 채 나머지 손으로 단창을 꼬나쥐었다.

에너지 폭풍 아래에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준우가 보였다. 보현은 방벽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힘에 벅찬지 그 품에서 머리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여왕이 깨어나 다릴 조금만 더 움직이면 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끝장날 것이다.

결국, 도훈 아니면 보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무리 머리가 차갑게 식어도 그런 결정에는 감정이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괴물을 뜯어먹던 감각을 떠올리며 지호는 손을 뻗었다. 단창은 에너지 격풍을 손쉽게 가르고 들어가 검게 물든 도훈의 몸에 가까워졌다.

“죽여 달라고? 나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에요?”

내 모든 생은 자살 시도였고, 모든 삶은 실패의 기록이었어. 이제 이 지지부진한 시간을 끝내게 해 줘. 네게 너무 잔인해서 미안해.

“알면서…….”

이제 쉬게 해 줘. 끝도 없는 죽음 속에서 나는 너무 오래 괴로웠어.

지호는 극도의 피로를 느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며칠 후면 생일이다. 매년 익숙하고 당연하게 가족과 함께 보내리라 생각해 왔던 바로 그 특별하고도 평범한 하루. 법적 성인이 되고,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칭할 수 있게 되는 그런 나이가 된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는 지호 곁에는 그토록 사랑했던 가족도, 엉뚱하고 얄미우면서도 어느새 애틋해진 친구도 없을 것이다. 눌러 참는데도 감정의 둑이 터졌다. 지호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 못했다. 여왕을 가두었던 가시가 거칠게 흔들렸다. 지호 팔이라도 자르고 튀어 나갈 것 같은 움직임. 도훈의 깜빡임이 미약해지고, 폭풍이 요란하고 거칠게 사방을 할퀴었다.

지호는 속삭였다.

“평생 미워할 거예요.”

평생 기억해 준다고? 첫사랑 자리는 잘 받을게.

“입 다물어요, 진짜. 절대 기억하지 않을 거예요. 생각나도 욕하고 털어 버릴 거예요. 내 삶에서 제일 지독한 요구였다고 경멸할 거예요!”

그래. 절대 기억하지 마. 없었던 일처럼 털고 잊어버려. 네가 힘들다면 그렇게 해.

지호는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불가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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