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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230화 (231/260)

230화

그의 음성에 섞인 난감한 기색을 눈치챈 지호는 인상을 쓰며 환자들 가운데에 누운 피투성이 헌터를 응시했다. 이주환 헌터는 창백했다. 아무리 치유 능력을 퍼부어도 휴식 없이는 회복이 어렵다. 그나마 치유계 각성자들이 여기 많았기에 목숨이라도 붙어 있는 꼴이다. 너덜너덜해진 헌터 복장과 핏자국이 그의 사투를 말해 주고 있었다.

“도움을 받을 수 없겠네요. 하지만 병원이 안전 구역이 되긴 했어요. 여기 예비 전력은 얼마나 버틸 수 있죠?”

“어 그, 자가 발전기만 돌릴 수 있으면 일주일은 가능할 거예요. 외부 방비만 한다면의 이야기지만…….”

“병원 설비를 전부 돌리면 삼 일이라더군.”

“균열 안정기에 돌입하면 어차피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어요.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겠네요. 여기가 안전 구역이니 이쪽으로 사람들을 데려올 수는 있겠어요. 전부 물리적 방법을 써야 하겠지만…….”

그나마 병원 내부의 통신기가 작동하기에 안쪽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생존 확인 정도는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살았다. 지호는 후자에만 집중하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건물 내부는 안전해요. 이쪽으로 바깥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넘어올 거고요. 혹시 다친 사람이 있다면 치료를 부탁드릴게요.”

“이제 이 헌터님이 좀 쉬실 수 있는 건가요?”

누군가 조그맣게 질문했다. 지호는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보이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에서 안도했고, 개중에는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이지호 헌터가 와 줘서 다행이라는 소리는 무시했다. 누가 왔어도 여기 비전투계 헌터들이 몸 갈아 가며 뛰어들어 죽어 가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을 구하러 가 볼게요.”

주환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었으나 그럭저럭 안전한 은신처는 구했다. 외부로 나가 그림자 호랑이들을 정리하고 나면 부근이 더욱 안전해지겠지.

지호가 사람들을 데려오기에 앞서 외부를 정리하고 오겠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도훈과 김 반장은 갑자기 눈을 피했다. 이 수상쩍은 정신계 능력자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자리를 피해 주는 편이 둘에게 도움될 것 같았다.

병원을 나선 지호는 건물 내부만 훑던 감지 파장을 최대한의 넓이로 펼쳤다. 거의 한 블록 넓이를 확인한 그는 생각보다 많은 괴물의 수에 놀랐고, 그중 은신 개체가 꽤 있다는 것에 더 놀랐다. 병원 문이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았다면 여기 남은 헌터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신체 계열 헌터라지만, 균열이 열리기 전부터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으니 지호 역시 꽤 지쳤다. 친구들과 캠핑을 할 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이렇게 될 거란 생각을 할 수 있었을 리가. 게이트를 넘어갔을 때도 그랬고, 보현의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도 당연히 그랬다.

평범했던 일상은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깨져 나갔다. 도훈의 말처럼, 여왕이 건재하다면 이번 같은 일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러니 도훈과 지호의 친구들이 세웠다는 계획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겠지.

그러나 그림자 호랑이들을 찢어발기며, 지호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호랑이의 머리를 반쯤 뜯어내자 놈의 살점 안쪽은 시뻘겋게 피 흘리며 드러난다. 가죽이나 털이 투명한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지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피에 젖은 오른손을 거칠게 움직였다.

‘나를 이용하면서 정작 내게 비밀이어야 하는 작전이란 게 어떻게 나를 위하는 길이란 말이야?’

호랑이의 척추뼈가 우득 끊어지며 덜렁거리며 달려 있던 머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사방으로 튄 피가 주변에 확실한 영역 표시가 되어 주었다. 감지 파장에 잡히던 놈들은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각기 다른 영역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방향에 통일성이 없어 지호는 놈들을 뒤쫓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방금 떠올렸던 생각이 꽤 익숙하다는 것을 상기하곤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했던 짓들이다.

