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주리의 몫까지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을 받아 낸 뒤, 재편성된 전투조는 다시 출발했다. 지호는 뒤에 남은 네 사람을 흘깃 보며 입에 맴돌던 말을 삼켰다. 마음 같아선 보현 역시 여기에 남았으면 싶었으나, 퀸 패러사이트가 이 근방에 있는 이상 그를 데려가는 편이 준우와 만나지 않을 확률을 올려 주는 길이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도플갱어에게 당해 쓰러져 있던 시간이 오히려 휴식을 취한 셈이 되어 나머지 사람들은 꽤 팔팔했다. 김 반장만이 약간 피로한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움직인다. 전직 형사다운 체력이었다.
“놈이 자신을 쪼개어 균열 밖으로 나간 후면 어떻게 하죠?”
소민의 소심한 질문은 모두를 걱정에 빠트렸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바닥의 흰 점액질 비슷한 것에서 퐁퐁 생겨나는 마름모꼴 괴물들의 존재가 놈이 아직 이 균열 안에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아직 안 나간 것 같죠?”
“본체는요.”
지호는 한마디를 덧붙인 뒤 감지 파장을 넓혔다. 그의 에너지 자체가 균열 경계를 넘지 않도록 해야 했기에 지나치게 먼 거리까진 확인할 수 없었다. 곁에서 균열 어플을 통해 악성 균열이 어디까지 퍼졌는지를 꾸준히 확인하던 보현이 확인해야 할 위치를 알려 주었다.
잡히는 괴물의 수가 꽤 많다. 그러나 움직이는 놈들의 수는 적었다. 이유를 추측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알 괴물의 흔적 남은 길옆 블록으로 달려 관교동에 진입한 헌터들은 주변을 느릿하게 지나가는 괴물들의 수에 당황했다. 놈들은 헌터를 보고도 반응하지 않았다. 머리에 희끄무레한 형태가 보인다.
지윤은 욕설과 함께 소민의 팔을 꼭 붙잡았다. 만일의 경우가 오면 소민이 그를 전투 외 지역으로 데리고 나갈 예정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보현은 그런 계획을 세우며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괜찮아요. 다 조종당하는 놈들이니까. 아파트 단지 앞에서 봤었죠?”
“그걸 괜찮다고 말해도 되는 거예요?”
“한 가지밖에 생각 못 하는 것 같았어요. 공격해 오지도 않잖아요.”
실제로 주변에 있는 것들과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을 했으나 달려드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는 반응하는 것들조차 없자 지윤은 그제야 소민의 팔을 놓을 수 있었다.
“우리가 가서 놈을 어떻게 상대하죠?”
“물리적 방어력은 없다시피 하다고 했었는데……. 언니, 옛날에 균열에서 만났던 그 눈알 괴물 기억해요? 제가 촬영했었던.”
보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지윤이 던진 질문에 이론적인 답을 돌려주었다.
“그놈과 비슷하거나 더 약한 놈일 거라고 생각해요. 퀸 패러사이트처럼 주변에 숙주를 거느리는 놈도 아니었고, 오히려 다른 괴물들을 만들어 내느라 자기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죠. 어렵지 않을 거예요.”
혹은 그러기를 바라거나.
지윤은 지호만 믿겠다며 눈을 굴렸다. 주변에 표류하고 있는 마름모꼴 괴물들 중 일부가 헌터들에게 다가왔다가 방벽을 뚫지 못하고 힘없이 흐늘대기를 반복했다. 그것들은 몸을 조금 문대다가 방벽을 뚫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다른 쪽으로 둥둥 떠 가곤 했다.
방벽을 유지하며 바닥에 찰랑이듯 흐르는 흰 액체를 가로지른 헌터들은 정말로 눈알 모양의 괴물을 마주하게 되었다.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연신 눈물을 흘려 대는 놈의 아래쪽에는 닿기만 해도 환각이 일어나는 모종의 액체가 실내 수영장에 버금갈 정도로 고여 있었다. 놈은 눈을 느릿하게 움직여 헌터들을 둘러보곤 정신적 언어를 걸어왔다.
돌아왔구나.
“그래. 이 망할 새끼. 죽은 사람들 목소리 흉내 내면서 사람들 이용한 잡놈 새끼가 너지?”
