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238화 (239/260)

238화

27. 기억들

“지호야, 얘. 너 안 늦니? 바쁜 아침에 왜 멍하니 서 있어?”

“어?”

교복 블라우스에 팔을 끼워 넣던 지호는 정신을 차렸다. 시계를 보니 벌써 일곱 시 반이 넘었다. 지호는 펄쩍 뛰며 엄마가 챙겨 준 소시지 빵을 홱 낚아채 신발장으로 뛰어나갔다.

“얘는, 앞집 소민이는 고등학교 다니던 내내 새벽같이 학교 갔던 거 모르니? 좀만 일찍 일어나면 될 걸, 이불에서 느지럭느지럭하다가…….”

“나 늦었어!”

지호는 가방을 메고 신발에 발을 대충 끼워 넣은 뒤 후다닥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 나왔다. 대학에 가면 1교시 수업 같은 건 만들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지윤이 모자를 꾹 눌러쓴 채 집을 나서다 지호와 마주쳤다. 둘 다 지각이라, 둘은 눈인사만 대충 하곤 정류장으로 달렸다.

스쿠터를 타고 나타난 하나가 헬멧을 지윤에게 던지며 그를 픽업해 간 뒤, 지호는 초조하게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버스를 기다렸다. 학생들로 빼곡히 찬 버스 안에서 운전기사가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만원이라 열리지 않고 지나가는 문에 지호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버스에 타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발을 구르던 지호 앞에, 검은 차가 한 대 멈추었다.

“오늘도 지각이야?”

창문이 내려가며 보인 반반한 얼굴에 지호는 잠시 머뭇거렸다. 누구였지? 아는 사람인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느낌이 든다.

걱정하지 마. 네 친구야.

“어, 버스를 놓쳐서요.”

“가는 길이니 내려 줄게. 빨리 타. 빵빵거린다.”

모르는 사람 차에 타면 안 된다고 배웠지만, 아는 사람처럼 보이니 타도 괜찮지 않을까? 여차하면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이기도 하고…….

지호는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박순자 사범님이 이런 못된 생각 하는 걸 알면 잘하는 짓이라며 운동장 몇 바퀴는 굴렸을 것이다. 운동하는 사람이 일반인한테 손대면 안 된다고 귀가 따갑도록 들었는데.

차가 막힐 시간이었지만 놀랍게도 지호는 버스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호를 내려 주며 남자가 인사했다.

“끝나고 데리러 올게.”

“네?”

“금방 다시 보자, 알았지? 그때까지 지지 말고.”

차가 휙 떠났다. 아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 너머에서 그의 이름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렇지, 민도훈. 그런 가명을 쓰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더라. 방금 한 말은 무슨 뜻이지?

의문은 촘촘한 현실 사이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지호는 바쁘게 수업을 듣고 공부하며 오래도록 익숙했던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낯설고도 그리운 기분이었다. 분명 매일 학교와 체육관을 오가며 평범한 하루를 보냈을 텐데 왜 낯설다는 기분이 들까? 모를 일이다.

“지호야!”

그를 부르는 친구의 얼굴이 보이자 지호는 금세 낯선 생각들을 흘려보냈다. 모두가 기다리던 바로 그 시간. 먼저 먹겠다고 복도를 내달리는 것조차 묘하게 그리워 이상한 기분이었다.

“다들 먹는 거 진짜 좋아한다. 그치?”

“너도 뛰었잖아.”

“다들 가는데 나만 뒤에 있을 순 없잖아. 사람들은 정말 이상해. 굳이 정해진 장소에서 음식을 배급받아야 하는 이유는 뭐야?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급식 도적이라도 되겠다, 뭐 그런 선언이야? 하긴 나도 특식 나오는 날엔 급식소 털고 싶긴 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음식을 받기 무섭게 식판을 허겁지겁 비우고는 배를 두드리며 나오니 음식을 마신 것과 다름없는 시간이 흘러간 뒤였다.

식후엔 산책이지, 하며 친구들과 운동장을 돌다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구조대 차량이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었다. 학교 옆을 지나가는 구조대 차가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구조대 복장을 한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진 않았지만, 지호는 그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알 것 같았다.

“지호야, 매점 갈래?”

“어? 어어.”

“어디서 무슨 일 났나 봐. 약한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라니까.”

“뭐 말이 그러냐. 우리도 당장 땅이 꺼지고 사고 터지면 누가 도와주길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는데.”

“그래? 나한텐 사회 구조란 게 참 이상하게 느껴지거든.”

“밥 잘 먹고 하는 말이 콘셉질이야? 나도 시험 보고 내 점수가 만점이 아니라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긴 하지.”

구조대 차량은 금세 멀어졌다. 지호는 밖에서 일어난 일은 잊고 금방 수다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행복이 차올랐다. 어제 슬픈 영화라도 봤던가? 먹먹한 기분에 가슴 한구석이 묘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름칠되지 않은 톱니가 억지로 맞추어져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던 친구의 질문들을 곰곰이 생각하던 지호의 고민은 성난 목소리에 뚝 끊겼다.

