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여왕이 무수히 많은 팔을 들어 올리자 주변 이형 에너지가 움직임에 휘말려 불꽃처럼 나부꼈다. 묶은 머리가 등과 머리를 요란하게 오가며 흔들리고, 준우는 거기에 날아갈 뻔한 보현을 붙잡아 버티며 외쳤다.
“여왕이냐?”
답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몸집이 큰 탓에 움직이는 것이 느리다는 것을 제외하면 여왕의 행동 중 위협적이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형 에너지가 여전히 여왕의 다리 중 하나를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기에 세 사람의 움직임은 제한적이었다.
후우웅,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거체가 지호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후폭풍만으로 한참 밀려나, 역설적으로 그 덕에 뒤이어 날아온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여왕은 분노에 차 바닥을 몇 번이나 내리찍었으나, 지호는 두어 번 경험한 뒤에는 그 공격 후의 바람까지 이용해 복잡한 비행을 선보이며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바닥을 내리찍는 다리들을 거의 깔리기 직전에 피하며, 지호는 그 에너지들에 차츰 몸이 적응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이들도 적응되기를 바랐지만, 준우는 보현을 보호하는 것으로도 힘에 부치는 것처럼 보였다. 보현은 말할 것도 없다. 지호는 왜 그가 회복도 하지 않고 이쪽으로 달려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 발로 걸어왔구나. 생각해 보니 내게 엎드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 같았겠지?
여왕의 웃음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여전히 팔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있었고, 지호는 가시에서 뻗어 나온 검은 선이 여왕에게 닿아 있음을 알았다. 정신체가 본체에 연결된 것이다.
팔을 휘저어 보았으나 정신 연결이 그런다고 끊길 리가 없다. 여왕의 긴 다리 중 하나가 바닥에서 치솟았고, 두족류의 다리들이 지면을 뚫고 올라오기 전 바닥이 갈라지는 것이 또렷이 보여 다행이었다.
아까처럼 수많은 다리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리 한두 개가 번갈아 가며 바닥을 가른다. 지호는 정신없이 그걸 피하면서 여왕의 공격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
운 좋게도 패턴은 단순했다. 아마 여왕은 먹이를 직접 사냥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의 호위대를 비롯한 충실한 부하들이 토막 내어 진상할 것이 아닌가. 지호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준우 역시 여왕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하고 있었고, 지호는 일부러 그쪽으로는 접근하지 않으려고 변칙적으로 움직이며 거리를 벌렸다.
바닥을 뚫고 올라오던 다리로는 지호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는지 여왕은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지호를 붙잡으려고 다리를 휘둘러 댔다. 애석하게도 꽤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지면의 갈라짐을 보기 어려워지자 순전히 감에만 의지해 피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지호는 방어를 포기하고 방벽을 거두었다. 어차피 한 대 맞으면 끝이라고 봐야 했다.
감지 파장이 퍼지기 무섭게 뒤를 노리고 맹렬하게 치솟는 나머지 다리가 포착됐다. 한두 개만 피하고 있었다면 영락없이 당했을 것이다. 지호는 바닥을 찍는 다리를 피하기 무섭게 거기 매달려, 다리를 들어 올리는 반동을 타고 위로 치솟았다.
보현을 들어 올린 채 재차 내리찍는 다리를 피해 정신없이 바닥을 구르던 준우는 아래로 내려오는 공격이 느슨해진 것을 알고 간신히 숨을 골랐다.
날 수 없는 신체 계열 능력자 특성상 이런 일방적인 구도는 반드시 피해야 했다. 준우 혼자였다면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전투를 이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 그는 지호에게서 너무 거리를 벌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최소한의 경로로 공격을 회피했다.
다행히 여왕은 그쪽에 있는 것이 보현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는 듯, 지호에게만 공격을 집중했다.
공중으로 올라간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이형 에너지 폭풍이 거칠게 지호를 후려치고 거기에 휘말린 돌이나 뼈, 살점 같은 것들이 지호를 난폭하게 공격했다. 여왕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다리를 피하다가 꽤 큰 사체까지는 피하지 못한 지호는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가 요란하게 바닥을 구르는 동안 지호를 밟으려고 여왕의 곤충 같은 다리가 바짝 따라붙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대로 가시가 더 깊이 찔러 들어와 겹겹이 밀려드는 고통에 몸부림친 지호는 공격이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어깨를 파고드는 통증이 시시각각 심해지는 것을 느끼며 떨었다.
“지호 씨, 그쪽에 뭐가 있죠? 이형 에너지가 거길 기점으로 갈라져요. 뭐가 이어진 것처럼!”
감지계 능력이 없는 보현이지만 이형 에너지가 워낙 맹렬히 몰아치고 있어 그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흔적을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왕의 본체가 멈춘 것을 깨달은 준우 역시 자신을 쓸고 지나가는 이형 에너지에 집중했다.
