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지호는 당황하여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환상과 대화할 수 있나. 이것은 김 반장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어버버하던 지호는 자기가 방호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방호복 차림이었다. 누군가 지호의 어깨를 팍 쳤다.
“정신 차려. 좌표 정확히 기억하지? 안으로 들어가서 약조한 위치에 필요한 물건 두고 와야 해. 안 그러면 제때 돌아가기 어렵다고. 무슨 말인지 알지?”
지호는 자신이 왜 그걸 알고 있어야 하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착실히 고개를 끄덕인 뒤 무엇인지는 몰라도 몸에 밴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지호는 그의 시각과 청각이 각성하기 전 일반인 상태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의 기억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김 반장의 능력을 통해 타인의 기억을 그대로 체험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니 사람의 감각에만 의존할 수밖에. 심지어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과 다른 행동을 환상으로 구현할 수는 없을 테니까.
지호는 현장의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쓰며 전양련 놈들의 옛 짓거리를 똑똑히 관찰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약속된 위치’에 무언가를 두고 온다. 옮기는 물건의 모양이 제법 익숙했다. 지금은 개량에 개량을 거쳐 지호가 아는 모습으로 바뀌어 갈 그것. 도어 오프너인지 뭔지 하는 직관적인 이름의, 균열 생성기다.
“어어, 조심해. 무겁다. 이거 망가지면 뒷일 책임 못 져. 확장되는 균열은 진짜 컨트롤 안 되는 재앙이라고.”
“그거 악성 균열인가 하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더라. 협회에서 지은 거지?”
“우리가 만드는 건?”
“급성 균열이라고 한대. 균열을 여는 힘의 크기가 달라서 그런가? 우리가 열 때는 넓어지질 않던데.”
전양련 사람들은 마치 평범한 소일하듯이 균열 생성기를 설치하고 있었다. 지호는 자기 몸이 익숙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그가 들어간 몸의 기억이 엔지니어에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을 떠올렸다. 그럴싸했다. 옆에서 괴물에게 효과도 없을 총기를 든 채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일반인에 가까울 것도 같았다.
지호는 이름 모를 이의 몸속에서 그의 움직임을 느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헌터 협회 측 연구원들조차 균열을 지나 괴물들의 세계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면 전양련 놈들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주일만 있으면 다음 기기 작동해. 알지? 좌표 절대 잊지 마.”
지호는 그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유심히 관찰했다.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관측한 것인지도 모를 특정 좌표 지점에 기기를 설치하고 신호를 기다리는 일. 크게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담력은 필요했다. 곳곳에서 괴물 소리가 났고, 수상한 그림자가 움직일 때면 거기 모여 있던 이들은 혼비백산하여 몸을 숨겼다. 지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걸 왜 여기 설치하는 거지?’
지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급성 균열이 열린 횟수가 저 균열 생성기가 발견된 횟수만큼 많았다면 사람들은 여태 문명과 사회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괴물들의 크고 작은 흔적과 자취 속에서도 연합 사람들은 꾸준히 자기 일을 끝마쳤다. 마침내 기기가 작동할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심지어 서로 수고했다며 악수하기까지 했다. 지호는 불가사의한 분위기에 섞이지 못하고 물러섰다. 누군가 지호의 팔을 툭 쳤다.
“어, 수고했어. 처음이라 정신없지? 가족의 흔적은 좀 찾았나?”
지호는 고개를 저으며 당혹스러워했다. 헌터들의 도움 없이도 실종자들을 찾으려던 전양련의 연구가 여기까지 진행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탓이다. 그는 목덜미를 긁적이더니 지호의 방호복 헬멧 쪽으로 머리를 숙여 조그맣게 속삭였다.
“우리가 일부, 아직 추적하지 않은 단서들을 찾았어. 실종자들이 숨은 곳이 있는 것 같더라. 한번 가 볼래? 거기 누구 가족이 숨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잖아.”
지호는 대번에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몸은 그 의사를 따르지 않고 충실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난처한 일이었다. 뭔지 모를 계획과 균열 생성기의 동작 원리를 보려던 참이었는데.
지호가 들어간 몸처럼 대부분은 방호복을 입고 있었다. 용도 모를 기계들이 쌓인 한쪽에 그것들을 운반하기 위한 차량이 열쇠가 꽂힌 채 방치되어 있었다. 지호는 제법 멀쩡해 보이는 차량의 모습에 감탄했다.