눈알은 정신적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을 웃음으로 인식해도 괜찮은지는 좀 애매하지만, 적어도 지호는 그렇게 느꼈다. 왜 그런 식으로 인지했는지 모르겠다. 그에게는 정신 계통 작용을 분간할 능력이 없는데.
이용하다니.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줬던 거다. 너야말로 저쪽에서 나를 방해했던 것이로군.
“방해라니.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지호는 지지 않고 놈을 노려보았다. 놈은 생물이 아닌 것처럼 아주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것은 지호와 동행해 온 헌터들을 하나하나 훑다가 오랫동안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부근에서 둥둥 떠 있기만 하던 모든 것들이 일제히 한 사람 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현장.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며 몸이 움츠러들 법도 한데, 보현은 팔짱을 낀 채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뭘 봐.”
지호는 하마터면 놈들이 무언가 알아챈 것은 아닐까 의심할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놈은 그 커다란 눈으로 제법 그럴듯하게 핑계를 만들어 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나와 비슷한 것을 해친 적이 있나 보지?
“눈알만 떠 있는 것들 말인가? 왜. 놈들의 복수를 할 참이냐?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보현의 도발은 지윤을 겁먹게 했다. 진짜 달려들면 어떻게 해? 하고 속삭이는 음성 때문에 지호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됐다. 나였던 것의 복수를 내가 해야 한다면 너희 모두에게 여왕의 복수가 뒤따라야겠지.
“퀸 패러사이트와는 무슨 관계냐? 다른 놈들을 조종하는 걸 보니 비슷한 놈인가? 놈의 약점을 털어놓으면 살려는 주지.”
보현의 직설적인 질문에 지호는 당황했다. 왜 여기에 순순히 따라왔고, 또 퀸 패러사이트의 이름을 듣고 얌전히 있나 했더니 이런 꿍꿍이속이 있던 모양이다. 눈알 괴물은 퀸 패러사이트가 무엇인지 물었고, 지호는 그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식으로 괴물들을 데리고 다니는지 설명했다. 놈을 아는지 눈알 괴물이 흥미로운 기색을 드러냈다.
형제에게 볼일 있는 자였구나. 놈의 약점? 너무 무르다는 것이지. 내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인간들은 이미 멸절되었을 것을…….
놈의 눈이 다시 지호를 향했다. 지호는 금방이라도 싸울 준비를 한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힘? 그게 뭔데? 숙주로 만드는 것?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 너도 할 줄 알잖아. 이주원 각성자를 조종했잖아.”
그런 조잡한 수와 형제의 힘을 비교하다니 어리석다. 내 형제는 다른 것을 자신에게 종속시키지만, 더 강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지. 놈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단점만 없었어도 많은 것들이 그 앞에 자신을 먹어 달라고 몸을 날렸을 것이야.
퀸 패러사이트의 호위대였던 헌터들의 모습이 변한 것을 보면 더 강해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대화를 나누며 놈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고, 덕분에 그 크기는 더욱 작아졌다. 지호는 방벽으로 밀어 내도 무릎을 훨씬 넘게 차오른 곤란한 점액질을 불쾌하게 바라보았다.
“퀸 패러사이트는 여길 나갈 생각 외에 다른 목적을 보이지 않는 것 같던데.”
그것이 우리의 불행이지. 어찌 본래의 목적을 잃고 다른 생각에 빠져 헤매는가?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거늘, 실패를 인정할 줄 모르고 헛되이 발버둥 치다니.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파도가 치기 시작했다.
눈알 괴물의 아래로 고여 있던 액체들은 무언가에 떠밀리듯 흔들렸다. 본래의 목적? 지호와 헌터들은 질겁하며 위로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는 백색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정신의 언어가 울려 퍼졌다.
한때 길을 잃었으나 용서받았노라. 나는 이제 여왕께서 본디 내려 주신 명을 따라 그분의 길을 예비하겠다. 본디 그분의 것이었던 어리석은 자여, 길을 열어라!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 반장과 보현의 손이 지호의 눈을 콱 눌렀다. 아무리 신체 계열 능력자라지만 눈을 단련해 본 역사까지는 없었던 지호였기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물러나야 했다.
