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복수심이 눈앞을 가리는 상황에서조차 사람들 구하는 일을 잊지 않았던 헌터답게 보현은 우선순위를 등한시하지 않았다. 둘은 고층으로 향하며 거의 모든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망치지 못한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세진과 하나가 제 몫을 다하며 사람들을 통솔한 것이 분명했다.
약 십여 층을 올라오며 남은 사람이 있는지 수색하던 두 사람은 드디어 한 무리의 생존자들을 발견했다.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따라오지 않았던 건 다른 헌터들을 믿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못했다. 사방이 부상자다. 지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밀치고 앞으로 나갔다.
“하나 씨? 최세진 헌터?”
괴물이 들어온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자상과 비슷한 상처 입은 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둘러싼 채 내려다보고 있는 한 구의 시체까지.
당황한 얼굴의 하나는 그제야 사람들 뒤로 가득 차 있던 생존자들이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세진 역시 긴장으로 부풀었던 어깨에 힘을 풀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적절하게 지원 와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왜 괴물 올라오는 아래층보다 이쪽이 사태가 더 나빠 보이죠?”
두 헌터가 난처한 얼굴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본 지호는 시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보현은 근처에 떨어진 칼을 발끝으로 툭 치며 중얼거렸다.
“괴물에게 조종당한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던 건가?”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 각성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이란 걸 들어 본 적 있어요?”
지호의 질문은 보현을 향했으나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돌아왔다. 생존자들 틈에서 누군가 조그맣게 답했다.
“극단적인 선택엔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가령, 살인이라든가.”
뜻밖의 답에 지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 대형 균열에서 보았던 어느 중학교의 강당이 떠오른 까닭이다. 그때 준영이 알려 주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제가 알기론 착한 사람이 각성한다던 소문이었던 것 같은데요.”
생존자 틈에서 다시 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대신 세진이 지호의 말을 받아 담담히 이야기했다.
“근본 없이 떠도는 온라인의 소문은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겠죠. 그리고 헌터 웹에 떠도는 정보를 진짜 믿고 칼부림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좋은 소문도 곡해해서 이해하지 않았겠어요? 게다가 가끔 헌터 웹에도 꽤 그럴싸한 정보가 올라오기도 하니까.”
전양련이 진짜 정보를 섞어 가며 관리하는 곳들이다. 지호는 아직 그것들이 차단되지 않았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협회가 반으로 갈라졌으니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못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감안해야 할 터였다.
시체를 살핀 지호는 남은 상처가 대부분 자상이지만 일부 타박상이며 사인은 과다 출혈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현은 지호의 말에 동의하며 좀 더 자세한 것들을 짚어 주었다.
“몸에 난 상처들의 각도를 보면 대부분 자해한 흔적 같아요. 괴물 때문에 미친 건가?”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수 있다면 차라리 좋겠습니다만…….”
최세진 헌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무거운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던 보현은 계속 말해 보라는 시선을 던졌다.
“위층에서 농성하려고, 그리고 놈들이 계속 올라올 테니 집에서 나와야 한다고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면서 올라가던 중이었습니다. 집에서 칼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괴물들의 소리 때문에 극도로 긴장한 것 같았어요. 다른 거주민이 그걸 내려놓으라고 요구하자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갑자기요?”
“자기도 각성할 거라고 소리를 질렀다더군요. 저희도 올라가던 도중에 중간에서 누가 비명을 지르는 걸 듣고 내려왔던 겁니다. 위로 올라간 사람들도 꽤 있을 거예요.”
“다른 분들은 왜 안 내려오셨어요?”
지호의 질문에 그 시체를 가리려는 것 같은 모습으로 둥글게 서 있던 생존자 중 하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대부분 이 사람이 휘두른 칼에 찔려서 다쳤습니다. 괴물들이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오면 어떻게 해요. 헌터님들 옆에 붙어 있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부가 열린 가정집을 뒤져 상비약을 챙겨 왔는지 약과 밴드로 엉성하게 상처를 치료한 흔적들이 보였다. 하나는 피로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그리고 괴물에게 다친 것도 아닌데 이런 상황이 생긴 걸 모두가 알게 되면 단체로 패닉에 빠질 것 같아서 제가 주변에 요청했어요. 고맙게도 협조해 주셨고.”
