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실종자들은 머뭇거리다가 지쳐 보이는 사람들을 부축해 주겠다고 다가갔다. 균열에서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신체 계열 능력자여야 하는지, 실종자 중에는 단단하거나 무겁지 않은 이가 없었다.
여왕과 싸우던 와중에는 너무 겨를이 없어 생긴 것이 어떻건 신경 쓰지도 못했는데, 이제 보니 지금 당장 팔을 휘둘러 목을 따 버려도 저항하지 못할 것 같은 흉포한 생김새부터 하품 한 번 하는 것이 머리를 물어뜯어도 이상치 않을 것 같은 괴물스러운 생김새까지 다채롭게도 생긴 자들이었다.
그나마 머뭇거리는 태도들이나 헌터들의 의사를 먼저 묻는 인간적인 행동들이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김 반장은 우물쭈물하는 승환을 불러 자기를 좀 업으라고 지시한 다음 태연하게 거기 업힌 채 기기를 조작해 좌표를 보여 주었다.
“게이트 앞엔 가도 들어갈 순 없을 거다.”
김 반장은 갑자기 등을 치는 뭔가에 억하고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승환의 꼬리가 거칠게 바닥을 내리치며 동시에 김 반장의 등도 두드려 대고 있었다. 대놓고 언짢음을 표하는 그 동작에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아까들 봤겠지만, 우리 중 헌터였던 사람조차 본인이 사람들 속에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당신들이 그때 사라졌던 실종자인지 신원 파악도 안 되고 안전한지 검증도 안 된 상태인데 뭘 믿고 일단 들어오라고 하겠나?”
“집에 보내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일단 어디서 온 누구인지, 댁들 이름은 뭔지, 그래서 가족들은 살아 있는지 뭐 그런 것들을 조사하는 게 순서야. 집이 어딘지는 알아야 보내 줄 거 아니야. 그 동네가 박살이 나지는 않아야 집이 남아 있을 거고.”
“우리 집은 박살 났는데……. 그럼 못 가?”
승환이 시무룩해지자 김 반장은 잠시 말을 골랐다. 거기 있는 실종자들 모두가 그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았기에 단어 선택을 잘해야 했다. 모른 척하고 있던 못난 어른 박 팀장과 달리, 보현은 선뜻 끼어들어 말을 얹었다.
“우리 집도 다 망가졌어요. 그쪽에 균열이 열렸거든요. 한 지구가 통째로 망가지면 국가에서 보상 사업으로 임대 단지를 짓거든요. 아마 당장은 돌아갈 곳이 없어도 집이 생길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예요.”
“임보현 헌터님이죠? 그 1세대 영웅인…….”
어떤 실종자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보현은 자기를 부르는 오래된 별명에 좀 민망하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러분을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기쁜 날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겉모습이 좀 바뀌긴 했지만……. 당장 대면하게 할 수는 없어요. 아시죠? 균열 생존자들 트라우마가 어마어마해서요. 여러 절차 거치고, 가족들과는 아마 통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전부 가정이라 미안하지만, 제가 책임자는 아니라서요.”
그러나 말을 꺼낸 것이 그 유명한 임보현 헌터라는 사실 때문에 실종자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거기에 괴물의 표정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 분위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헌터가 보기에 실종자들의 얼굴은 험악해지거나 공격적으로 돌변한 것 같아, 주변 공기가 몇 도는 떨어진 기분이었다.
살얼음판 걷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보현은 지호가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콕 집어 부탁을 남겼는지 이해했다. 헌터들 때문이 아니었다. 실종자들에게는 보현처럼 인지도 있는 대상의 공신력 있는 약속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그런 것까지 생각할 수 있었어요?’
본디 어른인 보현이 먼저 깨달아야 할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각성한 후, 언제나 보현은 그때 그 철딱서니 없는 이십 대 헛똑똑이로 살아가는 것을 숨기려 부단히 애쓰며 살아왔다. 그보다 십 년은 먼저 각성한 지호라 더 어린애 같아야 정상일 텐데, 너무 일찍 철이 든 아이답게 지호는 늘 어른스러웠다.
어른들 보기에 위태로워 보이는 성숙함이기에, 보현은 그런 지호가 안쓰럽고 가여웠다. 물론 어른스러운 아이인지라 덜 자란 어른인 보현이 맡기에도 부담 없다는 장점은 있었으나 보현은 자신이 좋은 보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시 상기하고 있었다. 다른 헌터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지호를 구조한 뒤 곧 보호 시설을 수배했을 것이다.
그때가 너무 까마득히 옛날 같았다. 보현은 실종자들의 여러 질문에 지금 당장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의 여러 변용 표현을 끄집어냈고, 그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실종자들은 곧 침울해졌다.
