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오, 언제나 깨어 있을 수 있어. 나는 내 손끝에서 태어난 그 나약한 아이처럼 부리는 것을 죽이거나 큰 힘으로 제압해야만 내 것 삼을 수 있는 미천한 족속이 아니라서.”
지호는 그가 어떻게 깨어 있다는 것인지 물으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귓가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호는 자신이 누구의 목을 부러뜨리기 직전이었는지 깨닫고 서둘러 쥐고 있던 것을 놓았다. 안타까운 한숨.
“왜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마다 훼방을 놓을까. 머리에는 이상한 걸 담고 있고 말이야……. 고작 기억 하나를 못 보게 막고 있을 뿐이라 아무 쓸모 없는데 이상하게 거슬린단 말이지.”
지호의 시야에 다시 기묘한 일렁임이 겹쳤다. 그의 머리를 찍어 내리려는 어떤 헌터를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으며 지호는 확실히 깨달았다. 여왕이 그의 몸으로 헌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지호 씨!”
보현의 목소리가 귀에 꽂히는 순간 지호는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안 돼! 피로 점철된 풍경이 다시금 눈앞을 뒤덮었다. 온몸의 감각이 쭈뼛 일어났다.
보현이 저편으로 나동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호의 눈앞에 보이는 건 동강 난 보현의 시신들이다. 그것이 마치 앞으로 나타날 미래라는 것 같아, 지호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지호가 스스로 몸의 자율권을 포기하고 물러나자, 붉은빛만 살짝 일렁이던 눈이 피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자비 없는 오른손이 보현의 머리를 따 버릴 것처럼 쇄도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 그러나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 속도를 따라갈 이가 있었다.
“그 망할 계획, 아직 안 끝났어!”
도준우는 지호의 일격에 십여 미터쯤 밀려나면서도 필사적으로 그 힘을 받아 냈다. 소심한 얼굴에 늘 눈치를 살피면서도 할 말 다 하곤 하던 앳된 인상이 무정물 같은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이게, 이게 뭐야…….”
누군가 공포에 질린 음성으로 모두 떠올렸을 감상을 토해 냈다. 그 이지호 헌터의 주변 공기가 무겁게 내리깔려 있었다. 그 뒤로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기괴한 조형.
지독하게 어두워 빛조차 삼켜 버릴 흑암이 그 머리 위를 덮고 있었다. 박 팀장은 탄식했다.
“저것이, 여왕인 겁니까?”
“멍청한 새끼들. 정신 똑바로 차려! 방벽 없는 것들은 다른 헌터들 백업 꼭 받아! 저건 보는 것만으로 정신을 좀먹는 질병 같은 거란 말이야!”
들리는 것에 반응한다. 이번에는 김 반장 쪽을 향해 이형 에너지 폭풍이 몰아쳤다. 맙소사! 누군가 신을 찾으며 김 반장의 허리를 낚아채 바닥을 굴렀다. 여러 사람이 거기에 휘말려 나동그라졌다. 도준우는 그의 주인을 잃던 순간의 패닉에서 벗어난 뒤엔 이전보다 더 빨라진 속도로 지호의 공격을 받아 냈다. 물론 대응할 수 있는 건 물리적인 공격뿐이다. 허수아비처럼 우르르 쓰러지는 헌터들을 본 임보현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다들 물러나요. 소리 나는 쪽을 공격하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현 쪽으로 달려드는 지호의 공격은 재차 준우가 받아 냈다. 퀸 패러사이트가 쓰러진 후에 죽은 것처럼 변한 다른 괴물들과 달리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당장은 안 된다. 새빨간 지호의 눈이 보현의 결심을 굳혔다.
지호의 몸이 멈춘다. 소리를 추격하듯 기우는 머리. 보현을 위시한 몇몇 눈치 빠른 헌터들이 검지를 입 앞에 세우며 움직임을 멈추었다. 붉은 눈은 여전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행동은 기이했다.
눈이 스르륵 움직여 앞을 보듯이 주변을 훑는다. 그러나 코앞에 있는 헌터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여왕이 지호의 몸을 온전히 다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헌터들은 조용히 물러났다. 발소리가 들릴세라 염동력까지 쓴 극적인 후퇴였다. 지호 홀로 덩그러니 선 채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균열 내부답게 주변은 지독할 정도로 조용했다.
눈이 마주친 박 팀장이 입 모양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지?
보현 역시 초조함을 숨기지 못한 채 지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붉은빛이 깜빡거리는가 싶더니 온전히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 소리를 추적해 과할 정도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모습.
