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헌터는 임대 아파트에 산다-216화 (217/260)

216화

보현의 정신 방벽을 뚫고 들어오는 노이즈 같은 힘에 소민의 염동력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렸다. 지호는 몸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느낌에 기겁하며 헌터들을 허공에 띄웠다.

일반적으로 바닥을 밀어 낸다는 감각을 기초로 쓰는 힘이었기에, 아래 좌표를 잘못 잡은 지호의 염동력은 헌터들을 현장에서 밖으로 튕겨 냈다. 억 소리와 함께 나동그라진 다섯은 교회 밖 폐허에 내동댕이쳐졌다.

눈을 누르던 두 사람의 손이 사라지자 앞을 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지호는 일부러 눈을 감은 채 빠르게 일어났다.

“어느 쪽이에요!”

“방벽부터!”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호는 방벽이 아닌 감지계 파장부터 쏘아 냈다. 눈 감고 방벽을 어디까지 쳐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뒤편에 김 반장과 보현, 오른쪽에 지윤. 그리고 약간 떨어진 위치에 소민이 있다. 두 힘을 동시에 쓸 수 있다면! 상황을 파악하기 무섭게 방벽을 펼쳤으나 약간 늦었다. 소민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김 반장은 혀를 찼다.

“장지윤 헌터, 눈 감아!”

“아까부터 감고 있어요! 세상 망할 때까지 감고 있을 수 있음!”

이 와중에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은 지윤 덕분에 지호는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지끈거리던 두통이 가라앉기 무섭게 그는 질문부터 던졌다.

“어떻게 된 거죠? 공격이 안 통했나?”

“그 눈알이 안 깨졌어. 약할 거라며?”

“분명 그랬었는데…….”

소민의 비명이 가까워졌다. 지호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방벽 두께를 늘렸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눈 뜨고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다른 헌터가 뭔지 모를 것에 당하는 것을 알면서까지 그런 호기심에 굴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순간 소민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어차피 네 일거수일투족을 여왕이 지켜보시니. 차라리 엎드려 굴복하는 편이 덜 힘겨울 것을!

소민의 목소리에 놈의 정신이 겹쳐졌다. 그것이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지호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제야 이주원 각성자가 왜 그토록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두 정신계 능력자들이 최선을 다해 막고 있는데도 밀리는 기색이 역력한데, 정신 방벽 하나 없는 그는 당연히 놈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터. 어떻게 균열 외부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까진 알 수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놈은 여기서 죽을 테니까.

“놈이 없어졌어?”

다시 눈알이 있던 위치로 화살을 날리려던 지호는 당황했다. 보현의 동요에 소민이 그답지 않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것이다. 굴복하라. 내 안에서 살 기회를 주지!

“소민 씨 목소리로 개소리하지 마!”

지호는 소민 쪽을 노려보고 싶었으나 눈을 뜰 수 없어 그러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방벽을 두드리는 에너지들 때문에 힘을 거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감지 파장을 뻗어 사라진 눈알을 추적하기도 어렵다. 눈을 언제까지 뜨지 않아야 하지? 악문 이가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소민의 입을 빌려 헛소리해 대는 눈알 괴물 쪽에서 머리를 돌린 지호는 어둠 속에서 생각했다.

놈은 눈물 흘리듯 자신의 몸을 외부로 내보내고 있었고, 균열 상당수에 깔려 있던 것들은 다른 괴물을 움직이지 못하게 조종한다. 그러나 그것들 전부가 곧 눈알 괴물 본체의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는데, 만약 놈이 마름모꼴 괴물들을 뜻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면 지금 헌터들은 여기 멀쩡히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플갱어가 괴물들을 조종했던 것처럼 그들을 덮치면 되지, 뭣 때문에 귀찮게 정신 계통 공격만 계속 해 오며…….

묘한 깨달음이 지호의 머리를 스쳤다.

‘예전에 이주원 각성자가 그랬지. 균열 안에 들어오면 놈의 영향에서 벗어난다고.’

