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지호는 그 속 보이는 변명에 속아 주었다. 하필 형제와의 일로 고민하던 승환에게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우애 좋은 아이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깨어났다가 승환을 보게 되면 소란이 일 것이 분명했기에 오래 대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호는 말 돌리는 승환에게 직접적으로 질문했다.
“아이들이 괴물에게 공격당하는 걸 알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거지? 아저씨 보려고.”
“그 층 창문이 열려 있었어.”
“그게 보일 정도면 너도 단지에 들어와 있던 거네.”
“아이씨, 그래.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가로막고 있던 벽이 없어지잖아. 나도 어쩌다 보니 뛰어 들어왔다고. 중간부터 숨죽이고 있던 괴물들이 발작하는 것처럼 날뛰던데, 헌터들 짓이지?”
“맞아. 위험한 괴물 하나를 사냥했지.”
“괴물을 사냥할 줄 알면 헌터가 될 수 있어?”
지호는 침묵했다. 아이는 특유의 발랄함을 숨기지 못하며 조금 들뜬 목소리로 자기 무용담을 떠들었다.
“여기 열리기 전에 우리 집 근처 다니는 놈들도 얼마나 많이 잡았다고. 너도 봤잖아. 나는 뱀들도 잡을 수 있을 만큼 솜씨 좋은 사냥꾼이란 말이야. 배를 오래 곯은 적도 없어. 준우 형이 나한테 싸우는 법을 가르쳐 준 건 처음 몇 번뿐이야. 그 형 바빠서 자주 오지도 않았고. 내가 무슨 괴물들을 잡았느냐면, 뱀이 물론 제일 많긴 했지만…….”
지호는 아는 괴물 모르는 괴물 설명이 다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 주었다. 한참 자기 사냥감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던 승환은 지호가 툭 던진 말 때문에 금세 시무룩해졌다.
“심심했겠다.”
“말을 잊을 만큼 오래 지났었을 거야. 혼자 오래 있으면 그렇지.”
지호는 그와 만났을 당시 승환의 말이 어눌했던 원인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일전에 추측했던 바가 맞았다. 그러나 축 처졌던 아이의 꼬리는 의지를 가진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아무튼, 헌터들만큼 괴물 잘 잡아. 내가 더 잘 싸울 수도 있을걸? 어떻게 해야 헌터 할 수 있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한참 고민하던 지호를 대신해, 뒤에서 누군가 대신 답을 내어놓았다.
“아쉽게도 그쪽에게 맞는 전투복은 없을 것 같군. 전투복이 잘 어울려야 헌터가 될 수 있거든.”
지호와 승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한밤중에 물이라도 마시러 나온 모양새로 하품하는 김 반장이 서 있었다. 그에게서 위협적인 느낌을 받지 못한 승환은 고개만 갸웃했다.
“괴물 중에도 입고 있는 애들 있던데.”
“그걸 잘 어울린다고 말하긴 어렵지. 한때 헌터였던 것들이 변하기 전부터 쓰던 거잖아. 거적때기와 다름없게 걸치고 있거나 누더기라고 부르는 쪽이 어울리는 것들이 상당수인데.”
“준우 형은 아니야.”
“그쪽은 제적됐어. 은퇴랑 비슷한 거지.”
협회 명단에서 사망자의 이름이 지워지기는 할 터였다. 지호는 김 반장이 익숙하게 둘러대는 것을 보며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아이를 다루는 데 꽤 소질이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그 방식이 부드럽거나 친절하진 않았지만.
승환은 꼬리로 바닥을 팡팡 두드리며 불만을 표했으나 자기에게 어울리는 전투복이 없다는 말 자체에는 수긍했다. 그러나 불만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다.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괴물만 잘 잡으면 됐지, 옷이 뭐가 중요해?”
“불난 집에 뛰어드는 소방관 복장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구조대라고 생각하겠지만, 맨몸으로 뛰어드는 이들을 보면 화재 난 집에 사는 사람이거나 재난 중에 한탕 치려는 도둑일 거라고 의심하게 되지 않겠나?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용도로 복장은 꽤 유용하거든.”
“괴물이나 헌터나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우리는 먹기 위해 사냥하지는 않거든.”
