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둘을 부르며 챙길 새가 없었다. 지호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뒤로 뛰기 무섭게 허공을 박찬다. 신체 계열 퓨어 헌터인 준우는 바닥을 박차고 따라 솟아올랐다가 거리가 부족한 것을 깨닫고 감흥 잃은 얼굴로 추락했다. 그가 주차되어 있던 차 위로 내려앉자 그 튼튼하기로 유명한 SUV가 박살 났다. 둘의 충돌은 고작해야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보현은 요란하게 기침하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준우였지만, 그 붉고 선명한 시선은 타인의 것이었다.
“임보현을 손에 넣었으니 저 헌터를 죽이는 쪽이 여왕을 방해하기 적합해.”
도훈은 당황하여 달려왔다. 지호를 추격하려고 하늘로 치솟았다가 방향을 바꾸어 떨어진 탓에 거리가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그건 눈앞에 놓인 문젯거리를 뒤로 미룰 뿐이라고 이야기했잖아. 그래선 안 된다고 합의했잖아. 알겠다고 했잖아!”
“그때는 임보현을 찾지 못했었어.”
“이 멍청한!”
도훈은 준우가 휘두른 팔에 꼼짝도 못 하고 튕겨 나가 바닥을 몇 번이나 굴렀다. 괴물들 사이에 일어난 내분에 김 반장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며 근처 구급차 뒤로 몸을 숨겼다. 보현은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몸으로 덜덜 떨며 검날에 에너지를 주입하곤 힘 있게 소리쳤다.
“망할, 내 괴물이랑 협업이니 뭐니 떠들 때부터 이럴 줄 알았어. 나와! 남의 몸 이용하지 말고 기어 나오라고, 빌어먹을 새끼야!”
이주리 헌터보다 빠르다던 말과 달리 준우의 속도는 보편적인 신체 계열 능력자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붉은 눈으로 보현을 내려다보던 도준우는 피식 웃었다.
“나를 상대하다 죽겠는가? 너를 먹어 기억을 찾으면 그만인 것을.”
지호의 눈이 뒤집혔다. 김 반장은 다급히 환각을 일으키는 힘을 준우의 발 앞에 뿌렸으나 이미 상위 개체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도준우는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일개 민간인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한 김 반장을 무시한 채 보현의 코앞까지 걸어간 준우는 보현을 향해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물론 거기 잡혀 줄 보현이 아니었다.
“도준우, 정신 차려!”
닿을 리 없는 고함이다. 허공을 휘저은 준우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제대로 움직이는지를 확인하는 듯 몸부터 풀기 시작했다. 그 여유로움 넘치는 동작이 보현을 화나게 했다. 그러나 섣불리 공격할 수도 없다. 자신이 지금의 준우에게 상대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의 헌터였으므로.
지호 역시 이를 악물었다. 일전에 준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물론 그때와 경험이 다르고 힘을 다루는 수준도 달라졌겠지만, 압도적인 힘에 격파되어 본 기억이 지호의 발을 붙잡았다. 도훈이 소리쳤다.
“그 헌터를 먹는다고 모든 기억을 찾을 수는 없잖아! 갑자기 왜 계획을 무시하는 거야, 여왕이 목전인데!”
“물론 나는 그렇지. 하지만 네게는 그런 문제가 없다, 형제여. 와서 우리의 할 바를 행하자. 너와 나 모두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질 것 같지 않은가?”
“어차피 뒈질 테니 막 살아 보겠다 이거냐?”
“몸을 옮길 시도 정도는 해 봐도 좋겠지. 근원이 우리와 다른 것들에게라면 더더욱. 너도 그것을 알며 시험하는 것이 아니냐?”
김 반장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그의 시선이 곧장 도훈에게 박혔다. 지호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도플갱어의 정신체가 생각났다. 도훈은 그 말에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부정적인 반응도 없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자신을 막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헌터는 높은 허공에 있고 나머지는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시시한 것들뿐. 준우의 몸을 움직이던 퀸 패러사이트는 익숙하면서도 익숙지 않은 인간들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공포가 별로 없구나. 대부분의 인간은 죽을 때 비슷한 표정을 짓는데.”
절망과 좌절, 공포와 슬픔에 익숙한 퀸 패러사이트는 헌터들을 보며 손을 까딱였다. 의미 명백한 도발에도 두 헌터는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차피 질 싸움을 먼저 걸 필요는 없었으니.
둘이 덤비지 않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까딱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선 퀸의 콧등을 스치고 화살이 내리꽂혔다. 시퍼런 빛으로 이루어진 이형 에너지였다.
“너희들 계획이 처음부터 이거였지?”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거든. 여왕의 표적아.”
위를 흘깃 올려다본 퀸은 지호의 이형 에너지 화살을 밟아 부러뜨리며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발 앞으로 연달아 꽂히는 화살들. 퀸 패러사이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미 죽은 것에게도 연민과 애정을 느끼는 나약한 족속들. 이것이 상할까 두려우냐? 내가 숙주를 잘 골랐군!”
퀸이 땅을 박찼다.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서기 무섭게 보현은 김 반장을 밀치며 반동으로 거리를 벌렸다. 물론 놈이 노릴 상대가 하나뿐이기에 위험 대상을 최소화하자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퀸의 공격이 보현의 방벽을 우그러뜨렸다.
일반적인 방벽이라면 그 세기를 단단하게 만들어 공격한 대상 자체에게 역으로 공격을 가하는 용도일 것이다. 그러나 보현이 아는 준우의 악력은 일반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고, 그 때문에 보현은 최대한 충격을 흡수하도록 방벽의 탄력도를 올렸다. 퀸은 자기가 아는 것과 반응이 다르자 고개를 갸웃하며 주먹을 물렸다.
“잔재주를!”