“왜? 왜 이래요?”
“다들 고개 돌려!”
김 반장의 외침이 앞쪽에서 들렸다. 보현과 김 반장이 맨 앞에 있던 지호의 양옆에 서 있었으니 뒤에 있던 소민과 지윤은 둘에게 가려져 모종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판단은 빨랐으나 장님 꼴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곧 머리를 빠갤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다. 지호가 신음하자 김 반장은 뒤쪽의 소민에게 소리쳤다.
“놈의 머리 위로 이동해!”
“네? 하지만…….”
“시간 없어! 이동해서도 시선 위!”
정신계 능력자 아닌 자들의 눈엔 보이지 않았으나 교회 벽을 타고 솟아오른 백색 점액질에서 흰 마름모꼴 괴물들이 휘젓고 다니던 촉수 같은 것이 무수히 솟아올랐다. 보현은 방벽 두께를 두껍게 하라고 소리침과 동시에 모인 헌터들 전원에 정신 방벽을 씌웠다.
지윤은 이를 악물며 보현의 등에 손을 얹었다. 힘을 쓰기 무섭게 창백해지는 보현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김 반장의 외침이 재차 들려오기 무섭게 소민의 에너지가 모두를 감쌌다.
위치가 변했음에도 촉수들은 지호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김 반장은 욕설과 함께 지호에게 신호했다.
“더럽게 많아! 대원, 발밑을 향해 쏴라!”
“앞이 안 보여요!”
“보면 안 돼!”
보현과 김 반장의 손이 한쪽씩 눈을 가리고 있어 당연한 노릇이었다. 허우적대는 지호의 팔을 붙잡은 김 반장은 검지를 제외한 손가락들을 접어 주며 손을 아래로 당겼다. 손가락 하나가 특정 방향을 가리킨다.
내 안에 살아 있는 자들을 다 죽일 셈이냐?
괴물의 말과 함께 두통이 강해졌다. 왼쪽에 선 보현에게선 떨림까지 전해졌다. 지호는 김 반장의 말대로 이형 에너지로 만들어진 화살 끝을 날카롭게 세우며 소리쳤다.
“왜들 이러시는지 모르겠지만, 믿어요. 쏩니다!”
지윤이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찰랑거리던 흰 액체들이 바람도 없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보현은 더더욱 질겁했다. 그것의 면적이 넓어지자 그 모든 면에서 검은 촉수가 뻗어 나와 방벽을 덮쳤다.
일행을 공중에 띄우고 있던 소민의 염동력이 약해졌다. 비틀대며 중력이 흔들리자 지호는 앞을 보게 해 달라고 소리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지호의 머리를 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심지어 지호의 머리를 반쯤 끌어안은 보현은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코드 네임 메두사가 따로 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인데. 마주치면 돌이 되는 게 아니라 꼭두각시가 된다는 차이가 있겠군.”
거대한 키클롭스의 목구멍마저 뚫어 버렸던 강력한 에너지가 발치에 모이자 눈알 괴물로부터 당황한 정신이 흘러나왔다. 눈을 돌리다 못해 아예 보현의 등에 머리를 파묻어 버린 지윤은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그는 지원 팀이라 현장에 나와 괴물과 싸워 본 경험이 극히 드문 헌터였다.
방벽 채로 헌터들을 삼켜 버릴 높이까지 올라온 흰 액체가 진짜로 그들을 후려쳤다. 앞이 안 보이는 상태라 방벽만 유지하고 있던 지호가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아아악, 망할! 방향 그대로예요? 그대로 맞죠?”
김 반장은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지호의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화살로 발치로 추측되는 모든 방향을 겨눈 지호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화살비를 퍼부었다.
위만 보고 있던 소민도, 눈을 감고 있던 지윤도 보지 못했으나 보현과 김 반장은 보았다. 지호의 화살이 쏟아지는 그 순간 헌터들을 후려쳤던 액체들이 우산처럼 솟아올라 눈알을 가렸다. 그러나 어지간한 대형종조차 쓰러뜨렸던 힘이다. 직선으로 뻗어 가는 것도 아니고 회전하며 가속한 화살들은 각자의 방향에서 눈알을 꿰뚫었다.
정신적 비명이 사방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