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게이트 열린 위치가 균열 내부로 들어왔다고요?”
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본부 측에서 받은 데이터를 확인시켜 주었다. 멀지 않은 위치였구나. 하기야 지호 역시 성치 않은 몸으로 걸어서 전양련 측 캠프를 발견했던 기억이 있었다.
“악성 균열이 점점 넓어지니까 외부에 열려 있던 게이트가 안쪽으로 들어온 모양이에요. 연구 때문에 게이트를 임시로 열어 외부에서 균열을 관찰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균열 밖에서 여왕으로 추측되는 괴물이 발견된 모양이더군요.”
둘 다 헉 소리와 함께 입을 다물었다. 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형 에너지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보조구 몇 개를 손목과 팔, 목과 발목에 여러 개 찼다. 혹여 한두 개가 손상될 경우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질 수 있어 받은 도구들이다. 지호는 그것이 아주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 균열 내부에서 머리가 터져 죽은 전양련 누군가의 마지막을 잊기 어려웠으니.
“그럼 게이트가 균열 안에 열린 거예요? 바로 탈출할 수 있는 거고?”
“이론대로라면 그럴 거예요.”
“뭔가 잘못된 모양이지?”
김 반장의 질문에 보현은 선글라스를 쓰며 혀를 찼다.
“소수의 괴물이 게이트 근처를 얼쩡거리고 있대요. 덕분에 게이트 외부에서 헌터들이 비상 집결해서 전투 대기 중이고, 그 밖에도 좀 머리 돌아가는 괴물이 게이트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놈들끼리도 의사소통되는 모양이던데.”
“그나마 그 게이트를 여왕이 이용하지 못하게 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 밖의 괴물들은 균열로 들어오지 못하는 거 맞겠죠?”
문득 서늘한 예감이 목덜미를 스쳤다. 지호는 저도 모르게 목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제 머릿속에 있다던 도플갱어가 만약 지호가 얻고 있는 정보를 그대로 가져가고 있다면? 그래서 괴물들이 게이트에 관한 정보를 그들과 함께 알게 되었다면?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짧은 단검과 구급 물품 등을 점검하던 헌터들은 소리 난 쪽으로 달려 나갔다. 병원 앞에 여자아이가 하나 서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괴물이 얼쩡거리는 것도 보였다. 소리를 질러 헌터들의 주의를 끈 환자들 중 하나가 지호를 덥석 붙잡았다.
“헌터님! 저기 생존자 있어요. 구해 주세요!”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단박에 뛰어나갔을지도 모를 상황이긴 했으나 지호는 자신을 붙든 이의 손을 붙잡아 떼어 내며 단호히 거절했다.
“아뇨. 저건 사람이 아니에요. 코드 옐로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다들 창가에서 떨어져요. 저건 정신을 현혹하는 괴물입니다.”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 감지 파장을 최대로 퍼트리자 아는 괴물들의 감각이 다수 포착됐다. 지호는 고갯짓했다. 위쪽. 입구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세 사람은 서둘러 옥상으로 이동했다.
“반장님, 제 머리에 있다는 도훈 씨 정신체가 제 기억도 읽고 막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남의 머리에 안 들어가 봐서 몰라.”
“정신체요? 머리에? 뭐라고요?”
보현이 경악하며 멈추자 지호는 황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지호 머리를 쪼개어 그 정신체를 꺼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눈으로 한참 동안 지호를 노려보던 보현은 이마를 짚으며 욕설을 토했다.
“망할 괴물 새끼들. 우리 정보는 다 가져가면서 이쪽과 협조를 하네 마네 하고 있었다 그건가요?”
“그런 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걸 의식해서 김 반장님도 저한테 구체적인 계획을 안 알려 주시기도 했고…….”
보현은 벽을 거칠게 걷어찬 후에 제 발이 아파 끙끙댔다. 지호에게 치료받으면서도 한참 욕설을 쏟아 낸 그는 사납게 김 반장을 노려보았다.
“그걸 알면서 숨기다니 말이 돼요?”
“알면 어쩌게? 실험실에라도 보내나? 균열 출입을 금지시켜? 손이 하나라도 귀한 판국에 이지호 헌터를? 심지어 정신계 능력자인 내 손으로 가두라고 보고를 올렸어야 했다고? 나도 악성 균열 들어와서야 알게 된 거다. 그 전엔 몰랐어. 알았으면 좀 고려해 봤을 수도 있겠지.”
