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26. 계획들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농담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던 지호는 도훈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자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이거 뭐 이상한 종류의 농담이 아닌 거예요?”
“속고만 살았어? 언젠가 거짓말할 때는 꼭 거짓말이라고 덧붙여 줄게.”
“아니, 아니요. 그 말 여기서 필요한 거 아닌가요?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추측건대 아마 내 형제가 모종의 수작을 부렸겠지. 그 후에야 비로소 여왕이 네게 간섭할 수 있게 되었잖아. 우리가 호위대 사냥을 마쳤기 때문에 너는 여왕에게 남은 마지막 몸인 셈이거든.”
지호는 경악하며 물러섰다.
“아뇨, 제 몸은 제 거예요. 놈에게 넘어갈 일 없을 거라고요.”
“확신할 수 없을 텐데. 너는 나나 네 친구의 능력에도 저항할 능력이 없잖아.”
대꾸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다문 지호는 약간 지체한 끝에 엉성한 답을 내놓았다.
“전에 여길 나가라고 했었잖아요. 그렇게 해서 저한테 영향 미치지 못하게 할 순 없어요?”
“이번 균열을 누가 열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여왕은 진작에 네 위치를 볼 수 있었고, 이번 같은 균열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열 수 있을 거야. 시간이야 좀 걸리겠지. 하지만 그때마다 너희가 만든 문인지 뭔지를 열어 도망칠 셈이야? 게다가 그렇게 도망치는 네 위치는 늘 같을 텐데, 여왕이 거길 미리 노리고 부수지 않으리란 확신은 있어?”
지호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도훈이 하는 말이 구구절절 맞았기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제 몸이 필요한 일은 뭔데요?”
“놈이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정확히는 말 못 해.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 줄 수도 있을 텐데, 사실 지금 내 힘이 좀 아슬아슬하거든. 섣불리 낭비하고 싶지 않아.”
“전 지금 당장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야기를 나중으로 미루는 못된 습관 가진 사람들은 제 친구들로 충분하거든요.”
“그 말은 나는 그 친구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인가?”
“제 친구가 되기 위해 그런 못 돼먹은 습관을 갖겠다고 말하지는 마세요. 진짜 나중에라는 말 너무 싫거든요.”
지호는 자기 핸드폰 잠금을 풀어 메모장 상태로 도훈에게 그것을 건네었다. 도훈은 픽 웃고는 메시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짧지 않은 손톱이 화면에 부딪쳐 나는 토독토독 하는 소리가 병원을 채운다.
지호가 서 있는 병원 로비는 깨끗했다. 갓 개원을 준비한 신축 건물 내부라고 보아도 될 정도다. 실내 청소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애당초 실내 청소부는 일정 크기 이상이 되는 물체는 빨아들이지도 않고, 삼키지도 못한다. 이름은 청소부라고 붙어 있지만, 사실 유기물을 흡수하여 소화하고 필요 없는 것을 배출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새로운 개체를 관찰하기 좋은 우연찮은 기회였던 셈이다.
놈은 닥치는 대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였으나 개중 소화하지 못할 만한 것은 도로 토해 냈다. 다만 지나가던 길목이 아닌 곳에 처박힐 뿐이라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처넣고 모른 척하는 것도 청소라고 불러야 하나. 지호는 놈의 이름이 잘못 지어졌다는 생각을 하며 픽 웃었다.
도훈은 말을 끝맺은 화면을 내밀며 지호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 얼마나 개소리를 해 놨는지 보자, 하고 그걸 받아 스크롤을 맨 위로 당긴 지호는 침묵했다.
[확실한 방법은 아니야. 하지만 나와 내 형제가 생을 유지하고 있을 동안 정도에나 시도해 볼 방법이고, 너희 쪽에는 아마 이 정도의 정신계 능력자가 부족할 거라고 생각해. 틀린 말은 아니겠지.]
지호가 아는 정신계 능력자들은 대부분 특수반이고, 그중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김 반장을 비롯한 특수반 사람들은 대부분 균열 구조 작업 자체에 참여하기 어렵다. 전투 능력이 전혀 없다시피 하니까. 끽해야 일반인 정도의 체력적 능력이 전부인 셈이다. 그나마 김 반장은 형사 시절 짬밥이 있어 이렇게 현장이라도 뛸 수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함께 숨어 있거나 괴물을 잠시 교란시키는 정도의 힘 정도나 갖고 있을 텐데.
괴물보다는 인간에게 더 다방면으로 쓰이는 특수반 사람들의 능력을 떠올리며 지호는 화면을 밀어 올렸다.