직전까지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와 싸우던 헌터들 대부분이 너덜너덜해졌다. 휴식이 절실했으나, 여왕에게 먹히기 직전인 것처럼 보이는 동료를 두고는 멀리까지 떠나기는 어려웠다. 신체 계열 능력자인 덕분에 미세한 소리를 듣고는 그쪽으로 고개를 휙휙 돌려 대는 지호 때문에 모두가 진땀을 빼며 적정 거리를 찾아냈다.
핸드폰 두드리는 소리 정도는 인식하지 못할 거리를 확보하자 헌터들은 급히 통신 기기를 통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보현을 보호하고 있던 준우는 한숨 돌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박 팀장의 메시지가 보현의 기기에 빠르게 쌓였다.
[박찬민 : 저거 도준우?]
[박찬민 : 진짜 도준우죠?]
[박찬민 : 영상 입수해서 알고 있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한층 더 충격적이네.]
[박찬민 : 왜 헌터들을 공격한 거죠? 퀸 패러사이트의 수족이 된 이유는 뭐고?]
[임보현 : ㄴ]
보현의 단답에도 박 팀장의 혼란스러운 메시지는 꽤 오래 이어졌다. 혼자 떠들며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이었다.
박 팀장을 비롯해 게이트를 통해 이쪽으로 지원 온 헌터들은 3세대가 소수, 대부분이 2세대였다. 1세대야 보현을 포함해 활동 인원 자체가 적으니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으므로 노련한 헌터로 분류되는 이들 중 대다수가 여기에 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보현은 모인 자들과 대부분 안면이 있음을 깨닫고 느리게 손을 움직였다.
[임보현 : 어떻게 온 거죠?]
[박찬민 : 이지호 헌터의 지원 신호를 받고 위치 확인했습니다. 다행히 안 늦었더라고요. 안 늦은 거 맞겠죠?]
지호의 상태 때문에 걱정 어린 낯을 본 보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호가 지원 요청을 할 새가 있었다고? 퀸에게 조종당하던 준우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에만 급급했던 순간들은 허상이 아니었다.
[임보현 : 저랑 계속 전투 중이었는데 어떻게 지원 요청이 가죠? 사용자의 바이탈 사인을 체크해서 주변에 자동 요청이라도 보내는 특수 기계를 쓰나?]
[박찬민 : 아뇨, 진짜 이지호 헌터 이름으로 온 구조 신호가 있었는데요.]
수신 장소와 좌표를 확인한 보현은 더더욱 그 신호가 지호가 보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투 때문에 지호와 보현의 위치는 계속해서 바뀌었다. 그러나 구조 신호는 내내 같은 장소에서 발신되었다.
그리고 해당 신호 발신 위치가 퀸 패러사이트의 본체와 도플갱어가 있던 곳 부근이라는 사실이 보현을 화나게 했다. 아마도 도플갱어가 보냈을 그 신호 여부는 이제 더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보현은 성큼성큼 걸어가 준우의 머리를 퍽 쳤다. 당연히 보현의 손만 아픈 행동이지만, 준우는 그대로 밀려 머리를 푹 숙여 보였다가 눈치를 살피며 위를 바라보았다.
여느 때의 준우와 같은 바로 그 인간적인 행동이 보현을 비롯한 헌터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박 팀장은 둘을 번갈아 보다가 그 사이에 끼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슬그머니 물러났다.
“이제 말해도 괜찮을 거야.”
준우가 입을 열자 주변에서 안 듣는 척 엿듣고 싶어 하던 헌터들이 펄쩍 뛰었다. 보현은 그들의 움찔거리는 어깨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어떻게 알고 하는 말이야?”
“지금은 붉은 눈이 아니거든. 아마 정신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내부로 들어갔겠지.”
“넌…….”
제일 중요한 질문을 던질 때였다. 보현은 몇 번이나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목구멍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 말 때문에 스스로 화가 났다. 보현을 도운 건 눈을 감고 있어도 보현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도플갱어와 거래했어.”
“지호 씨를 이용하는 거 말이야?”
“정확히는 놈을 돕는 대가로 내 자유를 산 거지.”
이쪽 대화를 엿듣는 헌터들은 핸드폰에 집중하는 척하는 것도 잊고 고개까지 돌려 둘을 응시했다. 보현은 그것도 모른 채 휘둥그레 눈을 떴다.
“너, 죽은 거 아니야?”
“멋대로 사람 죽이고 그러지 마라. 퀸 패러사이트는 여왕을 닮아 지적 생물체와 교류하는 걸 좋아했다고. 덕분에 모가지 안 따이고 살아 있었는데.”
“하지만 다른 것들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준우는 성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보현마저 반갑다는 듯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또 한 대를 얻어맞았다. 보현의 손이 더 아파지기 전에 그는 몸을 일으키며 상황을 설명했다.
“도플갱어로부터 그의 정신체를 일부 공유받았어.”