승환은 결국 설득당했다. 섬세하게 무언가를 조작하기에는 투박한 손끝으로 창문 걸쇠를 여는 데 성공한 아이는 어두운 실내를 쓱 둘러보고는 갈래, 하는 짧은 말과 함께 밖으로 뛰어내렸다. 묵직한 착지 소리 때문에 아래에 있던 괴물들 사이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사람처럼 행동하고 움직이는군.”
“죽은 줄 알던 시기가 꽤 어릴 때였다고 들었어요. 괴물로 변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야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그 시간 동안 사람들 속에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 괴물로 변이했다면 괴물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아는 그 시점에 멈추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싸한 추측이야. 실제로 각성자들 중에는 나이 헛먹은 새끼들이 많거든. 각성했던 그 나이대에 박제되어 버린 것처럼 구는 경우가 많지. 멀리 보지 않고 네 보호자만 봐도 알잖아. 나이는 진짜 어디로 먹었는지.”
지호는 짧게 웃었다. 지호가 보현의 이름을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한 시점부터 김 반장은 단 한 번도 보현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다른 헌터 모두에게까지 주의를 요할 시간이 없어 모두가 지킨 규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신뢰할 만했다.
“이야기하는 거 시끄러웠어요?”
“아니, 잠이 안 와서. 아주 피부가 저릿저릿할 정도로 이 일대를 감시하고 있는 놈이 있거든.”
“여왕이겠죠?”
“퀸 패러사이트일 수도 있지.”
“놈의 힘은, 어, 세뇌하거나 자기 수족으로 부리는 쪽에 치중되어 있지 않나요?”
“도준우 말로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야.”
익숙한 이름에 지호는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다. 반쯤 죽었다 살아난 후에 정신을 차려 보니 준우와 보현이 함께 있었으니, 그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도준우가 돌아왔지. 괴물들이 그들의 지배자에게 반기를 들 예정이고……. 또 설명이 필요한가?”
“당연히 필요하죠. 제가 일어나고 김 반장님이랑 보현 언니가 그 새끼랑 뭔가 이야길 나눴잖아요. 긴 대화는 아니지 않았나?”
“그렇게 부르는 걸 보니 도준우와 이미 안면이 있었던 모양이군.”
“어, 그. 친한 사인 아녜요. 나쁜 놈이던데요. 언니가 아까워요.”
김 반장은 피식 웃었다. 지호가 준우를 지칭한 단어 때문이다. 다 찢어진 훈련복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은 지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앉아 있었지만, 그의 신체 곳곳에서 일어난 괴변이 현상을 목격한 김 반장은 도무지 안심하기 어려웠다.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전해 들었기에 더더욱.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정확히는, 보여 줄 게 있어서 왔다고 해야 옳겠지만.”
김 반장의 손이 느릿하게 지호 머리에 올라왔다. 당혹감에 눈을 깜빡이던 지호는 그가 괜찮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미약한 두통 후에 여러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남의 것을 읽을 수도 있지만, 보여 줄 수도 있구나. 그러고 보니 김 반장이 주리의 기억을 보여 주려고 보현의 집에 와 있다가 이 일에 휘말렸다는 것이 기억났다.
지호의 눈앞으로 기이한 환상이 펼쳐졌다. 감은 눈꺼풀 너머에 투영되는 영상이었다. 김 반장의 조곤조곤한 음성이 나레이션처럼 따라붙었다.
“여왕에 관한 이야길 좀 하자.”
지호는 그것을 김 반장이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문을 던질 새도 없이 피어난 환상 속 빛의 꽃이 지호의 주의를 빼앗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피어난 꽃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미세하게 깨어졌다. 맺힌 이슬들이 사방으로 튕기듯 흩어지는 빛들.
“한때 여왕은, 그에게서 비롯된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모체였지. 괴물들의 몸이 균형 잡히고 효율적인, 가장 최적의 형태를 유지하며 모두 닮은꼴이었던 시절도 있었어. 어떤 싸움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그랬지.”
“어떤 싸움이요?”
“그래. 여왕과 같은, 혹은 그보다 더 강한 존재들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 우리가 그런 강대한 것들의 눈에 띄지 않는 건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거야. 반항조차 못 해 보고 전 인류가 급사했을지도 모를 일인데.”