[죽은 형제는 우리 중에 제일 강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여왕에게서 온전하게 벗어난 상태가 아니었어. 놈을 먹으면서 알게 되었지. 녀석은 여왕의 명령을 받아 인간들을 움직여 균열을 열고 있었어.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수작이 아니라, 그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고. 배신감을 느끼기엔 너무 늦었지. 놈의 일부는 이미 죽었고, 남은 찌꺼기를 집어삼킨 까닭에 정확히 어떤 계획이었는지까진 알기 어려워. 하지만, 놈이 이용했던 인간들의 기억에 관해선 알게 되었지.]
“인간들의 기억이 뭔데요?”
도훈은 마저 읽으라며 턱짓했다. 성질이 급해 대뜸 질문부터 날렸던 지호는 머쓱하게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가 나 된 나들의 기억을 어떻게 가졌는지 알겠지? 놈도 다르지 않았어. 그에게 기억이 남아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죽은 자들이어야 하지. 물론 죽지 않은 이들도 있기는 했어. 그때는 자기가 숙주 삼은 오염체를 통해 외부로 능력을 뻗어 모인 자들의 기억을 살폈겠지. 하지만 그중 유일하게 죽은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인간이 있어. 놈이 오염체를 조종하기 위해 휘둘렀던 기억 속의 인간 말이야.]
지호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주리와 주원의 막냇동생은 결국 죽었고, 죽은 후에도 그 형제들의 마음에 가시처럼 박히고 말았다. 지호는 주리가 동생을 보았단 이야길 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런데 이주리 헌터님이 이 균열에서 동생을 봤었다고 했거든요?”
“어디서?”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 중 하나가 미끼처럼 쓰고 있는 괴물이었을 것 같은데.”
익숙한 이름에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고민한 그는 지호의 말을 부정했다.
“별것 아닌 민간인이 형제를 보호할 용도로 적합했을 리 없을 텐데.”
“그러니까 말하잖아요. 미끼였다니까요.”
“그렇다면 간단하지.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닐 거다. 나아가서는 인간조차 아닐 수도 있어. 삼킨 것 중에 쓸 만한 기억을 추렸을 거고, 각성자의 가족인 사람이나 최소 그 각성 과정을 보면서 죽은 사람의 가족을 먹었을 거야. 기억이야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았겠지. 이름이나 생김새 정도만 기억이 난다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었을 테니까. 게다가 한 번 접촉하고 나면 오염체의 기억을 뒤질 수도 있었을 거고, 전혀 가족 같지 않은 행동을 해도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조작할 수도 있어.”
지호는 경악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도훈처럼 먹은 것 자체를 또 다른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괴물이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쓸 수 있을 법한 방법이라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과가 반대인 거군요. 이주원 각성자님을 이용하기 위해 그 동생을 찾아 균열을 헤매거나 그런 게 아니라, 우연히 먹은 인간의 기억에 각성자에 관한 내용이 있고, 그 각성자와 균열에서 혹은 다른 방법으로 접촉을…….”
“정신계 능력에 저항할 힘이 없다면 더더욱 조작은 쉬웠겠어. 감정만 좀 건드려 줘도 일이 쉬워지지. 게다가 죽은 가족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머릿속엔 늘 그 가족에 관한 기억이 떠다니기 마련이거든.”
“해 본 듯이 말씀하시네요.”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넘어가야 평소의 도훈으로 보였을 텐데, 그는 그저 물끄러미 지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서글픈 일이야.”
“뭐가요?”
“타인의 감정과 기억을 조작할 수 있게 되면, 결과적으로 상대를 의심하게 되지. 내가 심어 둔 기억 때문에, 내가 조종한 것 때문에 내게 호의를 보이는 거겠지? 나를 좋게 보는 그 모든 것은 내가 만들어 낸 거겠지, 하는 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해요. 한 사람 평생 꼭두각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물론 그런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인간이란 자기가 내린 선택에도 자신을 의심하며 이유를 붙이려는 생물이란 말이지. 하물며 타의에 의해 선택해 버린 어떤 결정들은……. 뭐, 정신계 능력자들에겐 그런 고초가 있지.”