여기 들어온 이들이 대부분 각성자였다면 방호복을 비롯한 불필요한 엄폐물들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거운 장비와 도구를 나를 차량은 없는 쪽이 좀 이상했고, 도시 비슷한 환경에서 쓰기에는 SUV 정도도 충분하다.
본디 짐이 가득 실려 있어야 할 차량이 텅 비었다. 아마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균열이 열리고, 그들은 약속한 물품을 챙겨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터.
처음에 지호는 그들이 게이트 기술을 제대로 완성시킨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차량에 탑승하여 조심스럽게 운전하며 그들이 나눈 대화가 지호에게 답을 주었다.
“멀진 않지만, 얼른 이동해야 해. 균열 열릴 때 저기 있어야 우리 살던 데로 돌아갈 수 있어서. 처음 와 보지? 좀 있으면 우리 살던 곳과 그렇게 다른 곳이 아니란 걸 알게 될 거야. 좆같은 괴물 새끼들이 있긴 하지만.”
“생각보다 괴물이 별로 없네요.”
지호는 자기 입에서 나간 말에 놀랐다. 방호복 안에 든 건 남자였다. 지호를 구슬렸던 연합원은 혀를 차며 속도를 줄였다. 걷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이던 차량은 아주 느리게 멈추었다.
“여왕이 그어 준 경계선 너머에는 아주 득실거려. 괴물들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나?”
“아뇨. 뉴스로는 봤어요. 죽어 가던 사람들이 찍은 영상으로도.”
“마주치는 순간 죽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어. 움직이거나 반항할 수 있는 시간조차 찰나지.”
상대는 지호에게 괴물과 마주쳤을 때 느낄 수 있는 온갖 공포심에 관해 설명했다. 물론 본래 지호가 들어가 있던 인간은 상당히 두려움을 느꼈는지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지호 본인은 덤덤히 그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일반인이었던 시절에는 분명 저런 공포를 느꼈었다. 그러나 지호는 최근 여왕을 비롯한 특정 개체들을 마주할 때 외에는 그렇게까지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리지는 않았다.
지호가 굳이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지호의 몸은 알아서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반문했으며, 가끔은 괴물이 나타날까 두려워 몸을 숨기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지호에게 느껴지는 감각에 따르자면 그 괴물은 네 사람을 습격할 만큼 가까운 곳에 있지도 않았으며, 다른 괴물과 전투를 마치고 느릿하게 돌아가는 중이라 이쪽으로 관심을 두지도 않을 것이다.
덕분에 4D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보다 좀 더 생생하게 현장을 체험할 수 있게 된 지호는 드디어 그들에게서 유의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저 균열 생성기가 항상 잘 작동하는 것은 아니야. 알고 있어?”
“예? 그럼 어떻게 됩니까?”
“여왕이 힘을 쓰고 있어서 어지간한 괴물들은 가까이 오질 않는데, 바로 그 힘 때문에 포식자들이 가까이 올 수도 있거든. 그것들이 유일한 여왕의 대적자라고 했어.”
“여왕에게도 대적자가 있어요?”
“출가한 자식들이라던데. 그 어미의 소산을 빼앗으려 하는 괘씸한 놈들이라고. 이 말 여왕이 한 걸 그대로 옮긴 거야. 우리 대장이 여왕과 도대체 어떻게 소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평소였으면 우리도 그 구역에서 벗어날 생각 같은 건 안 했겠지. 하지만 여왕은 우리가 가족들 찾는 일에 관심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 협조할 생각은 없단 말이지. 내 생각에, 우리는 그냥 길을 뚫는 용도로 이용당하고 있을 것 같아.”
이후에는 크게 의미 있지 않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그 와중에 지호는 거기 모인 이들이 가족을 언제 어떤 식으로 잃었으며, 죽지 않았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전양련에 들어와 여기까지 가족을 찾으러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정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들, 마정석의 필터, 설비의 투박함과 비효율성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지호가 보고 있는 것은 현재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이 숨어 있다는 폐허에 도착한 셋은 괴물의 습격을 받았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숨었으나 지호 본인이 공격을 받았다. 저도 모르게 놈의 공격을 쳐 내려던 지호는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음을 느끼며 머리를 꿰뚫렸다.
낯설고 섬뜩한, 그러나 익숙한 감각.
상처 부위와 흘린 피의 양으로 보면 이 몸은 죽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차게 식어 가는 몸을 느끼며 지호는 여전히 그 몸에 머물렀다. 이 환상은 언제쯤 끝날까? 김 반장을 가만히 불러 보았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지호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 있던 다른 연합원 역시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운 좋게 괴물이 끌고 가 뜯어먹기 시작한 것은 옆 사람이었다. 놈이 차에서 시신을 끌고 다른 괴물의 눈에 띄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기에 지호는 홀로 버려진 채 기다렸다.