남을 탓하며 불평할 것이 아니었다. 지호가 여태 보현을 보호한답시고 했던 그 모든 정보 은폐들은 지금 저들이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그때 신호가 연결될 때 특유의 진동이 짧게 울렸다. 어딘가에 중계기 역할을 하는 드론이 들어왔거나 가까운 지역에 전기가 살아 있고, 그 통신망 사정거리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무식하게 쏟아지는 연락들에 지호는 약간 당황했다. 그 와중에 전화가 왔다. 박 팀장이었다.

“네, 이지호입니다.”

-드디어 연결됐네. 상황 어떻습니까?

“아파트가 곧 뚫립니다. 병원에서 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쪽으로 생존자들을 옮기고 싶어요. 지금 신체 계열 능력자들이 볼 수 없는 은신 개체들 사냥 중이고요.”

-상황은?

“총원 열넷이지만 아파트에 같이 있던 헌터들을 제외하고는 이주환 헌터밖에 못 봤어요. 병원에 있던 특수 병동 종사자들 말로는 다른 병실에서 각기 회복하는 중이었다고 들었고요. 아마 사상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기적적인 일이군요. 부상자는요?

“병원에 있던 헌터 다섯 전원이 비전투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반인보단 낫다는 명목하에 사람들을 구하려고 몇 번이나 괴물들과 마주해야 했고…….”

사람들은 고마워할까, 아니면 헌터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까?

갑자기 치밀어 오른 생각에 지호는 말끝을 흐렸다. 이주환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제대로 본 것도 아니다. 침상에 엉망이 된 채로 누워 너덜거리는 몸을 회복하던 헌터의 모습은 자꾸 안 좋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박 팀장의 음성이 차분히 이어졌다.

-안 죽었으니 다행입니다. 운 좋게 특수 병동이 있는 병원이 균열 내부에 있어 다행이에요. 그러지 않았다면 그쪽 병원의 다섯 명은 진작 명을 달리했겠죠.

“상황 보고 들으려고 전화하신 건가요?”

-아, 아닙니다. 이쪽에서 거기 상황을 볼 수 있다는 말을 전하려고 한 겁니다. 생중계까진 어렵지만, 일부 딜레이 된 화면으로요.

“예?”

지호는 당황하여 들고 있던 핸드폰을 부술 뻔했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스 정도는 우그러진 것 같다. 박 팀장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설명했다.

-오디세이 팀 헌터들이랑 같이 있잖아요? 초소형 카메라를 가지고 있거든요. 마이크가 고장 났는지 현장 소리는 안 들리지만요.

지호는 침묵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보았고, 무엇을 알고 있을까? 입 모양을 읽어 대화를 알고 있을 수도 있을 터였다. 여왕의 눈을 피하기 위해 환상이나 전자 기기를 통해 나눈 대화들 정도만 유출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안전할 것이다.

“신호가 끊기지 않았나요?”

-그쪽 상공으로 통신 기기 싣고 있는 드론들이 떠 있습니다. 밀린 데이터를 이제야 전송받고 있고요.

“이제 와서.”

-연락이 늦어 미안합니다. 하지만 균열 퍼지는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고, 더욱이 그쪽에서 일어나면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저희가 본 게 진짜 도준우 헌터가 맞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특정 괴물과 함께 포착되었는데…….

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간략한 언어로 상황을 정리했다.

“죽은 그 헌터가 맞고, 퀸 패러사이트의 수하가 된 것도 맞아요. 하지만 지금 그걸로 입씨름할 때가 아니네요. 신체 계열 능력자분들 출발하셨죠? 저 병원 진입 전에 출발 직전이란 말 들었던 것 같은데.”

-네. 아파트에 도착해서 임보현 헌터에게 현장 지휘를…….

순간 이형 에너지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지호는 기겁하며 몸을 낮추었다가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남은 은신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박 팀장이 여전히 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거기 귀 기울일 상황이 아니었다.

균열 저편, 포식자와 여왕으로 추측되는 거대한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호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빠르게 되짚었다.

이름, 망할 이름! 지호는 욕설과 함께 소리쳤다.

“팀장님, 언니 이름 함부로 부르면 안 돼요. 다른 헌터들한테도 공지해 줘요. 꼭 메시지로!”