실종자들의 질문 공세가 끝난 뒤에야 무리는 게이트 좌표 지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최대한 에너지를 아끼기로 하여 도보로 이동했는데 다행히도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아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게이트 위에 생겨난 희뿌연 안개는 여왕의 본체에 생긴 것과 비슷해 보였다. 특수반 헌터들과 정신계 능력자들은 그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정신계 트랩이야. 거기에 이형 에너지가 저걸 날려 버릴 여러 공격을 방어하려고 외부에 덮여 있고.”
박 팀장의 안주머니에서 삐비빗, 신호가 울렸다. 대기 상태였던 통신기를 수신 상태로 돌린 박 팀장은 훨씬 선명해진 양 박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신호에 잡히네요. 게이트에 접근하신 거죠?
“예,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전달 부탁합니다. 아까 생존자들을 데려왔던 실종자들과 교전에 합류했다가 돌아온 참입니다.”
-잘됐습니다. 저걸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양 박사의 표현은 과장되거나 괴물에게 편견을 가진 자의 괴벽 섞인 표현과는 달랐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괴물을 접할 기회가 많은 양 솔 박사의 표현으로도 그것을 정확히 부를 말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보현을 비롯한 일행은 게이트를 가로막고 있는 ‘그것’을 보며 눈을 의심했다.
“저게 도플갱어라고요? 분명 민도훈 헌터의 형태를…….”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어, 그런데 게이트 점거 과정에서 약간의 사고와 다툼이 있었거든요. 저희는 놈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걸 원하지 않았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도플갱어가 이지호 헌터에게 요구했던 가장 중점적인 사안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일이었다고 알고 있어서…….
“놈이 게이트를 통과하려 했나요?”
-절반 정도는 그랬습니다.
양 솔 박사는 과학자다운 태도로 상황을 객관화했다. 처음 기술 지원을 요구했던 도플갱어는 드론들이 정확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다시 게이트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놈의 상태는 이전에 관측되었던 때보다 많이 약해 보였다고 했고, 보현은 그것이 ‘죽어 가는’ 도플갱어의 형태일 것이라 추측했다. 감지 계열 능력자가 아닌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형태를 상상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게이트 너머에 있던 차나연 헌터의 말을 빌리자면, 도플갱어는 마치 손 한쪽 정도만 이곳에 머물러 있는 정도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저희는 코드 레드 개체들을 꽤 열심히 관측하고 기록해 왔습니다. 퀸 패러사이트뿐 아니라 도플갱어 역시 그 대상이고, 이지호 헌터 덕분에 자주 관찰할 기회가 있어 그 기록이 많은 편이거든요. 도플갱어가 내뿜는 파장은 특이한 편인데 괴물 중에 비슷한 특징을 가지는 놈이…….
“딴 길로 빠지지 말고요.”
자기 연구 분야가 나오면 말이 많아지는 양 박사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린 보현은 헛기침하며 본론으로 들어가는 그의 다음 이야기를 들으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악성 균열에서 생존자들을 구출해 온 다른 헌터들은 무사히 귀환했는데, 그 이후 다른 팀이 균열로 들어가려 하는 때에 도플갱어가 돌아왔습니다. 놈은 입구를 막고 서서 그곳을 지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고, 이쪽으로 넘어오려는 것 같은 태도를 보여서 헌터들이 즉각 응수했습니다. 전투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는데, 타격을 받은 도플갱어는 곧 형체를 잃고 저 모양이 되어 헌터들을 공격하더군요. 지금은 계속 명확한 형태 없이 저 꼴입니다.
“게이트를 통해 탈출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끼어들었을까요? 다시 들어오는 건 위험할 것 같아서? 혹시 균열이 닫힌다는 걸 예측했던 걸까요?”
-그건 너무 호의적인 해석 아닐까요.
게이트에는 기묘한 형체가 몰아치고 있었다.
바닥에 자욱이 깔린 흙먼지 같은 형체가 바람을 타고 일어나 그대로 불꽃이 되었다가 곧 연기로 화해 부근을 메웠다. 게이트 윗부분을 가득 채운 연기는 끈적한 질감의 액체로 변해 문을 타고 흘렀고, 개중 일부는 어설프게 인간의 형태 비슷한 것을 갖추다가 뭉쳐지지 않고 도로 바닥에 떨어졌다. 곧 점성을 잃고 파스스 흩어졌다가 다시 위로 피어오르기를 반복하는 모양새.
어떻게 봐도 생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연 현상의 연속체로 보이는 그것은 연신 형태를 바꾼다는 점에서 유일하게 도플갱어를 떠올리게 했다.
“놈이 그 이름을 받고 지호 씨와 접촉한 뒤에 자기 형체를 바꾼 적이 없었죠? 내내 민도훈의 모습을 하고 있었잖아요.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까요?”
-난들 압니까. 놈이 발성할 수 있는 기관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헌터님들을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특수반이 우르르 다 가 버릴 수가 있어요? 가뜩이나 정신계 능력자들 달리는 거 알면서!
“대화를 시도해 보겠습니다.”
