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지호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혔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김 반장은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잔소리했다.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당장은 눈앞의 일에나 집중해라. 누굴 이용하니 마니 그런 말을 하면서 결심한 얼굴 같은 거 보여 주지 말란 말이야. 당장 중요한 게 뭐냐? 뭔지 모르는 계획에 이용당하기?”
“예? 어, 그것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디서 네 보호자나 할 법한 소릴 주워섬기는 거냐? 네 임무는 너 자신을 잃지 않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알겠냐?”
지호는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도훈이 했던 말대로라면 그를 이용하는 모종의 계획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갔을 텐데…….
대형종이 아파트 건물 하나를 전신주로 후려치는 것이 보였다. 맨 끝 동이다. 사람들의 대피가 끝났을 리 없었다. 지호는 소리 높여 외쳤다.
“엄호해 줘요!”
대상이 확실하지 않은 외침 뒤로 두 정신계 능력자의 에너지가 날아와 충돌했다. 지호는 어처구니없어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도훈을 지목했다.
“날 수 있죠? 같이 가요. 반장님은 상황 파악하고 언니랑 합류해 주세요.”
일반적으로 팀에서 지시를 내리는 쪽은 가장 노련한 헌터이거나 팀원들에게 인정받은 리더인 경우가 많지만, 그 경우는 효율적 능력 배분이 이루어져 각기 할 일이 명확히 나뉘어 있을 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현재 전황을 가장 확실히 파악할 수 있는 능력자로서 팀 아닌 팀의 임시 팀장 역할을 맡은 지호는 빠르게 날아오르며 도훈에게 지시했다.
“저한테 정신 방벽요. 퀸 패러사이트는 근처에 있어요?”
“멀지 않아. 인간들 가까운 곳이야.”
“도훈 씨 계획인지 뭔지에 그놈도 동참해요? 우리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죠?”
“못 믿어!”
전신주가 건물을 뚫고 들어가며 누군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방을 울리는 소리에 대형종들이 느릿느릿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지호는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허공에 멈추었다.
“못 믿는다고요?”
“놈이 나를 못 믿고, 나도 놈을 못 믿지. 그런 관계야. 우린 형제라고 묶이긴 하지만, 서로 부딪치면 둘 중 하나가 필히 죽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뿐인 관계라고.”
포식자를 따르던 대형종이 고함치며 아파트를 후려쳤다. 유리가 깨지고 에어컨 실외기가 추락한다. 지호는 저 건물에 남아 있을 실종자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빠르게 상공으로 치솟았다. 하늘 위로 너무 많이 올라갈 수는 없다. 균열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잘 분간되지 않는 곳이니까.
그 때문에 지호는 아파트 옥상을 지나 십여 미터쯤 떠오른 위치에서 멈추었다. 고소공포증이 없어 다행이었다. 발밑으로 난동 부리던 놈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지호 쪽으로 시선이 쏠린 틈을 타 한쪽에서 튀어나온 것들과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머리가 썩 좋지 않았는지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찍으려는 대형종들의 모습은 잡히지도 않을 벌레를 느리게 내리치려는 곰처럼 보였다. 지호는 그 아래에서 육중한 공격을 민첩하게 피하고 있는 도준우를 발견하곤 눈살을 찡그렸다.
준우는 빠르게 아파트 부근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놈들을 유인해 갔다. 오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 놈들을 끌어내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또 다른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 코드 옐로우 괴물 두 마리가 튀어나와 대형종의 발목을 공격했다. 썩 체계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으나, 혼자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구경만 할 테냐?”
준우가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지호를 깨웠다. 그제야 허공에서 멍청하게 구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호는 자기 옆에 떠 있는 도훈을 돌아보았다.
“왜 저들이 사람들을 돕는 거죠?”
“협력하기로 했잖아.”
“퀸 패러사이트도 그러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 권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벗어난 놈이나 나는 여왕의 눈엣가시 같은 놈들일 텐데. 필사적으로 놈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라고.”
대형종이 건물을 후려쳐 아래에 있던 코드 옐로 개체 하나가 피하지 못하고 깔렸다. 버둥거리다 그대로 밟히는 끝이 끔찍했다. 도훈은 혀를 차며 전황을 확인했다.
