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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248화 (249/260)

248화

벗어나는 방법을 알았으나 시행할 힘이 부족했다. 애당초 악성 균열이라 닫히는 힘마저 재앙에 가까웠다.

삭막한 풍경. 균열에 침식되어 서서히 변해 가는 균열 안쪽이 오래도록 풍화되면 그렇게 보일 것 같은 모습들이다. 식물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생태계가 기묘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움직이는 것들을 인지하고 도망가는 것들보다는 다가오는 것들이 더 많았다.

“게이트는? 게이트 어떻게 됐지?”

보현의 질문이 나오기 전에 이미 박 팀장이 본부로 연락을 넣고 있었다. 당연히 될 턱이 없을 테지만, 놀랍게도 신호가 갔다. 노이즈가 많이 낀 신호였으나 연결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희망적인 일이었다. 상대는 연결 신호 떨어지기 무섭게 대뜸 질문했다.

-진짜 균열이 닫힌 겁니까?

”예, 악성 균열이라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탈출 방법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균열 소멸기 중 강은정, 최현태, 하문희 헌터 사망. 이외 부상자 다수입니다. 게이트 상태는 어떻습니까? 균열 소멸에 휘말리며 망가지진 않았고요?”

-이쪽은 도플갱어와 대치 중……. 사고가 있었습니다. 놈이 공격을 시작했고, 교전 중 형태가 변하여 게이트를 거의 부술 뻔했고요. 다행히 놈이 게이트에 근접한 상태로 균열 소멸에 휘말리면서 자기 몸과 게이트를 함께 보호한 모양인데요. 당장 이쪽으로 넘어오시려면 도플갱어와 교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놈이 공격했다고요? 협조를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도움이 필요하다더니…….”

-저희는 요구대로 관측 결과를 도플갱어에게 공유했습니다만……. 여왕으로 추측되는 괴물과 다른 괴물 다수의 교전 상황 관찰 도중 여왕의 본체가 다른 것들을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균열이 닫혔고요. 어떻게 된 겁니까?

이쪽에서 묻고 싶은 말이었다. 하도 조용한 곳이라 헌터들 모두가 그쪽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박 팀장은 게이트가 무사하다는 소식에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아직도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에 슬픔을 느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때 도준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도플갱어가 그쪽에 남아 있다고?”

-예, 예? 어, 예.

“그럴 리 없을 텐데. 도플갱어는 지금 다른 곳에서 느껴져.”

-느껴진다고요? 대체 무슨 말을…….

무시할 수 없는 비명이 울렸다. 헌터들은 일제히 승환 쪽을 돌아보았다. 지호의 팔에 박힌 가시가 눈에 보일 정도로 진동하고 있었다. 당황하여 그걸 뽑아 버리려던 승환은 여러 사람에게 제지당했다. 특히 박 팀장과 함께 지원 온 헌터들 사이에 끼어 있던 세 사람이 놀라 펄쩍 뛰었다.

“봉인이라고 했어, 봉인!”

“그걸 뽑으면 여왕이 풀려날 수도 있다고!”

“얘, 잠, 잠깐만!”

하나와 지윤, 소민이 호들갑 떨며 달려온 덕분에 승환의 손은 어정쩡하게 멈췄다. 그러나 깊이 박혀 있던 가시가 슬쩍 빠지기는 했고, 가시에 감돌던 검은 기운은 눈에 보일 정도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승환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질문했다.

“어, 다시, 다시 찔러?”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지호는 승환을 탁탁 두드려 자길 내려놓으라고 신호한 뒤에야 바닥을 딛고 설 수 있었다.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보다 더 아프고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죽여 달란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으나 통증이 느껴진다는 것만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예요? 무슨 일입니까?

“이지호 헌터가 깨어났습니다. 이쪽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보고하죠. 도플갱어가 그쪽에 있다고 했죠?”

-예? 아, 예. 민도훈 헌터의 모습을 흉내 내던 코드 레드 투, 게이트 앞에서 항전 중.

“확인했습니다. 연결 상태 유지 요함.”

언제 게이트가 닫힐지, 언제 신호가 끊어질지 알 수 없어 박 팀장은 통화를 종료하지 않고 기기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본 적 있던 풍경을 돌아본 지호는 난폭한 눈길로 여왕의 거체를 올려다보았다. 묘하게 흰빛으로 보이지만, 이제 지호는 그것이 진짜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게이트겠죠. 하지만, 여왕과의 결전을 마치고 떠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몸으로?”