“이지호, 여기서 뭐 해. 수업 안 들어가? 너희도 종 친다. 빨리 올라가!”

쳐다보는 것만으로 모두를 서두르게 하는 이주리 선생이 호통을 쳤다. 지호와 친구들은 빨리 올라가자고 장난치며 달려가다 우당탕 넘어졌다. 무릎이 쓰라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통증이다. 원래 이 정도는 금방 나아야…….

“많이 까졌다. 양호실 들렀다 가자. 다음 시간 한문이야. 좀 빼먹어도 괜찮아.”

안 가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호는 양호 선생님을 꽤 좋아했으니까. 수업을 합법적으로 빠질 좋은 핑계이기도 하다. 친구와 함께 양호실 문을 연 지호는 이쪽을 발견하자마자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보현에게 인사했다.

“땡땡이 아녜요! 넘어져서!”

“도둑이 제 발 저리나 보네. 상처 좀 보자.”

소독약이 상처에 닿으니 따끔했다.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 주는 손은 다정했고. 처치를 마친 보현은 시계를 확인하며 손짓했다.

“얼른 수업 들어가. 네 담임이 또 나 귀찮게 하러 오기 전에.”

“찬민 쌤이랑 사이 좋아 보이시던데요?”

“그게 사이좋은 거면 주리 쌤 동생하고는 도원결의 맺을걸.”

보현은 완강하게 둘을 양호실 밖으로 밀어냈다. 지호는 보현의 쌩쌩한 얼굴을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대체 왜 좋은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오늘은 좀 이상한 하루다. 여러 가지로…….

항상 졸던 수업에서 마찬가지로 꾸벅꾸벅 졸았고, 숙제해 오는 걸 깜빡하는 바람에 수행 평가 점수가 깎였다. 지호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그렇게 오래전에 냈던 숙제인데 까먹을 수밖에 없지 않으냔 생각을 떠올렸다. 고작해야 일주일 전에 나온 숙제였는데도 그랬다.

“지호야, 청소 당번?”

“어? 어. 과학실…….”

“같이 가자.”

친구가 지호의 팔짱을 끼며 다정하게 웃었다. 낯선 기분. 지호는 저도 모르게 멈추어 그 아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등 뒤에서 빛이 비쳐 얼굴이 어둡다. 하얗게 빛나는 것 같은 느낌.

“청소 같은 걸 해야 하다니 정말 비효율적이네. 나는 깔끔함에 대한 인식 같은 건 아무리 정보를 얻어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되더라.”

“너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만 한다?”

“좀 느꼈어? 대화가 통하는 녀석들이 떠나간 이후로 고등한 지능 가진 것들과 이야기하는 일이 드물었거든. 내가 대화에 꽤 굶주려 있다고 봐도 좋아.”

“콘셉질도 좀 이상하고……. 안 하던 짓…….”

거기까지 이야기하던 지호의 동작이 멈추었다. 이상했다. 지호는 친구가 그렇게까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 얼마 안 되는 친구의 이름까지 잊고, 하던 행동이며 습관까지 잊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안 하던 짓을 하냐, 고 물으려던 지호는 그것이 옳은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친 지호는 비어 있는 친구의 명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우리가 언제부터 같이 있었지?”

“응?”

“네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뭐야, 이상한 농담을 하네.”

친구는 웃으며 팔짱 낀 손을 풀려 했다. 그러나 그 팔을 꽉 붙든 채, 지호는 덤덤히 질문했다.

“내가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정말 행복했어. 모든 순간순간이 기적 같았어. 그래서 있었던 적 없는 일들도, 있을 리 없는 순간들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거야.”

오늘 온종일 지호와 함께한 친구다. 버스를 타고 그를 지나치기도 했고, 수업을 함께 듣기도 했고, 밥도 함께 먹으며 온 곳을 다 돌아다녔다. 그러나 여전히 지호는 그 아이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만히 받던 친구는 싱긋 웃었다.

“모르지 않을 텐데. 까먹을 걸 까먹어야지. 지호야, 나 아파.”

“그래서 내내 생각했어. 잘 생각나지 않던 사람들도 떠올려 보면 생각이 났거든. 누구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사람들인지. 왜 여기 있는지 의문스러워도 그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았어.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는 거야?”

“네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조금씩 이상해.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이야길 하지 않아. 그건 꼭, 인간 아닌 무언가가 내놓는 의견 같아.”

해가 저물며 주홍빛으로 물든 빛이 복도를 비스듬하게 비추었다. 친구의 태도가 워낙 부드럽고 상냥했기에 지호는 팔에 가했던 힘을 풀었다. 손을 놓고 난 뒤에는 묘한 죄책감이 그를 괴롭혔다. 거스르면 안 될 것을 거스르는 듯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 같은 기분. 지호는 자신을 빤히 보는 눈에서 고개를 아예 돌려 버렸다.