“아파트에 붙어 있던 두 놈 떼어 냈고 나머지는 이쪽에 아직 별 관심이 없어. 여기보다는 여왕 앞에 모여 있거든.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면 이쪽으로 올 거야.”
“일단 정리해야겠군요.”
대형종이 짓밟아 휘어진 전신주가 여럿이었다. 이미 전기가 나간 동네니 이 정도 쓰는 게 복구에 큰 지장을 주지 않기를 바라며, 지호는 전신주 서너 개에 염동력을 가했다. 무게 때문에 약간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버거움이다. 그러나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호는 씩 웃었다. 감지계 능력에도 탐지되지 않는 놈들이다. 전에 싸웠을 때도 느꼈지만, 순수 신체 계열이겠지.
고도를 높여 십여 미터쯤 위에 뜬 드론의 위치를 확인한 지호는 그쯤에서 멈추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균열 경계에 닿게 된다. 이만한 무게가 나가는 놈을 섬세하게 다룰 자신은 없었으므로 지호는 알파 팀이 했던 것처럼 급소를 노리거나 방향을 달리 지정하지는 않았다.
다른 급소는 몰라도 정수리 정도는 맞출 수 있겠지. 지호가 선택한 건 무식하지만, 꽤 확실한 방법이었다. 전신주에 가해지던 중력을 거스르던 힘이 사라지고, 이번에는 그것을 돕는 방향으로 힘이 가해진다.
쐐애액! 화살도 아닌 것이 화살만큼 무시무시하게 바람을 가르며 아래로 내리꽂혔다. 준우가 아래에서 시선을 끌어 주며 놈의 움직임을 고정해 준 덕분에 두 놈의 머리로 전신주가 파고들었다. 어떤 것은 퍼억 하고 머리를 뚫고 바닥에 처박혔고, 어떤 것은 살가죽이 두꺼운지 그대로 꽂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윽, 그륵,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던 놈의 무릎이 꺾였다. 머리가 뚫려 절명한 놈보다 좀 더 오래 버틴 대형종은 바닥의 준우를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허우적대다 고꾸라졌다. 끝이었다.
“빨리 합류했어야지.”
바닥에 내려선 지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핀잔을 건네는 준우를 쏘아보았다.
“도와준 걸 감사히 여기셔야죠?”
“이쪽에서 너희를 먼저 도왔을 텐데? 주인께서 신뢰를 사는 것이 우선이라시더군.”
“피차 서로 신뢰 없이 안전거리 유지하죠? 서로 못 믿을 사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준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바닥에 깔린 코드 옐로우 개체의 시신을 살폈다. 으깨져 즉사한 모양. 지호는 퀸 패러사이트의 힘 같은 것이 시신에서 빠져나와 준우의 손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곤 조금 물러났다. 주의해도 이상치 않을 상대였으니.
“방금 그건?”
도훈의 질문에 준우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약속한 것처럼 거리를 벌리는 것을 보고, 지호는 약 십 미터 정도는 떨어져야 정신계 능력자의 영향력에서 안전한 것인지 생각했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뒤에야 준우에게서 대답이 돌아왔다.
“핵이야. 이걸 심어야 주인의 뜻대로 움직이거든.”
“그래? 그럼 살아 있는 상태에서 그걸 꺼내면?”
“글쎄, 시도해 본 적이 없어서.”
“시도해 보면 안 되나?”
준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다행히 두 사람이 부딪칠 일은 더 없었다. 퀸 패러사이트가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다.
어제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쇠약해진 몸으로 그의 숙주에게 기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퀸 패러사이트는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도훈이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것에 반해 이쪽은 정말로 죽어 간다는 느낌이다.
준우는 자신이 회수한 퀸 패러사이트의 핵을 그 주인에게 반납했다. 살아 움직이는 옷자락처럼 나풀거리던 퀸의 넓고 얇은 촉수 하나의 끄트머리에 열매 같은 것이 돋아났다. 지호는 직감적으로 저 촉수에 닿으면 놈에게 세뇌당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아채곤 도훈의 뒤로 슬그머니 몸을 숨겼다. 정신 계통 괴물은 아무래도 영 까다로웠다.