“지호 씨처럼? 아니, 애초에 그게 무슨 의미야? 정신체를 공유받다니? 놈이 지호 씨 머리에 뭘 심어 놨다는 건 들었는데.”
“능력 사용자가 내가 아니라서 정확하겐 설명하기 어려운데……. 내게 들어와 있는 놈의 정신체가 하는 역할은 옛 주인과의 연결을 차단하는 역할이야. 전부를 막는 건 아니고 어떤 치명적인 연결 하나……. 그러니까, 어떤 녀석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바로 그 포인트를 가로챈 셈이지. 아마 본래대로라면 퀸 패러사이트가 죽었을 때 나도 같이 죽었을지도 몰라.”
보현은 노여움에 파르르 떨더니 김 반장을 찾아 주변을 휙휙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대부분의 헌터와 눈이 마주쳤고, 그들의 상황을 아주 흥미로운 것처럼 엿보는 자들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차라리 잘된 일일지 모르겠다. 여러 사람에게 재차 설명할 일이 생기지는 않을 테니.
“지호 씨는 어떻게 된 거야?”
“여왕이 처음 계획대로 그 몸을 가로채려 난입했겠지. 도중에 막을 수 없었으니 이후부터는 그쪽 싸움이야.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도중에 막는 계획을 너희가 방해했잖아!”
“애당초 서로를 믿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놈들끼리의 계획이었어. 내 주인은…….”
준우는 습관적으로 어떤 단어를 뱉었다가 멈칫했다. 그는 무엇이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목을 쓸어내렸다.
“이제는 아니지. 옛 주인이었던 것은 거의 다 죽어 가고 있었어. 그러지 않았다면 도플갱어와 협조하지도, 놈에게 자기를 맡기지도 않았을 거다. 공통의 목적이 있어서 가능했던 협조였고, 덕분에 도플갱어는 멋지게 목적을 이루었지.”
“퀸 패러사이트를 사냥하는 게 처음부터 놈의 목적이었단 말이야?”
“뒤에서 세운 우리 계획은 그렇게 거창하지 않았어. 어차피 죽어 가는 괴물 하나 좀 미리 죽이겠다는 게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니었지. 그 과정에서 어떤 헌터 하나의 희생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너 이 자식!”
“지금 이지호 헌터를 죽이면 여왕의 정신체 역시 같이 죽음을 맞이할 거다. 정신과 육체의 연결이 훼손된 상태이니 본체를 공격할 수도 있을 거고. 그렇다면 일이 훨씬 쉬워.”
보현이 또 자기를 칠 것을 미리 알고 있던 준우는 그 손을 가볍게 잡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화를 내지? 혹시 저 헌터가 내 자리를 대신하게 됐나? 네 취향이 그런 연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 함부로 하지 마, 이 새끼야.”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임보현. 여왕이 저 몸을 차지한 뒤에 다음 재앙은 괴물들이 넘어가지 못했던 세계가 될 거야. 거기에서 수천, 수만 명이 죽고 난 다음에야 한 사람만 희생하면 될 일을 키웠다고 후회할 테냐?”
“네가 지호 씨를 죽인다고 여왕이 죽어? 그런 것도 아니잖아!”
“적어도 지금 당장의 상황은 모면할 수 있지. 언젠가 또 이지호 헌터 같은 놈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네 앞은 아닐 거 아니야. 다른 놈들이야 어떻건 사실 크게 상관없어. 네 안전이 중요하지.”
본래의 도준우라면 도저히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발언이다. 보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와중에, 박 팀장이 불쑥 둘 앞으로 걸어왔다.
“저기, 할 말이 있는데.”
준우는 눈만 옆으로 굴려 박 팀장을 확인하곤 슬쩍 물러났다. 여전히 자기 목을 문지르는 것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자체가 낯선 모양새였다.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발언권을 허락받은, 그러나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은 박 팀장은 서둘러 상황을 전했다.
“우린 안정기 전에 외부에서 지원 들어온 헌터들입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코드 레드 신호와 헌터들 신호가 거의 겹쳐지듯이 잡혀서, 위험 상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보통은 전투 상황에 나서지 않는 정신계 헌터들도 오고…….”
“짧게 해.”
“여러분 모두 밖이 지금 혼란 상태라는 걸 알아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이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던 정보가 풀려서.”
“뭐야?”
경악이 들린 건 다른 쪽이었다. 거기서 보현과 준우의 대화를 듣느라 최선을 다해 휴식을 취하지 않던 일부 헌터들과 달리 김 반장을 발견하기 무섭게 현장 상황을 전달한 특수반 인원들 덕분에 김 반장이 박 팀장의 말에 대답한 꼴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의미상으로는 전달하고자 한 것이 그대로 전해지기는 했다. 김 반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곳에 온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뭘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