“역시 여기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가야 해.”

“왜? 오늘 즐겁고 행복했잖아. 네가 바라던 시간들이잖아.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잖아.”

“맞아. 정말 좋았어. 너무 좋아서 울 것 같더라. 그런데, 그래서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 삶은 이렇게 보드랍고 포근한 순간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니까. 혹여 진짜 내가 겪을 수 있던 하루였다면, 온전히 행복으로만 차 있지는 않을 거야. 이것들은 내 그리움으로 빚어진 것처럼 온통 따스함뿐이야. 굴곡 없고, 다툼이나 아픔도, 힘듦도, 괴로움과 슬픔도 없지.”

“그러면 안 돼?”

명확하고도 간결한 질문. 지호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의 것이 아닌 손이 거기 있었다. 지호는 힘주어 주먹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남아 있어.”

“네 가족은 다 죽었는걸.”

친구의 말과 함께 바깥이 어두워졌다.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처럼 하늘이 울었다. 새카맣게 어두워진 하늘이 마치 균열 속 같다. 지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에게서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아냐.”

“아니라고?”

“가족만이 지켜야 할 사람인 건 아냐.”

지호를 흉내 내듯 떠올라 있던 미소가 스르륵 지워졌다. 미소를 짓지 않은 얼굴이 본연의 표정 같다. 지호는 그 아이가 자신을 붙잡아 끄는 것에 반항하지 못한 채 그를 쫓으며 질문했다.

“어디 가?”

“다들 믿진 않지만, 나는 평화로운 방법을 꽤 좋아하는 편이야. 대화 같은 것도 그렇고, 원하는 환상 속에서 살게 하는 일들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나만 평화를 원한다고 평화가 유지되는 건 아니거든. 알잖아?”

친구가 벌컥 문을 열었다. 평화롭던 학교 풍경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며 피비린내가 훅 풍겼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냄새에 토악질이 올라와 지호는 하마터면 속을 게워 낼 뻔했다.

거짓으로 건축된 일상이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무너져 내렸다. 지호는 한때 그의 하루를 행복으로 채워 주었던 사람들의 시신이 곳곳에 널린 것을 보며 뒷걸음질 쳤다. 친구는 깔깔 웃으며 손뼉을 쳤고, 그때마다 손바닥에서 반짝이는 빛 같은 것들이 흩어졌다.

“이형 에너지…….”

“그렇게 부르나? 이상한 이름이네.”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그 존재만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가 싱긋 미소 지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잊고 있었던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

곁에 선 모습은 아주 친숙하고, 그와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설다. 지호는 아주 오래전인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던 어떤 순간을 상기했다. 지호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애썼다.

“김 반장님이 보여 준 적이 있어. 네 과거, 기억들……. 정신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여왕의 취미가 아주 하찮은걸.”

최선을 다한 비아냥은 별 효과가 없었다. 여왕은 어깨를 까딱이며 느릿하게 답했다.

“본체를 마주했다가 미치고 싶은 거니? 애당초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소꿉놀이로 네 경계심을 누그러뜨려야 할 만큼 정신력이 강하다고는 듣지 못했어.”

“누구에게?”

시체뿐이었던 공간에서 거칠게 붉은 액체들이 솟아올랐다. 거의 폭력에 가까운 환상 구축에 지호는 역겨움을 느꼈다.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지호의 정신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대단히 효과적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속에서 재구축된 눈알 괴물을 본 뒤에 내보인 분노와 증오가 그 증거였다.

“도훈 씨는 그가 형제들과 협조해서 네 호위대를 잡았다고 했었는데.”

“그 쓸모없어진 나약한 종복들은 언제고 정리할 필요가 있었어. 이제 강하고 튼튼한 새것을 얻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나는 물건이 아니야.”

“나도 물건과 대화하는 취미는 없단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호위대가 아니라 여러 감각이었어. 아무리 작은 것들이어도 그것들이 하나씩 잡아먹히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지. 이 녀석은 내가 자길 너무도 또렷이 볼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결국 제일 먼저 돌아와 발치에 엎드렸단다. 잘못을 뉘우치겠다고 해서, 너를 요구했어.”

“무슨 개소리야.”

“그리고 이 쓸모없던 녀석은 마지막만큼은 아주 유용한 일을 해 주었지. 너와 연결된 바로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좀 아쉬운 일이야. 지금처럼 대화를 나눌 새가 없었지. 네가 기절해 버려서.”

지호는 여왕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여왕 또한 지호가 자기 말에 심어 둔 힌트를 빠르게 알아챘다는 것을 깨닫고 즐거워했다.

“나는 똑똑한 녀석들을 좋아해. 어차피 내 것이 될 지혜잖니. 알아서 현명하게 성장한 모습을 보면 아주 기쁘고, 가끔은 식욕이 돋아 어쩔 줄 모르겠어.”

“내가 깨어 있다는 뜻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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