“그런 소리 아니에요. 적어도 준우가 나타난 후엔 알려 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놈들끼리 같은 편이고, 무슨 계획을 세울 수도 있는데.”
“글쎄. 내가 보기엔 그렇겐 보이지 않던데.”
무슨 말이냐고 사납게 되물으며 싸움을 거는 보현을 가로막은 건 전화라도 온 것처럼 울리는 김 반장의 핸드폰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균열 내부에서 전화 신호는 아주 미세한 진동이 한 차례 울린 뒤 끊어지게 되어 있으니 이건 연달아 오는 메시지 알림일 것이다.
통신이 다시 연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김 반장의 핸드폰에는 확인하지 않은 소식이 쌓여 있었다. 어지간하면 이렇게 연달아 메시지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던 김 반장은 짜증 내면서도 화면을 확인했다가 눈썹을 찡그리며 지호를 돌아보았다. 지호의 핸드폰은 아까 부서졌으니 곁에 선 이 헌터의 이름으로 오고 있는 메시지는 타인의 것이 분명했다.
“생체 인증 정보 외에 타인을 사칭할 수 있을 만한 신호는?”
“어, 제 배지? 도훈 씨가 갖고 있을 거예요. 징하게 안 버리네.”
보현은 김 반장이 보여 준 메시지 때문에 퍼붓던 분노를 멈추느라 씩씩거렸다. 셋은 머리를 모아 그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지호 : 김동주? 이 이름이 맞나? 지호에게 전해 줘라. 핸드폰이 망가져서 새로 주웠는데, 아이디 갱신하고 말고 하기 귀찮아서.]
[이지호 : 퀸 패러사이트가 인간들이 병원으로 이동하는 걸 쫓아가지 않으면 여왕이 오히려 수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어.]
[이지호 : 지금부터 나는 헌터들을 추격하는 척할 거고, 다른 일부는 공격도 할 거다. 아무것도 내주지 않으면서 협조를 원하지는 마. 내 형제는 지금 많이 쇠약해져 있고, 에너지 보급을 필요로 하고 있어.]
[이지호 : 나는 너희를 죽이지 않겠지만, 나만 죽이지 않을 테니 빨리 나오는 게 좋겠지?]
[이지호 : 인간은 아주 좋은 에너지원이야. 손쉽게 사냥할 수 있는 종이기도 하고.]
마지막 메시지를 보기 무섭게 셋은 다시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옥상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난간에 기대어 선 채 핸드폰을 두드리던 도훈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임보현 그를 보자마자 도훈에게 욕설을 퍼부어 댔고, 도훈은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보현을 무시하며 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빨리 나왔네?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친구들을 두고 별다른 맛도 안 나고 영양가도 없는 인간들에게 눈을 돌릴 필요가 없지.”
“제 머리에 뭘 넣은 거죠?”
“아, 내 형제가 널 노리지 않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 네 친구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데, 왜 나한테 화를 내?”
“그럼 이게 화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 아니었으면 네 보호자가 잃는 것은 그의 옛 연인만이 아니었을걸.”
“입 닥쳐.”
보현이 흉흉한 눈으로 도훈을 노려보았다. 몸이 약해진 상태가 아니었으면 당장 뛰어나갔을 성질머리 누르느라 몸이 다 떨리는 것 같았다. 도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쓰던 메시지를 마저 전송했다.
[이지호 : 네 친구가 아는 것처럼 내 목표는 너희를 속이는 게 아니었어. 그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이유로 이 상황이 만들어졌지. 나중에 나를 때리고 욕해도 괜찮아. 하지만 조금만 더 날 믿어 줘. 내가 우리 지호한테 해로운 일을 하겠어?]
지호는 화면을 한참 노려보다가 병원 주차장을 내려다보았다. 코드 옐로우가 어린아이 시신을 흔들며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턱밑까지 차오른 혐오감에 고개를 돌린 지호는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저 스스로는 알지 못하는, 제가 미끼가 되어야 하는 모종의 계획에 또 다른 위험까지 생긴 건데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어요?”