도훈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얼버무렸다. 지호는 의심스럽게 그를 응시하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도훈 씨도 전적 있죠? 언젠지 알 것 같네. 손예린 헌터 때요.”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 없어. 마저 읽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헌터들에게 배신당하고 힘겨워할 때, 도훈이 함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울컥 치미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꾸욱 내리누른 지호는 다시 화면을 밀었다. 지금은 그런 것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며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이제 와서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인간들이 급성 균열을 열면서 죽은 형제와 여왕은 균열을 여는 데 들어가는 적당한 힘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 가고 있었어. 아마 이번 악성 균열은 퍼지는 속도가 이전보다 느릴걸? 들어간 에너지가 적을 테니까. 예전엔 아마 있는 대로 퍼부어 대느라 피해도 어마어마했을 텐데, 지금은 목적이 이쪽으로 길을 뚫는 것만이 아니었을 테니. 아무튼, 여왕은 자기가 이 균열을 여는 데 쓴 힘만큼의 정신을 이쪽으로 보낼 수 있어. 그걸 보낸다고 하는 건 좀 어려운데, 정신계 능력을 사용할 때 본체는 보통 멈추거든. 군체가 아니라면 말이야. 다행히 여왕은 군체가 아니야. 그러니 놈이 너를 노릴 때, 그 본체는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는 뜻이지. 좀 다행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악성 균열을 열 때보다는 훨씬 적은 힘을 쓴 건 확실해. 그러니 여왕의 정신체도 딱 그 정도의 힘을 쓰게 되겠지.]
“군체요? 그런 놈도 있어요?”
“전에 본 적 있잖아. 포자처럼 퍼져서 생물을 뒤덮는 놈 말이야. 그런 것 같은 경우엔 무수한 것들이 하나의 정신으로 연결된 것과 다름없어. 여왕이 그런 종류의 괴물이었다면 까다로운 이야기가 되었을 거다. 이런 작전도 세울 수 없었을 거고.”
지호는 복잡한 얼굴로 문장이 더 없는 화면을 몇 번이고 밀어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끝이라니, 결과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이용할지는 하나도 설명되지 않은 셈이었다.
“본론이 빠졌어요.”
“그건 진짜로 너랑 할 이야기가 아니야. 만약의 경우 여왕이 진짜로 네 몸을 차지할 위험이 있잖아. 그때 놈이 우리 계획까지 알고 있으면 문제가 커지지. 그런 상황이 되면 너뿐 아니라 남은 이들 모두 위험해질 테니 아무도 위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은 굳이 하지 말자고.”
“처음엔 저랑 친한 모습 보이면 안 될 것 같다고 하더니.”
“형제들과 의견이 같았을 때의 이야기야. 사실 지금은 죽은 형제도, 산 형제도 온전히 믿기가 어려운걸. 이미 배신한 놈이 있잖아. 두 번째가 없으리란 법도 없고. 지금 한 이야기만 해도 좀 위험한 수준이거든. 이 정도만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지만, 어렵나?”
지호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집 피울 때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짧게 고개를 저은 뒤 김 반장에게 연락했다. 그에게서 돌아온 건 뜻밖의 소식이었다.
[김동주 : 이주환 헌터 찾았다. 암병동 1102호로 와.]
[이지호 : 어, 이쪽으로 내려오시면 안 돼요? 1층에서 도훈 씨 만났어요.]
[김동주 : 좀 와 봐야겠다. 나 혼자 결정하긴 좀 곤란해서.]
지호는 어리둥절했으나 도훈이 있다는 말을 전했음에도 그를 부르는 메시지 때문에 함께 와도 좋다는 암묵적 허락인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지호에겐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그 친구에게 하겠다고 기다리고 있던 판이니, 이왕이면 빨리 마주치는 편이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고 좋지 않을까.
운 좋게 병원 벽에 층수 알림이 음각으로 패여 있었다. 붙어 있거나 걸려 있는 안내판이었다면 여러 소동 끝에 사라졌을 텐데 운이 좋았다.
엘리베이터를 탈 형편이 안 되어 어쩌다 보니 계단을 한참 올랐다. 지호야 거뜬했으나 도훈은 다리를 좀 두드렸다. 그걸 못 본 척하며 문을 연 지호는 뜻밖의 인구 밀도에 당황했다.
“어, 왔냐. 괴물들은?”
“다 처리했어요. 그런데…….”
도훈을 슬쩍 쳐다본 김 반장은 한쪽 침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환자들 쪽에서 고개를 돌려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병원에 전투 가능 능력자가 없었다. 고작해야 이동 능력자, 구현화 능력자, 그리고 대다수의 치료계 능력자가 다였어. 치료계 각성자들이야 당연히 병원 직원들이고, 나머지는 다 치료받으러 온 병자들이다. 제대로 된 전투가 가능했을 리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