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지호는 눈앞의 괴물들을 경계하면서도 그의 주의력 한 자락을 균열 밖 여왕에게 할애했다. 놈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외부에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강해진다. 일전에 포식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의 괴물들을 속이기 위해 뿌리는 이형 에너지가 근처를 채우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퀸 패러사이트가 제일 먼저 허덕였다. 보현도 얼추 비슷했다.
“네가 저 괴물들의 수법을 알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다.”
멀찍이 선 도훈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말했다. 지호는 그것이 어떤 작용인지 알고 있었다. 약한 괴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해, 가까운 곳에 남은 괴물이라곤 코드 레드와 옐로우 태그를 부여받은 것들뿐이다. 퀸 패러사이트는 거의 벌벌 떠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손을 뻗었다.
“형제야, 우리가 하나씩 맡으면 된다. 네게 강한 것을 양보하마. 구미가 당기겠지? 오랫동안 노려 왔다는 걸 안다. 항상 네 냄새가 났어.”
도훈은 대답 없이 지호를 응시했다. 보현은 뒤쪽으로 슬슬 움직이는 납작한 괴물과 그 꼬리에 매달린 인간의 시신을 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죽은 사람 붙들고 역겹게 뭐 하는 짓이야, 망할 새끼야!”
방벽을 펼친 상태였기에 감지 파장을 멀리까지 뻗을 수 없었던 지호는 그의 시력으로도 잘 분간되지 않는 먼 곳에서 꿈틀거리는 모종의 그림자들을 발견했다. 사람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사람의 모양 아닌 것과 함께 있기도 했다. 생존자들이 움직이다 괴물과 마주친 모양이었다.
여왕의 힘에 눌려 도망치면서도 생존자들을 공격하는 괴물들의 행태에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살기 위해 그저 먹고 먹힐 뿐인 것들에게 분노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허탈한 마음도 들었다. 지호 역시 그들의 생태계 한 축을 차지할 뿐인 괴물 중 하나일 테고.
어떤 예고나 전조도 없이 충돌이 시작됐다.
“흡-!”
방벽을 때린 힘이 생각보다 무지막지했기에 지호 역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지호는 당황하며 놈을 노려보았다. 전갈 같은 모양새에 앞발을 집게가 아닌 촉수처럼 휘두르는 놈이었다. 꼬리 언저리에서 여자아이 시신이 달랑달랑 흔들린다. 또 쇄도하는 공격. 보이지 않도록 배 부분에 숨기고 있던 촉수가 부지불각에 튀어나와 방벽을 거칠게 할퀴었다.
균열과 반쯤 융합하여 이끼에 가까운 재질로 변하고 있던 아스팔트 바닥 덕분에 지호는 충격을 길게 버티지 못하고 쭉 밀려났다. 덕분에 보현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버티며 균형을 잡아야 했다. 공격 보조보다는 공격에 익숙한 보현이었으나 지금은 앞으로 튀어 나갈 상황이 아니다.
재차 휘둘러지는 검은 채찍. 이형 에너지로 이루어진 방벽이 닿는 대로 미세하게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골치 아픈 다리다. 지호는 놈의 공격 패턴을 분석하며 빈틈을 노려보았다. 공격은 매서우나 방어는 허술하다. 어쩌면 함정일지도 몰랐다. 혼자였다면 한 번쯤 공격해 볼 법한 지점이었으나, 뒤에 보현을 두고 있어 섣불리 뛰어나가기 어렵다.
어쩌면 좋지? 지호의 머리에서 두 가지 감정이 충돌했다. 그때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렸다.
계속 시선을 끌어. 싸우지 말고 버티면서.
지호는 너무 놀라 하마터면 도훈 쪽을 돌아볼 뻔했다. 다시 날아오는 일격. 심지어 도준우가 느릿하게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붉어지는 눈. 퀸 패러사이트가 또 놈의 몸을 이용하려 드는 모양이었다.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까? 지호는 몰려오는 위기감에 황급히 뒤로 돌아 보현을 번쩍 안아 들었다.
“언니, 공격 맡아요!”