보현은 몇 걸음 더 접근했다. 갑자기 도플갱어의 규칙적 변이 상태가 바뀌며 좀 더 공격적이고 난폭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보현은 당황하면서도 정신적 언어를 그쪽으로 날렸다. 형편없이 튕겨 나가는 것을 보니 대화할 의사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안 되겠는데요. 지호 씨는 뭘 믿고 나를 여기 보낸 거지?”
보현은 어이없어하며 도로 물러섰다. 그가 물러난 것에 반응하여 행동이 잠잠해진 것인지, 보현이 뱉은 단어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명확하진 않았으나 도플갱어의 거칠었던 변화가 잠잠해졌다. 화르륵, 불꽃의 형태로 자신을 고정한 도플갱어로부터 정신 언어가 날아왔다.
임보현인가?
어, 뭐야. 듣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었나? 왜 거길 틀어막고 있지? 게이트를 넘어가겠단 속셈이냐?
우리 지호는?
아까 추측 중 후자가 맞았던 모양이다. 보현은 팔짱을 낀 채 이쪽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불꽃을 노려보았다.
네놈의 계획인지 뭔지에 휘둘리는 것도 질렸다. 무슨 꿍꿍이지?
이쪽으로 안 왔나?
네 질문에 답을 듣고 싶으면 내 물음에 먼저 답하는 게 순서 아닌가?
아니야. 잘됐군. 너희가 다 이쪽으로 온 걸 보니 도준우와 지호만 내 쪽으로 오고 있나 보지?
보현의 얼굴이 굳었다. 불꽃은 마치 연료를 공급받은 것처럼 세차게 타오르더니 정신적 웃음을 터뜨리며 한참을 즐거워했다. 보현은 설마 하며 게이트에서도 여전히 육안으로 보이는 여왕의 본체 쪽을 돌아보았다. 도플갱어는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속삭였다.
지호가 말해 주지 않았어? 내가 죽어 가고 있다고. 여왕도 탐내는 그 매력적인 몸을, 나라고 노리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내 정신은 오랫동안 지호 안에서 때를 기다려 왔어. 이제는 우리 지호를 많은 나들 중 하나로 여기게 될 때가 왔군.
“너, 네 목적이란 게 처음부터…….”
네 친구가 남겨 준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게 좋지 않겠어? 너 하나 지키자고 꽤 오래 무리했는데. 마음 같아선 방해하고 싶었는데, 어차피 지호가 내가 되면 그 배려를 고마워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놔뒀어. 생각해 봐. 본래의 여왕과 달리 인간에게 친화적인 보스가 생기는 건데, 차라리 반갑지 않겠어?
“이 미친 새끼, 그렇게 내버려 둘 줄 알아?”
보현은 곧장 하늘 위로 치솟았다. 거기에 보현을 따라갈 수 있는 여력 있는 사람이라곤 박 팀장뿐이었지만, 여기서 그가 빠져 버리면 남은 자들을 통솔하기 어려워진다. 김 반장은 고작해야 특수반 헌터들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일 터.
“임보현 헌터? 갑자기 어딜 가는 거예요? 임 헌터!”
“게이트 닫으라고 해! 균열 넘어가는 법, 어려운 거 아니니까!”
머리 위에서 보현의 분노에 찬 고함이 들렸다. 그 말을 남기고 빠르게 날아가는 보현의 뒷모습을 보던 헌터들은 당황을 숨기지 못하며 웅성거렸다. 보현이 날아가는 방향과 현 지도를 확인하며 좌표 정보를 기억한 소민은 약속한 듯이 그의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세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으나 거기에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종자들과 헌터들이 눈에 띄게 불안해하는 것을 본 박 팀장은 이를 갈며 김 반장을 찾았다. 보현이 도플갱어와 무슨 대화를 했느냐는 물음에, 김 반장은 무슨 그런 멍청한 질문을 하느냐는 시선을 던졌다.
“사방에 들리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 둘의 정신적 대화였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아나?”
“아니 정신계 능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제가 아는 것도 아니고……. 어쩌죠? 진짜 게이트 닫으라고 해요?”
게이트 중간에 끼어 있는 도플갱어가 무슨 꼴이 될지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김 반장은 인상 쓰며 게이트를 노려보더니 그때까지 업혀 있던 승환의 어깨를 탁탁 두드려 바닥으로 내려섰다.
“쉬게 놔두질 않네. 아쉬울 때만 찾는다니까.”
도플갱어는 두 번째로 접촉해 온 정신이 지호의 동료라는 사실 때문에 마찬가지로 공격적인 태도를 거두었다. 도플갱어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어느 쪽이 진짜냐고? 괴물들이 몸을 쪼갤 줄 안다는 거 모르던 것도 아니잖아? 새삼스럽게 저쪽과 이쪽 모두에 내가 있는 것을 낯설어하는군.
임보현한테 무슨 소릴 했길래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날아간 거냐?
그의 작전에 순순히 협조해 주었던 헌터의 질문이었기에, 도플갱어는 대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