어쩌면 균열 틈을 이용해 거리를 뛰어넘는 편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놈의 힘이 닿는 범위가 그리 넓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놈은 자기 힘이 담긴 모종의 액체를 균열에 넓게 퍼트리고 있는 것이고.

“바닥에 깔려 있던 끈적이는 것들, 계속 있어요?”

“있긴 해. 근데 대부분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우릴 공격하고 있는데!”

“그 하얀 게요?”

“지금은 뱀처럼 뭉쳐 있어. 오른쪽 삼십 도 각도로 충돌 예정!”

보현의 명쾌한 지시에 지호는 충격에 대비했다. 정확히 지호를 기준으로 내려진 지시였기에 뭔가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는 보현의 설명을 쉬이 넘기지 않았다.

“그거네요! 몸이 퀸 패러사이트보다 약하다고 했었죠. 눈알이 본체가 아니었던 거예요.”

분노 섞인 후려침이 방벽을 두드렸으나 지호는 버텨 냈다. 이번에는 알릴 겨를도 없이 재차 찍어 누르는 힘. 그러나 키클롭스보다 약하다. 지호는 놈의 공격을 거뜬히 받아 내며 소리쳤다.

“본체가 저 액체였던 거예요. 불을 질러요!”

발버둥 치는 소민을 붙잡고 있던 김 반장은 황당해하며 지호를 돌아보았다. 물론 눈을 감고 있던 탓에 그 상황을 보지 못한 지호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지금 여기서 불 비슷한 걸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일한 이동 능력자가 당한 탓에 발이 묶였다. 지원이라도 요청해야 할까? 하지만 여기에 어떤 헌터가 지원을 올 수 있단 말인가? 아파트 단지도 다른 놈들로 둘러싸인 채고, 병원 쪽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

이형 에너지로 불을 일으키거나 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던 특수 능력자들의 존재가 한없이 부러워졌다. 지호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뭔가를 생각해 내기 위해 애썼다. 떠오르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바닥의 돌을 형질 변환해서 부싯돌을 만들 수는 있나?

“근처에 편의점이나 슈퍼 같은 거 없어요? 라이터나 부탄가스!”

다 무너진 건물들 외에 근방에 남은 것이 있을 턱이 없다. 손으로 근방을 더듬어 수색하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 김 반장은 고래고래 소리쳤다.

“가스관이라도 찾아봐!”

“말도 안 되는 소릴!”

보현이 질겁하며 김 반장의 팔에 매달리듯 몸을 날렸다. 놈의 힘이 한쪽을 집요하게 공략한 탓에 지호의 방벽 한 축이 무너진다. 성난 들개처럼 밀려드는 촉수 다발에 보현은 비명과 함께 외쳤다.

“지호 씨, 뚫렸어!”

보현의 다급한 음성. 지호는 이를 악문 채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시야가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방벽이 무너진 위치와 지호의 머리가 찢어질 것같이 아파 오기 시작한 위치가 비슷하다. 지호는 핏발 선 눈으로 새빨개진 세상을 노려보았다.

“이지호!”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며 보현과 지윤을 추스르며 동시에 소민을 제압해야 했던 김 반장이 소리쳤다. 위험을 알리는 외침.

지호의 시선이 빠르게 돌아갔다.

눈이 터질 것 같다. 온 사방이 붉었다. 피로 된 수조를 뜬 눈으로 헤엄치는 기분. 지호의 눈에 들어온 건 용케 쓰러지지 않고 서 있는 전신주였다. 그리고 그 위의 전선들도. 지호는 고함을 쳤다.

“좀만 버텨요!”

이전 균열에서의 경험을 통해 지호는 이형 에너지로 다른 에너지들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단 걸 알고 있었다. 방벽을 바닥에 붙여 둔 채 몸만 빠져나온 지호 뒤로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촉수 다발이 따라붙는다. 발치를 바짝 뒤쫓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지호는 온 힘을 다해 전신주를 향해 날았다.