승환의 물음은 타당했다. 거기 있는 사람 중에 지호가 쉬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지호 역시도 자기 꼴이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고개를 끄덕이며 가시 박힌 관절부를 확인했다. 회복되려는 몸과 회복을 막는 힘이 부딪쳐 건드리거나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다. 지호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정리했다.

“혹시 여왕이 또 내 몸을 차지하게 될지도 몰라요. 놈에게 멀쩡한 상태의 저를 넘겨줄 순 없는 노릇이죠. 좀 뽑히긴 했는데, 다행히 아직 봉인인지 뭔지가 좀 괜찮은 것 같네요.”

“왜 그렇게까지 해?”

승환이 지호를 안쓰럽게 내려다보며 질문했다. 지호는 이제 그와 다를 바 없어진 자기 상태를 확인하며 빙그레 웃었다.

“이 일이 다 끝나고 돌아가면……. 옛날처럼 헌터라고 다들 좋아해 주는 일은 없게 되는 거잖아요. 오히려 사람이 아니라고 배척당할 일만 남아 있겠죠.”

너덜거리는 전투복 안쪽으로 드러난 살은 인간의 것이 아니며, 비정상적으로 회복이 빨라진 몸 역시 옛 느낌이 아니다.

그럴 리 없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했다.

익숙한 것은 얼굴과 목소리뿐. 실종자들 안쪽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추스른 지호는 간신히 심호흡했다. 그나마 주변에 이형 에너지양이 많아, 실시간으로 근방의 힘을 회복 에너지로 돌릴 수 있었다.

“그쪽은 도훈 씨한테 가겠지?”

준우를 칭하는 지호의 말을 듣는 보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도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했다.

“너도 가야지. 어차피 게이트에서 막히는 건 저놈들이나 너나 똑같을 것 같은데.”

“언니는 게이트로 가요. 돌아가서 회복에 전념하고, 필요한 인력이나 물건들 좀 보내 주시고요. 다른 사람들보다 보는 눈 있는 사람이니까 믿을게요.”

“누구한테 가라 마라예요, 지호 씨. 안 가요.”

“여왕이 깨어나고 있어요. 아까 같은 전투가 또 벌어지기 전에 도플갱어 찾아서 멱살이건 뭐건 패대기쳐야겠는데, 그렇다고 저걸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어서요. 게이트 쪽에 도훈 씨가 있다고 하니까 그쪽에서 접촉 좀 부탁해요. 제가 언니 말고 누구한테 또 이런 부탁을 할 수 있겠어요? 김 반장님은 지금 거의 녹다운 상태고, 특수반 사람들도 비슷하게 지쳤잖아요. 도플갱어 정신 공격 버틸 사람 언니밖에 없어요.”

세찬 바람이 한차례 더 휘몰아쳤다. 균열 소멸기 때만큼의 강도는 아니었기에 버텨 낸 자가 대다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인지라 체력이 없어 비틀거리거나 넘어진 이들도 꽤 있었다. 보현은 헌터들이 힘겹게 일어나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나는 은퇴한 헌터예요.”

“은퇴한 임보현 헌터라. 앞에 있는 게 붙어 있건 떨어져 있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다들 은퇴 여부에 상관없이 언니 말을 잘 듣잖아요.”

사실 헌터들을 지휘하는 쪽은 박 팀장이 좀 더 적격이기는 할 터. 보현은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팔짱을 꼈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나를 밖으로 내보내고 싶다는 뜻은 알겠어요. 지호 씨가 여왕 본체에 가까이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죠? 여왕의 정신체는 이미 저에게 접촉했어요. 놈은 경계를 넘어갈 최소한의 이론을 갖추고 있다고요. 혼자 상대하는 건 무모한 일이에요.”

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현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기보다는, 그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는 거 같은 얼굴이었다.

여왕의 본체가 움직이며 다시금 세차게 바람이 분다. 불어닥치는 강풍의 근원을 파악한 보현은 인지하는 것과 동시에 방벽을 세워 헌터들이 거기 휘말리는 것을 방지했다. 그 본능적인 대처를 본 지호는 빙그레 웃었다.