“점점 빨라지는데. 이 폭풍의 원인이 도플갱어 아니었나? 아까 놈이 그 중심에 있었어.”
지호가 바닥을 구르며 어깨에 박힌 가시가 더 깊이 찔렸다. 가시의 검은빛이 옅어진 것을, 그리고 본체와 연결되었던 정신체가 다시 가시 안에 틀어박힌 것을 알아챈 지호는 펄쩍 뛰어올라 여왕의 다리에 박힌 듯 굳어 있는 도훈에게 날아갔다.
“정신 차려요! 도훈 씨, 빨리 일어나라고요!”
아무리 용을 써도 도훈을 거기서 뽑아낼 방법이 없었다. 석고상처럼 굳은 자세를 유지하던 도훈의 몸이 다시 느릿하게 점멸했다. 오로지 그 빛만이 그의 살아 있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어, 잠깐 졸았어. 무슨 일 있었어?
졸았다는 표현과 달리 그의 기운이 반 이상 꺼져 가고 있었다. 지호와 마찬가지로 아마 위험한 상황일 것이다. 희끄무레한 빛이 감도는 도훈을 여왕에게서 떼어 내는 것을 포기한 지호는 그에게서 손을 떼었다.
“여왕이 깨어났었어요. 방금 몸이 움직였다고요. 제가 피하면서 이게 좀 깊이 박혔더니 멈췄는데, 이걸 완전히 제 몸에 넣기라도 해야 여왕이 멈춰요? 그런 거예요?”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 네 에너지가 여왕의 정신체를 막고 있는 거야. 본인 생명력을 불태워 막을 일이 아니면 그런 얼토당토않은 일은 그만하라고.
“생명력을 불태워요?”
나야 어차피 곧 죽을 몸이잖아.
재차 거세어진 이형 에너지 폭풍에 휘말려 멀리 날려 간 지호는 한참이나 떨어진 위치에서 간신히 멈추었다. 보현과 준우가 폭풍 중심에 가까운 여왕의 다리 근처에 있었다. 그 폭풍에 온전히 노출되는 것보다는 여왕의 몸 가까이에서 붙어 버티는 방법을 선택한 것 같았다. 놈이 제대로 움직이기 전까지는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지금은 발밑의 날파리들보다는 지호를 잡는 것에 집중하고 있기도 할 테니.
어깨에 박힌 가시가 재차 진동한다. 지호의 몸에서 빠져나가려는 것 같은 떨림이었다. 여태 모르고 있던 것이 이상하다.
지호는 빠르게 바닥으로 내려섰다. 포식자의 사체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와중에, 지호의 어깨에 박힌 것과 비슷한 가시 달린 놈이 한쪽 벽에 처박혀 있었다. 척추를 따라 날카롭게 선 가시들이 기이한 빛으로 반짝였다.
지호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어깨에 박힌 가시를 움켜쥐었다. 검은빛으로 아른거리는 것. 막을 도리가 없다. 도훈은 반쯤 먹힌 상태에 가까웠다. 그의 힘을 온전히 흡수한 뒤, 정말로 여왕이 보현을 삼켜 버리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재난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왕이 저 본체 그대로 인간 세상으로 넘어갈 수도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지호는 멀쩡히 서 있기 어려운 폭풍 속에서 비틀거리며 포식자의 사체 쪽으로 걸어갔다. 가시들 중 하나가 부러져 있다. 지호의 어깨에 박힌 것이 아마 이것이겠지.
정신체를 억압할 힘을 가진 부위일 것이다. 이것 하나를 이용해 여왕의 정신체를 묶어 놓았다면, 더 많은 수를 이용했을 때 놈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 지호는 포식자의 척추뼈 부근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암흑으로 뒤덮였다.
느낌이 좋지 않긴 했다. 그런 효과적인 물건이 있었으면 진작 쓰지, 왜 고작 하나를 가져다 쓰라고 주었겠는가. 몸이 덜덜 떨렸다. 지호는 그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꿋꿋이 버티도록 도와주었던 얄팍한 정신 방벽이 완전히 내려가 있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동시에 존재를 드러냈다. 한쪽이 압도적으로 컸다.
이쪽으로 날려 갈 줄 몰랐는데…….
나를 상대하고자 힘을 키운 것에 먹히는구나. 어리석고 연약한 것.
‘아 뭐야, 둘 다 남의 머리에서 떠들지 말고 나가든가.’
몸을 뒤흔들던 이형 에너지 폭풍이 사라진 것만으로 살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 폭풍 속에 뻣뻣하게 선 기분이다. 바로 얼마 전 비슷한 상황을 겪어 보았던 지호는 그것이 막강한 정신계 작용으로 인한 신체와의 괴리 상태임을 인지했다. 아마 그의 몸은 그 이형 에너지 폭풍 속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엔 또 어떤 새끼야…….’
