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백색 괴물의 몸을 타고 불길이 번졌다. 동네를 거의 직선으로 가로질러 뻗어 있는 흰 선이 온통 불길에 휩싸이자 사방에 불길이 번진다. 괴물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 화재 때문에 죽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어쩌지 싶을 지경이다. 그런 불길을 등진 채 도준우가 서 있었다.
김 반장은 정신 계통 능력자 특유의 눈썰미로 준우의 목덜미에 뻗어 있는 낯익은 능력의 흔적을 읽어 냈다.
“너, 퀸 패러사이트의…….”
“이러다 죽을 거다. 빨리 치료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아무리 너희를 위해 몸을 던졌다지만, 목숨을 두 번 얻는 일은 균열에서도 쉬이 일어나기 어려운 기적이야.”
반박할 여지 없는 말이었기에 김 반장은 황급히 지윤을 불렀다. 신체 능력자 특유의 무게 때문에 지친 몸으로는 지호를 옮길 수 없던 까닭이다. 창백해진 얼굴로 자기 생명력을 다 짜내어 지호에게 치유력을 불어넣던 지윤은 울음을 터뜨렸다.
벼락에 맞아 불타 죽은 사람의 끝이 이렇게 처참할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꼴이다.
몸에서 연신 피어오르는 연기. 심장 뛰는 것이 용할 지경이다.
지호의 몸이 빠르게 괴물의 것으로 변이되고 있었기에 지윤은 자기 생명력을 모두 소진해도 좋다는 기세로 동료의 몸에 힘을 흘려 넣었다. 몸이 변하는 속도가 주춤했다. 이미 보현을 보조하느라 서 있을 힘조차 없던 지윤이 보이기 어려운 성취다. 그러나 지윤은 좀처럼 만족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아주 잠시 멈추었을 뿐이다. 지윤이 버티지 못하면 그것들은 곧 해일처럼 밀려와 지호를 휩쓸 것이다.
그러면 지호는 다른 실종자들과 마찬가지로 괴물로 변하겠지.
“그 도준우 헌터인가? 진짜야?”
김 반장은 떨리는 음성을 숨기지 못했다. 보현과 합을 여러 차례 맞추었던 과거가 있어 그의 파트너인 준우와도 팀을 이루어 움직였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준우는 보현의 전담 보조였기에 말을 섞을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 때문에 김 반장에게 그의 이미지는 그저 보현과 한 세트로 딸려 오는 신체 계열 헌터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준우는 그 대답할 필요 없는 질문에 답을 돌려주는 대신 불길이 타오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네. 도통 상대할 방법이 없던 놈이었는데.”
“왜 살아 있는 거냐고 물었잖아!”
보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다른 질문을 던지려던 김 반장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죽었다 돌아온 이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꽤 고무적이었지만, 대상이 하필 임보현을 은퇴하게 했던 그 파트너라니.
그는 뒤에 기절한 채 널브러진 최소민 헌터를 챙기려고 물러났다. 별것 아닌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고래 싸움에 끼어드는 새우는 없는 법이다.
준우의 뒤에서 불타는 괴물의 몸 못지않게 보현의 눈에서도 불꽃이 튀고 있었다. 준우는 한숨과 함께 도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헌터들과 함께 행동하는군.”
“들었다고? 누구에게 들었지?”
“네가 여기 있으면 안 됐어.”
“너는 되는 줄 알아? 그날 그렇게 사라진 뒤로 내가 얼마나, 도대체 얼마나…….”
보현의 말은 드문드문 이어지다 멈추었다. 그제야 준우의 목덜미와 눈가로 핏줄이 도드라지게 드러난 것이 보였다. 괴물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꽃을 등진 준우는 보현이 자기 상태를 훑어 내리는 것을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너, 살아 있는 게 아니라…….”
“가능하다면 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싶었어. 하지만 저 헌터가 지금 죽으면 계획에 차질이 생겨.”
“계획? 무슨 개소릴 하는 거야. 너 도대체……. 잠깐. 내 눈에 보이면 안 될 게 보이는데. 너 목 뒤에 그거 뭐야?”
