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지호가 알기로 부근에서 발견된 대형종 중 이렇게까지 큰 소음을 일으키는 것은 메두사들의 키클롭스뿐이다. 그러나 전자는 전부 사냥당했고, 후자 역시 그것들이 없으니 나타나는 것은 이상했다. 혹여 메두사의 휘하에 있던 놈들이 자유로워진 걸까?
“아저씨, 다른 사람들을 깨워요!”
잠귀 밝은 헌터들은 진작 일어나 눈곱도 떼지 못하고 상황부터 파악하려 애썼다. 승찬은 다른 실종자들을 깨우러 달려갔고, 땅울림 때문에 뛰쳐나온 괴물들이 고함으로 맞서느라 밖이 시끄러워졌다.
잠에 취해 휘청거리면서도 뛰어나온 헌터들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파악하는 사이 창문으로 뛰쳐나가 하늘로 솟구쳤던 지호는 창백해진 채 11층 창가로 복귀했다. 눈썹이 휘날려도 이상치 않을 속도였다. 지호는 창을 걸어 잠가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정찰 임무를 맡은 둘과 아직 깨어나지 못한 소민을 제외한 전원이 간만에 한자리에 모인 셈이 되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다들 모여 봐요. 중요한 이야길 좀 해요.”
연신 쿵쿵거리는 울림 때문에 불안감이 드러난 표정들이었다. 지호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들을 마주하며 헛기침했다.
“다행히 아직 이쪽으로 넘어온 건 아니에요. 여왕처럼 균열 저편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네요.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저건 균열에서 여왕 다음으로 강한 생물체일 거예요.”
“포식자!”
간밤에 여왕과 관련된 정보를 나누었던 김 반장만이 유일하게 놈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우리가 아는 코드 레드 개체나 여왕이 그러하듯, 자기 휘하의 괴물을 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운 나쁘게도 대형종이에요. 포식자들과 달리 이쪽 균열로 들어올 수 있는 놈들 같고요.”
김 반장이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헌터들의 눈초리에 지호는 서둘러 설명했다.
“도플갱어가 반장님께 정신 작용을 통한 정보 전달을 시도한 모양이에요. 과정까진 알 수가 없죠. 우린 정신계 능력자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김 반장님은 간밤에 제게 그 정보들을 전해 주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저는 여왕과 그 자리를 위협하는 괴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알게 됐어요. 모두에게 이런 방식으로 정보를 전했다간 김 반장님이 앓아눕게 되겠죠. 그럴 시간도 충분치 않고요.”
“포식자란 게 뭔데?”
타이밍 좋게 세진과 주리가 11층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숨도 몰아쉬지 않고 엇비슷하게 도착한 서로를 흘깃 보았다가 모인 헌터들 무리에 합류했다. 여러 번 설명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보현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지호는 이형 에너지로 몇 개의 모형을 띄웠다. 지호의 이형 에너지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정신 작용해야 하는 김 반장의 능력과 달리 한 번 시연하는 것으로 모두를 이해시킬 수 있는 종류다. 지호는 그가 보았던 환상을 다시금 펼쳐 보였다.
김 반장의 설명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보인 것에 불과하지만, 지호는 자기가 재차 설명을 토하며 스스로 설득되는 기이한 경험에 매료되었다. 애석하게도 그 감각을 즐길 여유는 많지 않았다. 여왕과 괴물에 대한 보다 직관적인 설명을 들은 하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이형 에너지 자체가 여왕에게서 비롯된 거란 말이에요? 기분이 별론데. 이거 가끔 살아 있는 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사람한테 들러붙기도 하잖아요. 혹시 여왕이 움직이거나 하는 거 아녜요?”
“한때 여왕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힘이다. 여왕이 그 종족을 유지할 힘을 가지고 있을 때는 그 말이 틀리지 않았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르지. 그것은 한때 자신이 애정을 기울여 자기 자식들을 돌보았었던 존재라는 사실을 잊었으니.”