괴물의 공격에 생존한 두 사람은 허겁지겁 도망쳤다가 뒤늦게 돌아왔다. 지호는 자기 몸을 뒷좌석에 태우고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이들을 느낄 수 있었다.
도로가 평탄하지 않은지 차가 덜컹 흔들렸다. 운전하던 이가 욕을 퍼부었고, 곁에 앉은 사람은 오지 말았어야 했나 봐 하며 패닉 상태로 연신 중얼거렸다. 소리가 작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중얼거림이다.
전에 본 것과는 다른 풍경이지?
묘한 속삭임 같은 소리에 지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김 반장의 음성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아주 익숙한 속삭임.
머릿속 목소리대로다. 이 상황을 어디에선가 보았다. 언제였지? 두 사람이 차를 몰고 다른 길로 들어갔다가 막힌 길을 마주쳐 당황하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차가워진 몸을 억지로 움직이지 않은 채 지호는 가만히 눈을 굴렸다. 뻑뻑한 느낌.
다소 급하게 밟은 브레이크 때문에 몸이 휘청, 흔들렸다. 앞좌석의 두 사람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낮은 목소리로 의견을 나누었다.
“추적자가 가까워. 저놈마저 먹이로 주고 나면 어떻게 돌아가?”
“방법이 있을 거야. 전양련에서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열린 통로가 있다고 했었어. 저쪽 좌표랑 여기 좌표가 거의 겹쳐. 잠깐만. 이 근처다.”
기기를 들고 좌표를 확인하던 연합원이 주변에서 감지되는 다른 이형 에너지를 확인하곤 얼굴을 굳혔다. 지호 역시 근접해 오는 뱀 괴물을 발견했다. 아는 괴물이었다.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두 사람은 황급히 연합원들이 있는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지호는 어이가 없어 그들의 기척이 멀어지는 쪽으로는 주의도 기울이지 않은 채 다음을 기다렸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얼굴 위로 그림자가 진다. 파충류를 닮은 아가리가 으적, 입질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래간만에 먹은 먹이로 포식한 괴물은 식도로 미끄러져 가는 먹이로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시금 어두운 그늘로 몸을 숨겼다. 포식자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배를 채우지 못했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문득, 지호는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었던 적이 없으나, 눈을 뜬 적도 없었던 것만 같다. 지호는 그가 본 기억이 다른 각도에서 본 오래된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구조 작업을 마치고 지쳐 쓰러졌을 때였던가…….
“기분이 어떤가?”
“별로예요.”
지호는 여전히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기묘한 어둠이었다. 허리께까지 찰랑거리며 차오른 것이 지호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물도 아닌 것이 물처럼 차갑고, 발이 보이지 않도록 캄캄한 무엇. 전양련 측 사람이 되었던 환상 속에서 지호는 그들이 여왕과 연합했음을, 그리하여 급성 균열을 열기 위해 괴물들도 물리쳐 가며 작당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는 별개의 이야기다.
“반장님이 저한테 이걸 어떻게 보여 줄 수 있었죠?”
“어떤 괴물이 알려 준 거다. 네가 여왕의 근원에 관해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 뒤쪽 기억은 이미 네가 알고 있던 것들이야.”
“제가 알고 있던 것이요?”
“알잖아. 암시와 속임수로 만들어 낸 기억은 금방 사라져. 하지만 네가 방금 본 것들은 어떻지?”
본디 꿈으로 체험했던 균열 속 어떤 풍경들이다. 그러나 지호는 그때의 꿈보다 더 사실적인 감각을 느꼈다. 마치 진짜로 그 일이 있었던 것처럼.
지호는 제 뺨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아까 머리가 으스러지던 감각이 생각보다 오래 남은 까닭이었다.
“저는 먹혔어요. 그리고……. 먹은 건가요?”
“네 기억을 나한테 묻는단 말이냐?”
“없던 기억을 만들 수는 없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제게 있던 기억을 깨울 수는 있는 거죠? 어떤, 약간의 힘만 가해지면 그게 불가능한 일은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김 반장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지호는 자신의 추론이 틀린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모를 연합원을 삼켰던 괴물의 모습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왕의 호위대인 뱀, 메두사 중 하나였다.
“혼란스럽네요. 저를 먹었던 괴물의 기억을, 그러니까 타인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게…….”
“가능할 거라곤 나도 생각 못 했어.”
“그럼, 저는 누구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