서 있는 것이 버겁다면 서 있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드는 수밖에. 엉겁결에 지호의 품에 안긴 보현은 곧 지호가 보고 있던 것이 어떤 상황인지 빠르게 파악하곤 도끼눈을 떴다.
방벽을 내리찍는 일격은 매서웠다. 심지어 준우의 몸을 조종해 날아오른 퀸은 신체 계열 능력자 특유의 무게와 속도로 위에서 내리찍는 일격을 수차례 가했다. 지호는 버티던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망치로 못을 내려찍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그 와중에 방벽을 집요하게 찢어발기려는 귀찮은 공격들까지.
보현의 날카로운 공격이 놈들을 향해 날아갔으나 신규 코드 옐로우의 빈틈은 함정이었고 도준우의 몸을 쓰는 퀸은 그 움직임을 아무렇지 않게 피했다. 심지어 퀸 패러사이트의 본체를 향해 날아간 공격은 그것을 보호하고 있던 호위대에 가볍게 막혔다. 보현은 고작 그런 출력밖에 낼 수 없는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지호 씨, 이대로 상대할 순 없어요. 후퇴해야 해요!”
조금만 더 버텨. 거의 다 됐으니까.
보현의 음성에 겹쳐 울리는 머릿속 메시지에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지호는 자기 머리 안에 들어앉은 괴물의 말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 지시대로 반응했다.
“다른 헌터들과 합류해서 상대하면 승산이 있을 수도 있어요. 지금은 아녜요. 여왕의 존재감 때문에 숨쉬기도 힘든데, 저것들을 상대하다가 최악의 사태를 맞닥뜨리면 어떻게 하냐고요. 내 말 들어요. 지호 씨!”
지호는 자기 멱살을 잡아 뜯으려는 보현을 달래며 속삭였다.
“시간을 끌어야 해요.”
“뭐라고요? 미쳤어요?”
“제게 해가 가는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
말의 주체는 도훈이었으나 보현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높이 뛰어오른 퀸 패러사이트가 방벽째로 지호를 바닥에 박아 버렸다. 거의 무릎까지 바닥에 처박힌 지호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보현을 놓지 않았다.
“언니, 본래 계획이 뭐였어요?”
“저 개 잡놈의 새끼들이랑 연합해서 여왕의 정신체를 붙잡는 거 말이에요?”
“붙잡고 나서 어떻게 한다고 했죠?”
“그걸 먹어 버리겠다고 했어요. 난 뭐 정신계 주력 괴물들끼린 그럴 수 있는 줄 알았지. 그땐 좀 정신이 없기도 했어요. 자세한 계획은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었거든. 내 얼굴 보고 퀸 패러사이트가 미쳐 날뛰기 전까진 그런 계획 비스름한 게 있었죠.”
정면에서 날아온 공격의 충격이 그대로 다리에 전달됐다. 바닥에 박힌 다리가 아니었다면 한참 밀려났을 텐데, 지호는 어쩌면 다리가 부러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까스로 땅에서 왼쪽 다리를 뽑았다. 딛자마자 통증이 느껴져 곧바로 염동력을 써야 했다.
지호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언제까지 버텨야 하지? 왜 버텨야 하는 거지?
질문을 받아 줄 상대는 사라지고 없었다. 보현 역시 그걸 진작 눈치채고 있었으나 공격에 합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라지는 편이 나았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택한 모양이었다.
마찰과 충격 때문에 피가 흐르기 시작한 다리에서 격통이 느껴졌기에 생각은 간헐적으로 끊겼다. 지호는 미약한 치유력을 다리에 할애했으나 전투에 돌릴 힘도 부족해 지혈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보현이 상처를 볼 수 없어 다행이었다. 그는 여전히 적은 힘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괴물들의 공격을 교묘하게 방해했다.
지호는 그것들의 관절을 향해 날아드는 이형 에너지 화살들과 급소를 찾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나타나는 괴이하고 공격적인 구조물들을 보며 감탄했다. 지호보다 훨씬 적은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보현의 이름이 괜히 헌터들 사이에 회자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한 지호는 공격을 피하는 대신 고스란히 맞아 버티며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 움직이거나 흔들리면 보현에게 방해될 것 같았다.