준우는 보현의 손이 닿지 않게 한 걸음 물러났다. 김 반장이 그랬던 것처럼 퀸 패러사이트의 흔적을 읽어 낸 보현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보현은 칼을 빼들었다.
이형 에너지로 이루어진 칼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애당초 힘겨운 싸움을 버텨 낸 직후다. 다른 놈을 상대할 여유는커녕 제대로 서 있을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
그런데도 보현은 빼든 칼로 준우를 겨냥했다. 떨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보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겨울 빙판을 거니는 사람의 것처럼 떨렸다.
“퀸 패러사이트의 숙주가 되었나?”
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호가 고통에 몸을 뒤튼 까닭에 그 힘을 이겨 내지 못한 지윤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지윤의 손이 떨어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전기 끊긴 도로를 밝히고 있던 불꽃이 일순간 가라앉았다.
급작스럽게 내리깔린 암흑.
거기 서 있던 모든 생명체가 흠칫 놀라며 특정 방향에서 멀어지기 위해 물러났다. 분명 갑자기 나타난 준우와 그의 상태 때문에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던 분노가 일시에 가라앉으며, 보현은 순식간에 공포를 느꼈다.
산 것들이 숨을 죽이자 한때 모든 것의 근원이었던 존재가 그 피조물의 몸을 빌려 눈을 떴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
익숙한 목소리에 알 수 없는 정신적 언어가 겹쳐 그들의 고막과 정신을 동시에 울렸다. 이지호 헌터의 몸을 통해 바야흐로 드러난 여왕은 서릿발 같은 음성을 토했다.
“용서하겠다.”
제일 가까운 곳에 있던 지윤은 반쯤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백색의 점액질 위로 다시금 옅은 불꽃이 타오른다. 미약한 빛 속에서 지호의 몸을 통해 드러난 존재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일어났고, 어느새 허공에 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 반장이 황급히 지윤을 붙잡아 자기 뒤로 당기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셈이냐!”
몸을 짓누르는 존재감 때문에 자기 존재를 잊고 있던 보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나동그라진 칼이 발치에 걸렸다. 퀸 패러사이트의 힘이 맹렬히 타오르며 준우를 감싸고 있었고, 소민과 지윤을 보호하는 건 김 반장이다. 그러면 보현은?
한때 방심하여 평생 후회할 일을 만들었던 사람답게, 보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눈앞에 번쩍이며 불이 튀었고 감각이 미약하게 돌아왔다. 보현은 가까스로 말을 토해 냈다.
“무슨 용서?”
“내 수족들을 집어삼켜 나를 방해해 왔지. 그러나 어차피 다 망가진 것이었어. 이제 온전한 것을 돌려받았으니 다 지나간 일이다. 내 힘을 탐하는 너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겠다.”
지호의 뒤편으로 언뜻 비치는 막대한 힘 때문에 보현은 자꾸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온몸을 저릿하게 두드리는 강렬한 압박감.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존재였으나 보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보현은 진작 도망쳤으면 벌써 균열 경계까지는 달아났을 거라며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속의 목소리에 욕을 퍼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정도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 고작 한다는 짓이 남의 몸 빼앗기냐?”
대답하는 것만으로 체력이 다 소진되는 기분이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가려는 마음과 뒤로 물러나려는 마음이 충돌해 몸이 기울었다. 자칫 고꾸라질 뻔한 보현의 어깨를 붙든 준우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반가움에 눈물이 날 뻔했다. 언제나 보현이 곤란한 일을 할 때면 내쉬던 바로 그 한숨이었으니.
그러나 동시에 보현은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하며 지호 쪽만 노려보았다. 원수의 수족이 된 준우에게서 도움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준우의 도움으로 갓 태어난 아기 새처럼 바들거리면서도 지호를 향해 걸어간 보현은 그 붉은 눈에서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지호의 손을 움켜잡았다.
여왕의 정신이 보현까지 집어삼킬 기세로 부풀었다. 보현은 해일을 손으로 막으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호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여왕의 짓이 아니다. 손이 으스러질 것을 각오하고 붙잡은 후에도 반응이 없자 보현은 용기를 냈다.