지호는 자신을 훑어 내리는 거친 정신을 느꼈다. 거의 죽어 가는 몸에 남아 있는 미약한 포식자의 정신. 놈이 외치는 것은 여왕을 먹는다는 또렷한 목적 하나뿐이다. 그것에 휘말려 지호의 몸이 움직인다. 여왕의 정신과 도훈의 정신이 부딪치느라 지호는 포식자에게 붙잡힌 채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남의 몸이 무슨 공공재인 줄 아나, 이 새끼들이…….’
정신 방벽이 사라진 상태라 저항할 수 없었기에 지호가 할 수 있는 것은 상황 파악뿐이었다. 여왕과 도훈의 정신이 충돌하는 것을 느끼는 것조차 운에 가깝다. 혹은 도훈이 일부러 공유해 주고 있는 것이거나.
지호의 몸이 이형 에너지 폭풍을 뚫고 바로 섰다.
다른 괴물들이나 사체가 그대로 쓸려 내려가 저 멀리 요란하게 나뒹구는 것에 반해 지호는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다. 그를 잠식한 포식자의 영향이 아니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을 때, 지호는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다.
보현의 방벽과 준우의 서포트로 두 사람이 그 폭풍의 중심 가까운 곳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마저 힘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운 좋게 도플갱어 바로 아래, 여왕의 몸 중에서도 거의 움직이지 않는 부위인 데다 폭풍의 눈 부근에 있어 멀쩡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바로 폭풍에 쓸려 나갈 것이다.
포식자가 지호의 눈을 빌려 자신의 시신을 훑었다. 지호는 그것이 냉정하게 스스로 죽음을 인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놈은 다른 것들과 달리 말할 줄 아는 놈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언어가 없다고 해서 멍청한 놈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종류의 괴물이었다.
놈이 어떤 것을 결심한 순간, 지호는 경악했다.
‘아니야, 안 돼. 잠깐, 그만둬!’
지호의 외침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표출되지 못했다. 도훈과 여왕의 정신체는 내부에서 충돌하며 간간이 지호의 시야를 막아 댈 뿐, 지호의 몸이 무엇을 집어 드는지, 무엇을 분해하는지, 무엇을 분리하여 입으로 가져가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지호는 정신적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감각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처음에는 경악과 공포, 당황과 분노를 비롯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솟아났다. 그러나 놈을 씹을수록 지호의 안에 포식자의 기억이 스며들었다.
본디 괴물과 다를 바 없는 몸으로 괴물을 먹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내 자신이 사람이라고 주장해 왔던 지호의 정신을 뒤흔들기는 충분한 행동이었다. 놈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자신의 시신을 분해하여 지호에게 먹였다. 놈의 몸이 부서질 때마다 지호의 정신을 누르는 힘이 약해졌다.
절반쯤 놈의 골을 빼먹고 난 뒤엔 어느새 충만하게 차오른 정신계 능력을 인지할 수도 있었다.
미약하게 스며들던 놈의 기억이 명확해졌다. 항상 여왕에게 쫓기거나 비슷한 놈들과 뭉쳐 덤볐다가 패배하기를 수차례, 운 좋게 무방비한 상태를 덮쳤음에도 여왕에게 상대되지 않았던 굴욕적인 기억들.
포식자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다. 그는 내내 약한 개체였으나 그렇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여왕은 그가 가치 있는 먹거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놈을 내버려 두었고, 덕분에 놈의 힘은 지호에게 흘러들어 왔다.
이 정도로 정신력을 억압할 특수한 능력이 있는 줄 알았다면 아마 쉽사리 보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포식자는 늘 납작 엎드렸기 때문에, 반성하는 척할 줄 알았기 때문에, 자비롭던 여왕의 모습을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자식 중 하나였기에 살아남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의지는 하나뿐이었다.
본디 여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기에 남은 힘을 다해 정신을 가로챘던 포식자는 타인의 눈으로 본 자신이 정말 가망 없이 죽어 가는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홀로 죽어 가는 것은 무가치한 죽음이지만, 다른 것에 먹히는 죽음은 그 자체로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이 여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개체라면 그 죽음은 더더욱 의미 있을 터.
그 포식자가 기쁨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지호를 혼란스럽게 했다. 다른 것에 먹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살아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바라야 할 생존 본능 없는 차분한 관조.
기이한 열망 속에서 지호는 여왕의 끝을 바라는 또 하나의 의지가 자신 안에 깊이 스며들었음을 알았다. 드디어 가지게 된 강한 정신계 능력과 함께 생겨난 또 하나의 목적이었다.
지호는 강렬히 전달되어 오는 목적을 느끼며 천천히 자기 몸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의 어깨에 박혀 있던 가시에서 검은 기운이 빠르게 걷히고 있었다. 백색으로 변한 가시. 완전히 억눌린 여왕의 정신체.
지호는 자신이 먹은 괴물의 시신이 가루처럼 파스스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남은 것은 지호의 어깨에 박힌 가시와 그가 먹기 위해 부러뜨렸던 가시, 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