위에서부터 세 번째 화살이 날아들 때 준우의 눈에서 붉은빛이 설핏 사라졌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보현만 관찰할 수 있었던 변화였다. 붉은빛이 사라지자 준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이형 에너지 화살들을 피하거나 쳐 내는 것은 범인의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도준우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보현이 기억하던 그 눈이 다시금 붉은색으로 물든다. 퀸은 자기 주변을 둘러보곤 혀를 찼다.
“내가 직접 싸우면 이런 묘기는 부릴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렇다고 너를 죽이라는 명도 듣지를 않으니, 참으로 쓸 만하고도 쓸모없는 숙주가 따로 없어.”
보현의 방벽이 실시간으로 얇아지는 것이 눈에 띌 정도였다. 김 반장은 다급히 일어났으나 그의 미약한 이형 에너지 다루는 능력으로는 도준우의 몸을 쓰는 퀸 패러사이트를 막을 수 없었다. 욕설과 함께 일단 뛰어든 김 반장은 당연하게도 뻥 걷어채어 팔 차선 도로 정도의 넓이를 가로질러 날아가 데굴데굴 굴렀다. 보현은 질겁했다. 아무리 형사 출신이니 평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니 해도 김 반장은 일반인이다. 신체 계열 능력자의 공격을 버텨 낼 재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너 이 빌어먹을 새끼!”
“할 수 있는 게 욕뿐이겠지?”
“언니, 도발하는 거예요!”
머리 위에서 지호 목소리가 들렸다. 하마터면 방벽을 공격 태세로 전환할 뻔한 보현은 하늘이 좀 더 어두워졌다고 생각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악성 균열 특유의 확장 작용으로 어두운 하늘이 넓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짜로 주변이 어둡다. 본디 해가 중천에 떠 있어야 했을 시간이기에 보현은 흠칫 놀라며 자기 상태를 확인했다. 정신 공격에 당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착시가 아니란 의미였다.
퀸 패러사이트는 언짢은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보는 것이 지호인지 어두운 하늘 너머의 강대한 존재인지 아는 것은 오로지 그 혼자뿐일 터. 준우의 얼굴을 한 괴물은 낯선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공간과 공간을 넘는 방법만 알아내면, 저 여왕이 무엇이 그리 두렵겠나? 우리 이름을 저당 잡혔다고 한들, 잡히지 않을 세계로 넘어가 버리면 그것으로 그만일 텐데.”
“뒈져 간다더니?”
“거기까지 알고 있나? 입이 싼 녀석이야.”
퀸은 싱긋 웃고는 보현의 방벽에 손을 찔러 넣었다. 보현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계인 것 같았다. 결국, 정신 공격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지호가 퀸을 공격하며 둘을 떼어 놓았다. 보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도준우의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퀸은 그것을 아니꼽게 내려다보더니 혀를 차며 물러났다. 준우의 눈에서 붉은빛이 꺼지며, 그 역시 보현과 비슷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언니 괜찮…….”
보현을 부르려던 지호의 감지 파장에 무언가가 잡혔다. 지호는 있는 힘을 다해 방벽을 펼쳤다. 감지 파장을 거두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라 좀 느렸고, 덕분에 방벽을 반쯤 파고든 거친 공격이 보현의 코앞까지 날아가 박혔다. 지호는 이번에야말로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하며 굴러간 김 반장 쪽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기절한 듯 움직이지 않는 등. 애석하게도 두 사람 모두에게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지호는 그가 쓴 선글라스의 세부 기능가동 버튼을 누르며 자세를 낮추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깔의 번뜩임.
의심 없이 고개를 틀어 그것을 피한 지호는 퀸 패러사이트의 다 죽어 가는 본체를 얹고 있는 또 다른 코드 옐로우 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놈이 전투에서 이탈한 상태라니 잘된 일이다. 퀸의 호위대들은 하나같이 파괴력이 어마어마했으니까.
이형 에너지를 비눗방울처럼 얇게 펼쳐 그들 쪽으로 쇄도하는 정신계 공격을 날려 버린 지호는 재차 주변을 확인했다. 감각만으로 잡아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고, 한 번이라도 잘못 당하면 놈에게 넘어간다. 최악의 경우, 지호는 자기 손으로 보현을 해칠 수도 있었다.
“망할 새끼들…….”
보현이 이를 악문 채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준우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그쪽으로 날린 이형 에너지 구체가 반으로 갈라져 거기에 선 같은 것이 있음이 짐작된 덕분에 지호는 도준우가 퀸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저쪽 전투 인원 추가 배제. 지호에게 도준우의 시위는 고작해야 그 정도 의미였다.
보현에게는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이를 악문 채 퀸 패러사이트의 본체를 노려보았다.
“지호 씨, 우리 둘로는 안 돼요. 계획이니 뭐니 믿는 게 아니었어. 괴물 새끼들 따위를 믿는 게 아니었다고요.”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워하는 도준우와 달리 처음 보는 코드 옐로우는 납작 엎드린 그림자 아래에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쪽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까 대형종에게 한 놈이 죽은 후 다섯 중에 넷 남은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퀸 패러사이트의 촉수에 달린 열매가 둘인 것을 보니 어디서 한 놈이 더 죽은 모양이다. 셋, 그것도 하나는 퀸 패러사이트를 보조하며 나머지는 반항하고 있으니 낯선 것만 상대하면 되는 환경.
그럼에도 방심하기 어렵다. 지호는 여전히 퀸 패러사이트가 직접 그를 제어하려 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도훈이 처음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들의 대치를 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보현은 그쪽을 예의 주시하며 지호의 뒤에 섰다.
“지금도 밀리는데 딴 놈도 합세하면 끝이에요. 탈출할 수 있겠어요?”
“지금 그래도 되는 상황일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