“지호 씨. 거기 있죠? 이딴 거에 지지 마요. 내 말 들리는 거 알아요. 그러니까, 일어나요!”
보현은 솜털 같은 그 존재감에 집중했다. 마주 잡은 손에서 미약한 의지가 전해져 왔다. 지호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한다. 이윽고 닿은 손을 느릿하게 마주 잡아 오는 힘이 느껴졌다.
여왕은 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선언하듯 말했다.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호의 몸이 줄 끊긴 인형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엉겁결에 그걸 받아 들려던 보현은 볼썽사납게 지호에게 깔렸다. 신체 계열 능력자의 몸이라 무거운 건 당연했다.
불꽃이 다시 크기를 키웠다. 열기가 반갑기까지 했다. 안도감 때문에 긴장이 다 풀려 더더욱 일어날 수가 없던 탓에 앓는 소리를 내며 신음하던 보현은 누군가 지호를 일으켜 반듯하게 눕혀 주는 것을 느끼곤 황급히 머리를 들었다.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다. 네 덕분이야.”
준우는 지호를 보현의 옆에 반듯이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이윽고 자기에게 내밀어지는 손을 본 보현은 일그러진 얼굴로 그 손을 쳐 냈다. 준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덤덤히 물러났다.
여전히 심장이 뛰었다. 여왕의 존재 때문에 짓눌렸던 온몸으로 피가 도느라 그랬고, 죽은 줄 알았던 망할 파트너 때문에 가슴이 떨려 그랬다. 보현은 욕설과 함께 혼자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홀로 설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도준우. 왜 나를 도왔지?”
“무슨 질문이 그래.”
“너, 퀸 패러사이트의 숙주잖아. 놈의 지배를 받는 괴물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를 도운 거지? 대체 왜?”
준우는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고작 그런 게 궁금하냐?”
그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 보현을 화나게 했다. 여왕의 힘에 저항할 때와 달리 준우의 목 뒤편은 다시 잠잠했다. 그 평온한 모습은 마치 예전의 도준우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보현은 이를 악문 채 그를 노려본 눈에 힘을 주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어. 네가 왜 살아 있는지, 왜 살아 있었는데 돌아오지 않았는지. 지호 씨는 또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도!”
김 반장은 여왕의 힘에 저항하는 것만도 벅찼을 텐데, 그 와중에 나머지 헌터들까지 보호하다 기절한 것 같았다. 덕분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좀 애매하지만, 드디어 두 사람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쯤 작은, 그럼에도 또래보다는 키가 큰 보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준우는 기계적으로 입을 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너를 위한 거야.”
“개소리 집어치워. 네가 괴물의 수족이 되어 돌아온 게 어떻게 나를 위한 일이야? 그날 이후로 그 괴물 새끼 잡아 족치는 게 내 유일한 목표였어. 알아?”
“차라리 그때, 내가 죽는 게 나았을까?”
말문이 턱 막혀, 보현은 사나운 시선으로만 준우를 응시했다. 차가운 머리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말을 이어 가자고 생각했지만, 울컥 치미는 그리움이 그 성난 이성을 가로막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준우는 느릿하게 말했다.
“너도 알고 나도 알 듯, 그때 나는 거의 죽었었지. 너만 구하는 게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네가 끝까지 살아남아 구조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했어. 하지만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어.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그럼 돌아왔어야지! 균열이 열렸을 때, 사람들한테 네가 살아 있다고 알렸어야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네 말처럼 괴물의 수족이, 아니 괴물이 되었는데.”
준우는 괴로운 듯이 말을 토하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의 눈가에서부터 관자놀이 쪽으로 도드라진 혈관들. 머리를 타고 목 뒤편으로 연결되어 피부 위로 도드라진 핏줄들은 눈살을 찌푸리기 충분할 정도로 괴이쩍었다. 그 와중에 마주치는 시선에 보현은 가까스로 쥐고 있던 분노를 놓쳤다.
“놈을 죽이면 너를 되찾을 수 있어?”
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현은 이를 악문 채 비명처럼 외쳤다.
“그 새끼 죽여 버리면 나한테 돌아올 수 있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