“그래도 나는 사람 취급해 주고 있네. 형제의 부하에겐 반말 찍찍 하면서. 놈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내게 흥미로운 제안을 하더군.”
“무슨 제안?”
준우의 일임이 분명한 미끼를 덥석 문 보현은 둘의 대화에 끼어들며 눈을 부라렸다. 물론 도훈은 그 말에 대답해 주지 않은 채 여전히 지호에게 말했다.
“우선 여기서 일이라도 치렀다가 건물이 무너지면 너희 측 손해 아닌가? 내려가는 게 어때? 나도 멀쩡한 안전 구역 부수는 건 좀 안 내켜. 사람들도 많잖아.”
“사람 흉내 내지 마, 구역질 나는 새끼야.”
“그 친구 설명으로는 우리 지호만큼 사랑스러운 헌터인 것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아주 난폭하네. 저기 저 흉포한 괴물 뺨 몇 대는 치겠다.”
보현은 진짜로 길길이 날뛰었으나 김 반장과 지호가 매달려 간신히 진정했다. 지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두 헌터와 도훈을 동시에 위로 띄웠다. 염동력 사용이 훨씬 능숙하고 여유로워진 덕분에 그들은 깃털이 내려앉는 듯한 사뿐함으로 지상에 내려설 수 있었다.
“이제 무슨 개소린지 말해. 준우가 무슨 소릴 했는데?”
“음, 아주 흥미로운 제안이야.”
멀지 않은 곳에서 괴물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났으니 아파트의 생존자들이 전원 병원으로 옮겨 오기엔 아직 촉박하다. 보현이 야차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도훈을 공격이라도 할 듯 앞으로 한 걸음 나선 순간, 둘 사이로 사람 하나가 뛰어내렸다. 정확히는 사람 모습을 한 괴물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도준우!”
“여왕이 움직인다. 준비는 다 됐나?”
“뭐? 지금? 여기서?”
“옮길 시간 없어.”
준우의 말과 함께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 지호는 몸을 짓누르는 이형 에너지의 감각에 바짝 긴장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림자다. 여왕이 균열을 들여다보고 있는지 놈의 그림자가 기이할 정도로 길게 뻗어 있었다. 지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질문했다.
“뭘 해야 하는데?”
“버텨야지. 이전에 여왕이 너를 이용했을 때 정신을 잃은 상태라 몰랐겠지만, 본디 살아 있는 생물에게 간섭하는 건 당하는 입장이나 하는 입장이나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심지어 그 정신이 이미 다른 괴물을 이겨 내고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인지하고 있는 고등한 개체라면 더더욱.”
도훈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보현이 비명처럼 소리치며 칼을 빼 들었다. 이형 에너지가 코팅되어 날카롭게 날 선 칼끝이 준우를 겨누었다. 정확히는 그 몸에 덧씌워진 것을 노렸다고 해야 옳겠지만.
붉게 변한 눈.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와 자세.
도훈이 길게 설명을 이어 가는 동안 준우의 몸을 차지한 퀸 패러사이트는 잠깐 그 기억을 확인하는 듯 가만히 서 있더니 보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그 헌터였구나. 이 녀석이 달아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참으로 말 안 듣는 녀석이야. 쓸 만하지만 않았어도 진작 폐기했을 것을.”
“준우를 내놔, 더 이상 살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수가 있어.”
“형제여. 이 인간이 있으면 그 귀찮은 계획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 아니냐?”
준우가 도훈을 돌아보며 질문했을 때 지호는 두 괴물 사이에 어떠한 정보 교류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호에게 윙크한 도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붉은 눈의 준우에게 투덜거렸다.
“어차피 그 방법을 알아내서 인간들 세계로 넘어가고 싶은 거잖아. 여왕을 처리하지 않으면 놈은 그곳까지 따라올 거고, 그럼 결국 자유는 얻을 수 없는 환상처럼 우릴 떠날걸.”
준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해 줄까? 지호는 여전히 그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돕지는 못할망정 방해라도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상대가 계획에 끼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준우가 짓지 않을 표정으로 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낯선 괴물은 기계처럼 머리만 돌려 지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든다. 지호가 직감에 몸을 내맡겨 뒤로 펄쩍 뛰어오른 순간, 주차장 바닥이 쪼개지며 보현과 김 반장이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