김 반장은 자기 입으로 말한 단어에 낯설어하며 입을 다물었다. 여왕에게 붙일 단어로 그만큼 어색한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애정이라고? 보현은 코웃음 치며 팔짱을 꼈다.
“뭐, 괴물의 근원에 관한 이야기가 새삼스레 급해진 건 아닐 테죠.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이 시점에?”
“저 포식자들은 여왕이 낳은 자식이에요. 하지만 여왕이 그 생식 능력을 잃음과 동시에 종족적 자멸을 맞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식을 낳아 후대를 번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죠. 자신이 강하지는 않더라도 강한 씨를 퍼트려 결과적으로 강대하고 번성한 씨족이 될 기회를 박탈당한 셈이에요. 그 때문에 그들에게 남은 강해질 길은 남은 존재 중에 가장 강한 여왕을 삼키는 것뿐이거든요.”
“패륜아 새끼들이 따로 없네.”
지윤의 거친 평은 모두의 공감을 끌어냈다. 지호는 자신이 옳은 설명을 하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해 조심스러워하며 설명했다.
“포식자들과 싸우려 들면 포식자나 우리 양쪽 다 약해지기만 할 뿐이에요. 그럼 여왕이 이득을 보겠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저들의 싸움을 유도하는 일이지, 저 막강한 괴물들 손아귀에서 몇 명 안 되는 사람을 구하려다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뛰어나가지 말라는 말을 장황하게도 하는걸.”
세진의 말은 비아냥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호가 환상을 현실로 구현해 가며 헌터들의 발을 붙잡지 않았다면 벌써 몇 명은 뛰어나가 포식자의 부하들과 전투 중일지도 몰랐다.
괴물의 존재감은 오싹할 정도로 모두의 감각을 난도질했다. 여왕과 마주하지 않았던 헌터들은 이보다 더한 괴물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저것보다 더한 놈과 어떻게 싸우라는 말이죠?”
다은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삐빗, 하고 연결음이 들렸다. 한 사람의 기기에서 울린 소리가 아니다. 여러 사람의 핸드폰이 동시에 균열 어플의 알림음과 함께 진동했다.
“통신 복구? 전기가 들어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주리의 말대로였다. 부근은 여전히 어둡고, 임시 전력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열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예비 전력까지 완전히 끊겨 버리면 101동이 그러하듯이 다른 동 역시 괴물들의 습격에 고스란히 노출될 것이다. 들어온 소식을 빠르게 훑은 보현은 손을 움직이며 동시에 자신이 정리한 바를 읊었다.
“드론들을 통해 임시로 중계기를 설치했군요. 해당 드론이 파괴되거나 전력이 떨어질 때까지 잠시 연결이 유지될 거예요. 이쪽 상황을 보고 중이고, 신체 계열 헌터들 지원이 있을 거라는군요.”
“그걸 어떻게 보면서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거야?”
김 반장은 혀를 내둘렀다. 보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메시지를 마저 보내고는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신체 계열 헌터들만 지원 올 수 있어요. 외곽에서부터 괴물들을 사냥하는 것이 저쪽 계획인 것 같지만, 우선 이쪽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쪽으로 가닥을 맞추죠. 괴물들과 부딪치면 우리 힘만 소모되는 거 아녜요. 지호 씨 설명대로라면 더더욱 그래요. 신체 계열 능력자들이 지원 올 때까지 각기 흩어져서 사람들에게 대피령을 내려요. 어차피 아래로 탈출할 수 없으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위층으로 모여야 할 거예요.”
“병원 쪽은 괜찮을까요?”
“본래 최소민 헌터가 완전히 회복될 때까진 이동 능력은 없다고 생각해야겠죠. 그쪽에 남아 있을 헌터들 중에 이동 능력자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이주환 헌터의 피로한 얼굴을 떠올린 지호는 이윽고 그가 전투에 그리 빼어난 재능을 가지지 않았었다는 사실 역시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다짜고짜 보현을 서포팅하러 이동당했던 강렬한 기억 때문에 더 그렇다.