하나와 눈이 마주친 몇몇 사람이 어떻게 해서든 미소를 만들어 내려 애썼다. 괴물과 싸울 수는 없어도 싸우는 이들의 정신적 지지가 되어 줄 수는 있었을 것이다.
지호는 생존자들이 헌터들을 위해 이 사체를 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 냄새 운운한 것도 영 상관없는 일은 아니었겠지만, 지호는 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 호구는 호구를 알아보는 법이다. 상황이 된다면 각성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런 상황을 마주하는 것 자체는 전혀 좋은 일이 아니지만.
“우선 많이 다친 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지호는 가볍게 다친 사람들 외에 칼부림한 자 근처에 있었을 것 같은 중상자들을 돌보았다. 상처만 아물게 할 정도의 엉성한 치료였지만 응급 처치 용도로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녹색으로 흘러나오는 치료의 빛은 평소보다 그 색이 짙었다. 지호의 마음이 다소 긍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차 있던 탓이다. 외부의 이형 에너지가 본인의 선량한 의도를 인식하고 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재차 느낀 지호는 복잡한 기분으로 사람들을 치료했다.
세진과 하나는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보현에게 전달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당 소문이 잘못된 것임을 공지하여 같은 일이 재차 벌어지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누었다.
거기 남아 있던 자들과 위층으로 도망친 이들을 모두 옆 건물로 옮길 즈음에는 헌터들에게도 휴식이 절실해졌다.
구조 작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 까닭에 빠르게 밤이 찾아왔다.
낮에도 어둡던 균열은 밤이 되자 완전한 어둠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보현의 집으로 귀환한 헌터들은 거의 실신하다시피 쓰러졌고, 신체 계열 능력자인 지호와 주리, 세진만이 뜬 눈으로 보초를 섰다. 본디 나누기로 한 대화는 아침으로 미뤄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피로 탓이다. 세진은 1층에서 대기하겠다며 내려갔고 주리는 별 의미는 없겠으나 순찰이나 좀 돌겠다며 올라갔다. 지호는 홀로 11층 창가에 앉아 어둠을 관조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괴물 소리 때문에 헌터들은 몇 번씩 도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잠시 고요한가 싶으면 누군가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악몽 때문에 소리치며 깨어나 사방을 방해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지호는 감지 파장을 짧게 자주 뿌려 가며 외부의 괴물들을 확인했다. 처음처럼 건물 입구를 부술 기세로 밀려들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머리 좋은 놈이 없어 다행이었다. 괴물들 사이의 영역 다툼이 처음보다 줄어든 것은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방해 요소가 될지 알 수가 없다. 신체 계열 능력자의 시야로도 뚫을 수 없던 암흑 너머에서 무언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달도 별도 들지 않는 균열 내부는 어둡지만, 생존자들이 공포를 이겨 내기 위해 켜 놓은 불빛 덕분에 근방을 돌아다니는 괴물들을 식별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근처를 날아다니는 드론들 역시 깜빡거리며 조명을 제공하고 있어 도움이 됐다. 외부에서 이쪽 상황을 살피려 보낸 드론일 터였다.
피로 때문일까. 신체 계열 능력자의 시야로도 먼 곳까지는 보기 어렵던 암흑 너머에서 무언가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지호는 눈을 비볐다. 착각이 아니었다. 창을 기어오른 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지호는 머릿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진짜로 튀어 나가려는 비명은 필사적으로 눌렀다. 그가 놀라면 간신히 잠든 헌터들이 피로를 덕지덕지 매달고 뛰쳐 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호는 가까스로 진정하며 바깥에 나타난 놈을 자세히 살폈다. 흔들리는 꼬리와 익숙한 실루엣. 승환이었다.