-이 상황에 누가 핸드폰을 들여다보겠어요? 아니,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는 건 무슨 소립니까?

“괴물들이 언닐 노리고 있어요. 젠장, 화면 다 봤다고 했잖아요!”

-소리 없는 화면만으로 뭘 어디까지 파악하란 말입니까? 이쪽에서도 상황 파악하려고 전화한…….

“나중에 얘기해요!”

지호는 전화를 부술 듯이 끊어 버렸다. 신호가 뚝 끊어지기 무섭게 간신히 버티던 핸드폰 뒷면이 툭 분리되었다. 기기가 망가지건 말건 지호는 황급히 병원으로 돌아왔다. 대화가 어떻게 마무리된 건지 몰라도 떨떠름한 표정의 김 반장과 도훈이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지호는 소리쳤다.

“당장 아파트로 가요!”

“뭐? 왜?”

“통화가 연결돼서 박 팀장님이 언니 이름을, 젠장. 여왕이 들었을 거예요. 이형 에너지 날뛰는 게 안 보여요?”

지호는 둘의 팔을 덥석 움켜쥐었다. 아마 아프겠지만 배려할 새가 없다. 총알처럼 솟아오른 세 사람은 유성처럼 특정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포식자를 따르는 대형종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는 모양인지 두엇 정도의 대형종 시신이 보였다. 그 아래에 달라붙어 놈들을 뜯어먹고 있는 괴물들도.

그것들은 지호의 기운을 느끼기 무섭게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지호는 바닥에 요란하게 착지하기 직전에 김 반장이 신체 계열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를 허공에 정지시켰고, 도훈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한쪽에 처박히는 것을 보고는 그쪽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다행히 화단에 처박혀 멈춘 그는 낮은 신음과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미안해요. 급해서. 놈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어요?”

“퀸 패러사이트가 이상한 움직임을 포착했다고 말하기 무섭게 네가 갑자기 날 납치하는 바람에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

장거리에서도 대화가 가능한 두 괴물의 조건을 떠올린 지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 드러났던 얼굴은 금세 사라졌다. 지호는 도훈을 벌떡 일으켜 세우며 그를 채근했다.

“뭐래요? 무슨 움직임이?”

“균열 부근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는데. 그리고 지금 균열 코앞에 있는 건 포식자들이야. 놈들에게서 멀어진 거지, 이쪽에 영향력 미치는 게 어려워진 건 아니니까 너무 좋아할 필욘 없어.”

“왜 멀어졌을까요?”

“글쎄. 귀찮은 것들과 부딪치기 싫어서?”

“포식자들이 얼마나 가깝길래 그래요?”

“지금 바로 여기 위쪽에 있는 놈이 있어. 이 균열에 들어오진 못하지만, 균열 자체를 깔고 앉을 수는 있는 놈이라서.”

지호는 도훈이 한 말에 주목했다. 여왕은 균열과 물리적 거리가 떨어진다고 해서 지호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파트 상층에서 신체 계열 헌터들이 팀을 이루어 뛰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부근에 학원이 다수 입실한 고층 상가가 있어 그쪽을 착지점으로 정한 모양인지 열댓 남짓한 헌터들이 일반인들을 업거나 안아 들고 아래로 뛰어내린다. 그들과 달리 충격을 견디기 어려운 일반인들을 배려하여 난폭하지 않은 정도로 움직여야 하기에 이동은 빠르지 않았다.

“아까 제가 핸드폰을 부쉈거든요. 언니한테 연락 좀 해 주실래요?”

“뭐라고? 병원 안전하다고? 그거 아까 내가 이야기했다. 갑자기 신호가 들어오길래.”

“고마워요. 그것도 있고.”

지호는 머뭇거리며 균열 밖 포식자들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결심한 듯, 그는 김 반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훈 씨랑 모종의 작전을 같이하기로 한 게 언니 아녜요? 반장님 외에 다른 정신계 능력자가 더 없잖아요. 뭔진 몰라도 저를 이용한다는 그 계획, 빨리빨리 처리해 주셨으면 좋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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