악문 이에서 으득 소리가 날 지경이라 지호가 참는 것이 숨겨지진 않았으나 보현은 최소한 그의 할 일에 집중할 줄은 아는 헌터였다. 혈관이나 신경이 크게 상한 것처럼 비틀대기 시작하는 코드 옐로 개체와 달리 도준우의 몸은 변함없이 지호의 방벽을 쳐부술 기세였다. 여전히 새빨간 눈.
별안간 몸을 내리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지며 이전보다 좀 편안해졌다. 금방이라도 균열에 여왕이 등장할 것처럼 내리깔리던 에너지가 거두어지고 있었다. 지호가 자신의 속임수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마찬가지로 달아나지 않는 괴물들이 있다는 것을 여왕이 알아챈 것일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지 궁금했다.
지호는 보현을 추슬러 안으며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거의 비슷한 지경이다. 휴식 없이 소모되기만 하며 달려온 상황이라 더더욱.
그러나 지호는 일부러 난폭하게 공격을 튕겨 냈다. 방벽의 모양새가 날카롭게 바뀐다. 공격하는 자를 역으로 공격하는 모양새였다. 물론 퀸은 준우의 손이 상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지만, 오히려 보현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발, 제발 물러나요. 지금 저 새낄 어떻게 할 방법 없다는 거 알잖아요. 뭣 때문에 이렇게 고집을 부려요? 지호 씨답지 않아요!”
머릿속에서 지시하는 목소리와 보현의 음성이 겹친다. 지호는 혼란 속에서 뒤로 펄쩍 뛰었다. 그가 있던 자리를 후려치는 묵직한 일격에 땅이 요란하게 패이며 깨진 아스팔트 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공격이 연달아 들어오자 더 물러날 곳도 없다. 다 깨진 바닥들이 엉망이었다. 통증이 심해진다. 흙먼지가 날려 시야가 짧아지고, 퀸이 도준우의 몸을 좀 더 손쉽게 움직이게 되었을 때였다.
지호는 그가 공격을 피하느라 쓰러진 김 반장과 가까운 위치까지 도망쳐 왔음을 알았다. 다각도로 날아드는 공격이라 이리저리 방향을 틀다 보니 얼추 가까운 위치였다. 낯익은 진동 소리가 들린다. 김 반장의 핸드폰이 계속되는 진동으로 땅바닥에 팽개쳐진 채 진동하고 있었다.
기계적인 주기로 깜빡이는 신호. 지호는 습관적으로 그것이 특정 신호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호가 쓰고 있던 선글라스의 공공 채널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긴 노이즈, 그리고 약간 톤이 올라간 음성.
-해당 헌터 위치 확인. 사냥 팀 예상 좌표 클리어.
소민의 목소리였다. 다 부수고 깨트려 멀쩡한 것 하나 없는 도로 위로 익숙한 이동 능력자들의 에너지가 깔렸다. 곧 나타난 얼굴들이 지호를 당황시켰다. 소민을 비롯한 병아리들뿐 아니라 박 팀장과 다른 헌터들까지 나타난 까닭이었다.
“알파 팀 휘하 임시 사냥 팀 파견 완료. 전투 지원에 들어갑니다.”
박순자 헌터가 서늘하게 말하며 신호했다. 지호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일부 아는 사람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까지 열댓은 되는 자들이 퀸 패러사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모두 지호와 비슷한 정신계 능력 방어 보조구를 차고 있었다. 준우의 몸에서 빠르게 빠져나간 퀸 패러사이트는 노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본체 주변 이형 에너지가 불타는 것처럼 거칠게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전투조 외에도 치료계 능력자들이 더러 지원했다. 병원에 있던 간호사와 눈이 마주친 지호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으면서도 지호를 치료하기 위해 힘을 조절하는 치료계 각성자를 보며 미소를 짓고 말았다.
“고마워요. 여기까지 나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저, 저희는 싸우는 것까진 못 하지만. 이렇게라도 도울 수는 있어요. 다들 필사적으로 싸우는데, 돕고 싶어서…….”
간호사는 지호의 다리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지호는 괜찮다며 말을 얼버무렸다. 쓰러진 김 반장 쪽으로 간 의료 담당자들이 그의 생존을 확인해 주자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