지호는 김 반장이 어디에서 이런 이야기를 알아 왔는지 궁금해졌다. 도준우에게 전해 들은 걸까? 하지만 그 역시도 퀸 패러사이트의 수족일 뿐, 보다 오래된 이야기들을 알지는 못할 터.
빛으로 된 꽃들은 퍼졌다 뭉치기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치며 그 빛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봄날 목련꽃이 순백을 상실하고 추락해 썩어 가는 모양새가 빠르게 반복된다. 수북이 쌓인 갈색 잎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쑤욱 몸을 일으켰다. 여왕이었다.
“본래의 자신도 잃고, 생물로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한 재생산의 능력을 빼앗긴 여왕은 점점 변질하였지. 그나마 자신이되 자신이 아닌 것들의 힘이 그 주변에 남아 있었지만,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왕의 뜻대로 움직이는 힘은 아니게 되었어. 여왕 자체가 본질에서 멀어진 까닭이었지.”
여왕으로 추측되는 그림자 주변을 반짝이는 빛들이 춤추며 맴돌았다. 지호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 덕분에 그것들이 이형 에너지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들은 여왕이 움직이는 대로 모습을 바꾸었고, 주변을 메우고 있으며, 동시에 결코 여왕이 원하는 대로는 따라 주지 않는 독립적이고 변덕스러운 힘. 한때 여왕의 것이자 여왕의 본질이었으나 그에게서 벗어난 힘.
“여왕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어. 재생산이 끊기자 그는 절박해졌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다른 방법이 필요했고, 여왕이 자기 몸을 쪼개어 가며 새로이 빚어낸 피조물들은 그 기대에 못 미치는 것들뿐이었지. 그가 빚은 존재들은 한때 여왕의 힘이었던 것에 영향을 받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이했어. 그 돌연변이 작용 중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 또한 존재하지.”
여왕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빛이 반짝이며 흔들리는 모습만 남았다. 어떤 두 개의 사람 그림자가 다른 방향에서 불쑥 솟아났다. 함께 걷던 둘 중 하나가 무언가에 놀라자, 나머지 하나가 곁에 선 이를 위해 몸을 던진다. 그림자를 습격한 어둠은 전신을 꿈틀거리며 소화 작용을 시작하곤, 이내 자신이 먹은 인간의 형태로 서서히 모습을 바꾸었다.
지호는 숨죽인 채 그 모습을 응시했다. 각성이구나. 직관적인 영상들이 재차 눈앞을 내달려 사라진다. 그 그림자들과 같은 무수한 선택을 한 자들이 사방에서 내달려 지호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공간이 탁 넓어진다. 지호는 어느 도시 고층 건물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도시의 풍경은 아니다. 괴물들의 세계에 융합된, 이리저리 뒤섞여 아무것도 아니게 된 도시가 거기에 있었다.
“여왕은 각성자들의 존재를 흥미롭게 생각했어. 다른 괴물보다 빠르게 변이하고, 또 손쉽게 다른 존재를 집어삼켜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것들. 그러나 본디 아무런 능력도 없어, 가장 약한 괴물의 이빨에도 찢기고 마는 것들. 여왕이 그들에게 호기심을 가졌을 적기에, 놈들이 그 앞에 나타났지. 아마 그 새끼들도 자신들이 살아남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놈들이요?”
도심 저편에서 사람들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지친 몸에 피로 가득 쌓인 얼굴들. 모르는 얼굴이지만, 아는 얼굴이었다. 김 반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짧게 덧붙였다.
“전양련 놈들이야. 아마 여러 문건과 자료를 통해 놈들에 대한 정보를 봤을 거다. 협회 요직에도 일부 앉아 있지.”
“말도 안 돼. 어떻게?”
그 말을 뱉은 순간, 지호의 정신은 전양련 사람들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빽 비명을 질렀고, 그러자마자 옆에 서 있던 자에게 입을 틀어 막혔다.
“미친, 죽고 싶어? 입 닥쳐!”
지호는 그토록 생생한 감각은 처음 느낀 탓에 당황했다. 김 반장의 환상이 때때로 감각 교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다급한 얼굴의 양배추 연합 놈들은 지호의 비명 때문에 근처로 오는 괴물이 있는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소리에 민감한 괴물이 없는 모양이었다.
“조심해. 여왕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우리가 분수를 알고 주의하는 동안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