퀸과 모종의 대화를 나누는 모양인지 도훈이 그쪽에 시선을 둔 채 석상처럼 멈추었다.
지호는 퀸 패러사이트를 얹고 있는 괴물과 준우를 제외한 나머지는 미끼로 적을 덮치는 종류뿐이란 사실을 알고 당혹했다. 수가 좀 더 많았던 것 같은데.
“다른 헌터들은 어디에 있지?”
“민간인들 대피시키는 중이야.”
“작전에 협조할 정신계 헌터들은?”
“그 작전이란 게 뭔지 나한테 말한 바가 없어서 정확히 모르는데.”
지호는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두 괴물이 정신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돌아본 준우는 입 모양으로 질문했다. 임보현이 혹시 다쳤나? 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하나부터 열까지 배려라곤 없는 주제에 오로지 언니 한 사람을 위해서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저 태도를 대단히 아니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나마 보현을 위하는 것만큼은 신뢰할 수 있으니, 이 작전에서 뒤통수를 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지호, 가서 우리 작전에 협조할 헌터들을 좀 데려오겠어? 다른 사람들은 할 일 마치고 백업하러 주변에 좀 대기하고. 만약의 경우에는 다 같이 대형종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지금요?”
“어, 당장.”
지호는 얼떨떨하게 고갤 끄덕이며 팔짱을 풀었다. 준우의 표정 없는 얼굴이 좀 신경 쓰이긴 했다. 퀸 패러사이트가 갑자기 보현에게 달려들거나 그를 제압하라고 준우에게 명령한다면, 준우는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을 텐데.
아직도 괴물들이 ‘그 헌터’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서 지호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뛰어내리며 사람들에게 부담된다는 것 때문에 헌터들이 생존자를 나르는 위치가 건물 중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호는 신체 계열 헌터를 백업하며 그에게 얇은 방벽을 걸어 주는 하나 쪽에 내려섰다. 중간중간 퓨어 헌터들 아닌 이들이 띄엄띄엄 서서 혹시 모를 위험을 견제하고, 나머지 신체 계열 헌터들이 생존자들을 안거나 업거나 들춰 메고 병원을 향해 옥상을 밟으며 질주하는 형식의 대피였다.
“언니는 어딨어요?”
“어? 아, 병원 쪽에요. 거기 전문 장비를 좀 써야 할 것 같다더라고요. 김 반장님 올라왔던데 왜 따로 왔어요?”
“상황이 좀, 어. 병원이라고 했죠? 반장님은요?”
“오자마자 그쪽으로 같이 넘어갔어요. 임, 아니 그 임시 대장님이랑 같이 병원으로 넘어갔어요. 둘이 합을 좀 맞춰야 할 것 같단 이야길 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몸 상태 안정이 필요해서 병원에…….”
“고마워요!”
병원과 아파트 단지 사이는 멀지도 않았을 뿐더러 가로막는 괴물이 없어 이동이 손쉬웠다. 지호의 힘 때문만이 아니라 충돌을 예고하듯 스멀스멀 모여드는 코드 레드 개체들, 그리고 저편 너머의 포식자와 여왕 때문에 흩어지는 모양이다. 이 근방에 있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균열이 넓어지기도 했을 터였다.
병원은 꽤 소란스러웠다. 생존자들이 속속 도착하면서 병원 내부가 진짜로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종일 숨어 있던 환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복도에 튀어나온 까닭이었다. 시장 바닥도 이렇게 시끄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 이지호 헌터?”
여전히 핏기 없는 얼굴의 해쓱한 이주환 헌터가 지호를 맞이했다. 문이 사람 손으로 너무 손쉽게 열린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 이들을 위해 남은 집기를 끌어모아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고, 거기에는 염동력 능력자만큼 효과적으로 일 처리할 사람도 더 없었을 것이다.
“벌써 일어나셔도 돼요?”
“그럼요. 이제 일어날 힘이 남았기에 가망 없는 싸움에 뛰어들어야 하는 순간들은 끝났잖아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