창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 그는 의미 명백한 손짓을 보였다. 지호는 짧게 고민했으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괴물들과 맞서 싸운 그의 행동을 기억하고 잠금쇠를 풀었다.
승환의 몸 곳곳이 피투성이였으나 상처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다른 것들의 피로 지저분해진 그는 몸을 핥으며 인사했다.
“안녕. 아까 걔들은?”
“덕분에 무사해.”
“다행이네. 아깐 다친 것 같진 않았는데, 네가 잘 보호했으면 괜찮겠지.”
지호는 승환이 하고 싶던 진짜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닐 거란 사실을 알았다. 본론을 꺼내기 위해 우선 그다지 중요치 않은 이야기를 꺼냈던 승환은 지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꺼낼 이야기는 뻔했기에 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순찰하고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문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 하는 사람이 없어야 해서. 각성자가 되는 방법에 대한 헛소문이 돌고 있나 보더라.”
“형은 괜찮고?”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 해. 불러 줄까?”
“아니.”
“그럼 왜 왔어? 아저씨 보러 온 거 아니야?”
밤 동안 혹시 모를 공격과 기습에 대비하느라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통증을 호소했다. 아무리 신체 계열 능력자라지만 그런 식으로 혹사당하면 오래 버틸 재간이 없다. 지호가 어깨를 주무르며 묻자 승환은 꼬리를 숨기며 지호 옆에 쪼그려 앉았다.
“형이 날 못 알아봤어. 집에 갔는데, 나 살던 데는 다 부서지고 망가졌는데 거기는 멀쩡하더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 집은 분명 망가졌는데. 우리 집이 있었어.”
지호는 그의 혼란을 이해했다. 균열 소멸기 이후 괴물들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문명 일부가 어떻게 거기에 융합되는지 보고 온 자의 판단이었다. 개중에는 온전히 복제되어 저쪽 편으로 이동되는 것도 있었고, 승환이 머물고 있던 그의 집 역시 비슷했을 것이다. 비록 불을 피울 용도 등으로 연료화되기는 했겠지만…….
“나도 너처럼 변하고 있는데.”
지호는 오른손을 내밀어 보이며 담담히 말했다. 승환은 표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로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자기 뒤에서 흔들리고 있는 제 꼬리를 돌아보았다.
“형 집에 내 옛날 사진이 있었어.”
아이의 어조는 혼란스러웠다. 분명 지호 본인보다 머리 하나쯤 큰 체격인데도 지호는 여전히 승환을 아이처럼 느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승찬의 말에 따르자면 지호와 몇 살 차이도 안 날 텐데. 그렇다면 아이보다는 준영과 비슷한 느낌이 나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생겼던가?”
지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승환을 올려다보았다. 비슷한 자세로 앉아 있지만, 아이의 체격은 지호를 손쉽게 감싸고도 남을 만큼 컸다.
“음, 많이 컸나 보지. 시간이 오래 지났잖아.”
“잘 모르겠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가 많이 변했는지.”
실종자들이 괴물로 변하며 겪는 변화들을 알 수만 있었어도 도움을 줄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호는 어린아이가 괴물이 되는 과정에서 겪을 심리적 변화나 물리적 변화 둘 모두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입을 뻐끔거리던 지호는 어깨만 으쓱이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아저씨가 너를 알아봤잖아.”
“형 얼굴은 별로 변한 게 없었거든.”
지호는 짧은 설명을 통해 형제의 조우에서 상대를 먼저 알아본 것이 승환 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승찬의 죄책감 가득하던 얼굴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누군들 그를 탓할 수 있을까. 지호 역시도 죽은 가족이 괴물이 되어 살아 돌아온다면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이 헤어진 지 몇 년도 더 된, 옛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린 사람이라면 더더욱.
지호는 머뭇거리다가 팔을 들어 승환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저씨가 너랑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는데.”
“이야기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잖아.”
“하지만 그러고 싶어서 여기 왔잖아?”
“애들 무사한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동생을 보호하려고 하고 있더라. 그 쪼그만 애가. 기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