“바로 그런 감각들을 기대해요. 사실 저한테도 도훈 씨가 저쪽에서 느껴지는데……. 보고가 들리기로는 게이트 앞에서 도플갱어가 발견되었다고 하잖아요? 제가 거기에도 가고, 저쪽으로도 갈 순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제일 신뢰하는 사람에게 해결을 맡길 수밖에요.”

“놈을 죽이는 게 방법이면 그렇게 할 거예요. 지호 씨가 가는 쪽이 평화로운 해결책 아닌가요?”

“언니. 이제 평화 같은 건 의미 없어요. 누가 죽는지의 문제예요. 우리에겐 이미 도플갱어의 예시가 있잖아요. 언니가 걱정하는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여왕에게 시간을 더 주면 안 되는 거예요. 여왕이 더 많은 인간을 먹고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힌트라도 찾게 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거고요.”

지호의 눈에 미세하게 붉은빛이 돌았다. 팔에 꽂힌 가시 같은 것이 웅웅거리며 진동하여 다시 그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도 보였다.

염려하는 것과 별개로, 보현은 지금 본인을 비롯한 이곳의 모든 헌터들이 더는 지호를 백업할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에 집중했다. 회복할 시간도 부족하고, 체력은 더더욱 없었다. 여왕이 다시금 지호의 몸을 차지할 때 놈의 에너지원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상황. 보현은 이를 악물었다.

“지호 씨가 그쪽으로 간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차라리 게이트를 넘어가요. 여왕의 본체로 가까이 와서 지금 영향이 더 강해진 것일 수도 있잖아요.”

“가야 해요. 지금이 아니면 안 된대요.”

“누가요?”

지호는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보현은 당황했다.

“여왕이 지호 씨를 부르고 있는 건가요? 더더욱 가면 안 되죠!”

“어, 아뇨. 아마 김 반장님이 자세한 이야기 해 주실 거예요. 제가 언니의 파트너를 좀 빌려 가야겠는데, 괜찮죠?”

지호는 여왕의 본체 쪽을 주시하고 있는 도준우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려, 보현은 도무지 괜찮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균열에서 벗어나자 여왕의 본체 부근을 날아다니는 것들이 좀 더 명확하게 보인 덕분에 도준우는 도플갱어가 헌터들에게 받아 온 드론들을 몇 기나 발견할 수 있었다. 새파란 연무 같은 것으로 주변이 채워진 여왕의 본체는 접근을 원천 차단하는 것 같은 모습으로 간혹 팔이나 날개, 다리나 상체 같은 것을 휘저어 무언가를 공격하는 모습을 취했다.

그런데 동작에 규칙성이 있다. 그렇게 움직이도록 명령받은 대로 따르는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 장면을 촬영 중인 것 같은 드론들이 눈에 밟혔다.

“이왕 게이트로 넘어가는 거, 도플갱어가 요구한 협조 내용과 그쪽에서 촬영한 영상 내용 같은 것들을 좀 파악해서 정보를 보내 줘. 아마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일 테지. 상태 괜찮은 헌터들이 있으면 저쪽에서 추가 인력 파견해 주면 더 좋고.”

“누가 오려고 하겠어?”

“글쎄. 임보현 헌터의 팬들?”

준우는 피식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보현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자기 주먹을 들어 올렸다가 한숨 쉬었다.

“내가 사랑하는 두 사고뭉치,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노력해 보지.”

지호는 대답도 없이 웃기만 했다. 보현이 든 손에 주먹을 한 번 부딪친 준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은 채 지호와 함께 여왕의 본체 쪽으로 뛰어올랐다. 위에서부터는 지호가 준우를 보조해 하늘을 가로질렀고, 두 사람의 모습이 멀어지자 누군가 짧게 한숨 쉬는 소리도 들렸다. 실종자들이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저기, 저희는 이제 돌아갈 수 있나요?”

쓰러졌던 지호에게 쏠렸던 시선도 사라진 지금, 보현은 박 팀장이 대책도 없이 내놓았던 약속 때문에 두통을 느꼈다. 박 팀장은 헛기침하며 본부와 연락을 하겠답시고 등을 돌려 버렸고, 거의 실신 상태로 기절해 있던 김 반장은 가까스로 머리만 좀 들어 보일 수 있었다.

“우선 게이트로 가서 도플갱어 새끼가 무슨 지랄을 하고 있는지 좀 보자. 우리도 집에 가긴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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