짧은 비행이지만 전력을 다한 가속. 본디 눈알 괴물이었던 흰 액체들이 바닥에서부터 무서운 기세로 몸을 불렸다. 중력이 뒤집히고 놈의 힘이 지호를 삼킬 것처럼 달려든다. 전신주의 바로 코앞. 지호는 이제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된 눈으로 고압 전선을 움켜쥐었다. 몸을 날린 순간 고민은 끝났다.

지호의 손이 두꺼운 강심 알루미늄을 비틀었다.

당연히 전기가 흐르고 있던 활선은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사방으로 불을 뿜었다. 남은 이형 에너지를 끌어모아 몸을 보호했으나 소용없었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순식간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뼛속까지 뜨거워지는 와중에도 지호는 붙잡은 전선을 휘둘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비명. 살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감각. 그 와중에도 불길에 착실히 타고 있는 백색 파도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지호를 집어삼키기 위해 일행들에게 퍼부어지던 공격이 끊겼고, 그래서 지호는 느릿하게 흘러가는 주변 풍경과 함께 그들의 경악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전선에서 뿜어지는 초고압 전류와 더불어 발생하는 불길이 지호와 괴물을 동시에 구웠다.

그나마 이형 에너지 방벽과 신체의 튼튼함으로 무장한 지호는 간신히 숨이라도 몰아쉬며 버텼으나 놈은 그렇지 못했다. 백색 탁류에 옮겨붙은 불길은 그것을 연료 삼아 활활 타올랐다. 미약하게 켜져 있던 주변 건물의 전기들이 순식간에 나가며 일대가 어둠에 잠긴 와중에 그 불길만이 찬란하다.

“전기, 이쪽 일대 전기를 끊으라고!”

어디에다 소리치고 있는 건지 모를 김 반장의 외침이 고래고래 울렸다. 허공에서 휘청이던 지호는 더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했다. 아래에서 부릅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보현이 촛불만 한 힘을 일으켜 날아오르려던 그 순간, 그들의 옆을 빠르게 스치며 누군가 날아올랐다.

괴물에게 몸을 잠식당했다가 제압당해 기절한 소민도 아니었고, 보현의 배터리가 되어 그를 지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던 지윤도 아니었다. 정신계 공격을 방어하느라 보현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그 와중에 외부로 연락하던 김 반장은 당연히 아니다. 넷을 지나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른 건 모르는 헌터였다.

낯익은 뒷모습.

지호의 몸에 남은 고압 전류 때문에 그를 받아 든 헌터 역시 신음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덕분에 지호는 바닥에 추락해 더 큰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었고, 신체의 이상을 감지한 온몸이 맹렬히 자신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신체 괴변이 현상이 심화되며 지호의 몸에 난 상처마다 비늘 같은 피부가 돋았다.

그를 품에 안은 채 가볍게 바닥에 내려선 헌터는 느릿하게 몸을 세웠다. 보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말도 안 돼.”

선글라스를 쓴다 해서 못 알아볼 얼굴이 아니었다. 꿈에서도 그리던 이가 보현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품에는 그의 무모한 피보호자를 안고서.

김 반장의 필사적인 요청 덕분에 주변의 전력이 끊어졌다. 그러나 이미 지호는 사경을 헤맸고, 어둠 속에서 그곳을 비추고 있는 빛이라곤 괴물을 불태우는 화염뿐이었다.

지호의 방벽이 점차 부옇게 흐려지더니 비눗방울처럼 퐁 터지는 모양새로 사라졌다. 보현은 자기가 얼마나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마치 마실 다녀온 것 같은 태연한 얼굴로 지호를 내려놓는 전 파트너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오랜 침묵 끝에 보현은 간신히 그의 이름을 혀끝으로 굴렸다. 너무 오랜만에 부르는 이름이었고, 그 이름을 들을 상대가 눈앞에 있을 일이 두 번 다시 없으리라 생각해 지독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보현은 말했다.

“도준우. 왜 살아 있는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