“다른 이름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 있는 이동 능력자도 싸움엔 그리 소질이 없어요. 하지만 도망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대부분의 이동 능력자들이 그렇죠.”
작은 음성이었으나 모두를 돌아보게 만들기 충분한 목소리가 헌터들을 돌려세웠다. 소파에 죽은 듯 누워 있던 소민은 가까스로 일어나 이마를 짚은 채 앉아 있었다. 지윤이 황급히 그의 몸을 살폈다. 소민은 손을 저어 동료를 만류하며 말했다.
“이주환 헌터는 저도 좀 알아요. 지호 씨 말대로 도망치는 데 소질이 있는 사람이지요. 다행히 우리는 지금 싸우기보다 도망쳐야 하니, 그쪽에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은데요. 당장은 저보다 훨씬 도움될 것 같고요.”
“그럼 한두 명 정도가 나가서 그쪽 상황을 파악하죠. 나머지는 각자 흩어져서 생존자들을 고층으로 모으도록 해요.”
보현이 상황을 정리하자 지호가 황급히 손을 들었다. 막 움직이자는 명령을 내릴 참이었던 보현은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할 말이 더 있나요?”
“그, 다들 주의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이름에 대한 거예요.”
보현은 얼굴을 굳혔고 사실을 알지 못하는 헌터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다시 지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호는 자신이 온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힘겨워하면서도 설명했다.
“이 균열에는 어떤 이름을 가진 헌터를 쫓고 있는 괴물들이 있어요. 그 헌터는 유일하게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 와서, 괴물들의 세계로 넘어갔다가 다시금 인간들 세상으로 돌아온 놀라운 업적을 갖고 있죠.”
모두의 시선이 보현에게 돌아갔다. 당연히 아는 이름을 따로 지칭할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해하는 자들에게 지호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괴물 중에서도 지능을 가질 만큼 지혜로워진 괴물들은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찾는다고 해요. 그리고 놈들에게 그 이름이란 게 꽤 중요한 의미인 것 같던데요. 제가 일전에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지 말라고 다른 팀에 연락했었잖아요. 하지만 그 이후로도 어떤 이름은 무성의하고 무분별하게 불렸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해요. 누군가를 지칭하려면 불러야 하는 것이 이름이니까.”
보현은 지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급하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보현은 한때 그랬던 것처럼 지호와 놀이터 앞 낮은 철봉에 앉아 옛이야기들을 나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감추어 왔던 이야기를 하느라 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애석하게도 둘에겐 시간이 얼마 없었다. 지호는 보현의 시선을 흘려 버린 채 진지하게 설명했다.
“이름에는 힘이 있다는 말만 알고 있어요.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어떤 식으로 힘이 있는 건지까진 몰라요. 그것까지 알면 제가 여왕이겠죠.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가 알고 주의해야 할 것은 그 헌터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편이 우리에게 이득이 될 거란 사실 정도일 거예요.”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네. 그리고 이제 언니를 우리 임시 대장으로 삼는 게 어때요? 악성 균열을 깨부수고 나갈 임시 팀의 리더인데.”
보현을 이름 외의 것으로 지칭하고자 한다면 그에게 다른 이름을 부여하는 방법도 있다. 간밤 지호가 머리 아프도록 생각하던 것 중 하나였다. 달리 반대할 이유가 없던 헌터들은 임시 대장의 지시에 따라 위치로 달려갔다. 시간이 많지 않았으나 능력별로 페어를 이루도록 팀을 쪼개야 했기에 머리 아픈 작업이 필요했다.
“이주환 헌터 쪽으로 연락되질 않으니 지호 씨가 서포터 한 사람과 함께 병원에 좀 다녀와요. 전기가 나가서 그쪽 역시 여기와 다를 바 없다면 우리 대피 루트는 경계 부근을 목적지로 삼게 되겠죠. 여기가 중심이니 아마 거리는 계속 멀어질 테고요. 하지만 병원이 여전히 안전지대이며, 아파트와 달리 전력 설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면 적은 힘으로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신체 계열 헌터 팀 진입까지 앞으로 십오 분. 움직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