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버둥거리던 주리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급히 뛰어온 보현이 지호를 말로만 말리며 난처함을 드러냈다.
“지호 씨, 너무 심하게 굴지 마요. 아무리 급해도 이렇게까지. 팰 거면 적당히 패요. 전투 불능은 곤란해요.”
주리의 입에서 사나운 웃음이 터졌다. 머리를 누르는 지호의 손이 느슨해지자 고개를 든 주리는 입에 들어온 흙을 퉤 뱉으며 말했다.
“그 망할 농담 좀 집어치우라고 했잖아. 옛날 회사 부장 새끼도 그런 구린 농담은 안 했다.”
그 이상의 반항이 없었기에 지호는 주리를 일으켜 세웠다. 방벽 바로 코앞, 괴물들이 머리며 아가리며 온몸을 문대며 들어오려 노력하는 것이 보이는 위치. 주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쪽을 노려보았다가 한숨과 함께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냈다.
“방금 한 말 무슨 말이야. 들어야겠어요.”
“좀 얄밉게 굴긴 해도 역시 산 동생이 좀 더 낫죠?”
주리가 화를 낼 기미를 보이자 지호는 얼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 반장 팀이 만났던 흰 눈알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놈의 마름모꼴 동공과 바깥을 돌아다니는 흰 마름모형 괴물 설명을 들은 헌터들의 표정이 기이해졌다. 생김새를 묘사한 뒤에 그것이 저지른 일을 입에 담으며 지호는 생각했다. 아마 실종자들이 어딘가에 생존해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어떤 모양으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자들은 원치 않았을 소식일 것 같다고.
“그 눈깔은 도플갱어와 비슷한 돌연변이를 일으켰다고 해요. 대신 도플갱어처럼 형태 자체가 그것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기억 같은 것을 누적하는 모양이더라고요.”
“참, 그 도플갱어는 어떻게 됐죠? 급하게 오느라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세진의 질문은 타당했으며 모두가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었는지 지호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눈빛들에 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하면 안 된다.
그 헌터라고 불리는 보현을 쫓고 있는 괴물들의 존재를 아는 이상, 이 이야기는 다수에게 퍼져 좋을 것이 없는 종류였다. 지호는 느릿하게 말을 늘이며 고심했다. 뭐라고 이야기해야 한단 말인가?
여태 괴물들, 그중에서도 인간의 흉내를 내는 괴물일 뿐이라며 도훈을 배척해 왔던 보현은 팔짱을 끼며 말을 툭 던졌다.
“놈이 수작질을 부렸겠지. 거기서 우린 죽을 뻔했어요. 그 많은 괴물을 다 조종하고 있더군요. 놈이 그 정도로 강한 괴물일 거라곤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여태 어떻게 멀쩡했던 거죠?”
“저한테 해를 끼치지 않아서요?”
“글쎄.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주리는 그 대화가 길어지는 것이 언짢았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보현을 노려보았다. 물론 보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그 대치 상태에 끼어든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그 전에, 한 가지 말할 게 있는데.”
김 반장의 큰 체구가 둘 사이로 들어오자 보현과 지호는 서로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그 어깨 위로 빼꼼히 고개 내민 지호는 김 반장이 다른 헌터들 쪽으로 펼쳐 보인 환상을 볼 수 있었다. 도훈을 흉내 낸 것 같은 사람이 하나 서 있고, 그 손바닥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실타래들이 보였다. 일전에도 이런 환상으로 퀸 패러사이트를 보여 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 평화롭던 시기가 아주 오래전이긴 하지만.
“이게 정신계 능력자인 내 눈에 보였던 도플갱어다. 이 끝에 괴물이 한 놈씩 있었어. 수가 어마어마했었고. 놈을 어떻게 막았지? 일부러 물러나 준 건가? 놈이 대원을 이용해서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닌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아니, 정정하지. 네가 놈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김 반장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 있던 모두가 김 반장을 보고 있고, 이제 그가 지호 쪽으로 몸을 돌렸으므로 모두가 지호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 진배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김 반장은 환상을 천천히 없애며 손을 뻗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보여 주기만 해도 좋아. 그 편이 서로 빠르지.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고.”
지호는 저도 모르게 김 반장의 팔을 붙들었다. 뭘 한다고요? 하고 되묻자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네 기억을 뒤지겠다고.”
방벽 너머의 괴물이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가 튕겨 나가는 모양새가 우습다. 어떤 것은 다른 놈을 해치는 발톱으로 방벽을 찢으려다 도리어 옆과 아래에 있는 놈들을 할퀴고 물어뜯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놈들끼리 싸우는 일이 없다. 꾸준하고 인내심 가득한 작업. 지호는 침을 삼켰다. 차라리 저 밖의 괴물들 틈바구니로 도망갈까? 어쩌면 놈들은 방벽 자체에 집중하느라 지호에게는 별 반응이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신뢰하고 싶어 하는 시선 때문에 지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대신, 지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보시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랑 공유하진 말아 주실래요? 저도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어서. 이건 우리 사이의 신뢰 문제 때문에 보여 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도훈 씨는, 좀 멋대로 구는 경향이 있긴 해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녜요.”
김 반장은 피식 웃었으나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호는 그가 제 부탁 아닌 부탁을 그럭저럭 들어줄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찌잉 하고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파 온다. 지호는 가까스로 무릎 꿇지 않고 버텼다. 정신 방벽 민감도가 올라간 건 좋은데 여전히 그것을 스스로 조절할 줄 몰랐기에 매번 이 지경이었다. 도훈은 어떻게 이런 부작용 없이 그에게 환상을 보여 줄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지호가 도훈에게는 정신 방벽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흘러가는 동안 김 반장은 지호의 기억을 보았다.
정신계 능력이라곤 남의 간섭을 막는 정도의 힘밖에 없었던 지호였기에, 그는 제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추측하지 못한 채 얌전히 기다렸다. 지호의 기억 속에서 김 반장은 타인을 마주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 그것도 구체적으로 도플갱어라고 해야 옳겠지만.
싸울 때 보았던 도플갱어는 민도훈 헌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호의 머릿속 도플갱어는 형체가 없다. 물처럼 흐르고 나부끼며 펄럭이는 온갖 형태들이 사람의 모양과 괴물의 모양, 혹은 아무것도 아니기를 반복했다.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수십여 차례. 그것은 명백한 의미를 발산했다.
물론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그러나 김 반장은 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그런 방식의 능력 운용에 놀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도플갱어는 그것을 설명하거나 가르치는 대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지호의 기억 속에서 필요한 부분을 보여 주었다. 마치 그가 기억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김 반장은 지호의 의식 속에서 도훈이 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외에도 몇몇 사람을 느낄 수 있었으나, 유독 이 괴물이 그러했다. 서로 함께한 시간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임보현이 가장 큰 의미겠지. 물론 보현의 존재는 지호에게 대체 불가능한 영역으로 분류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도플갱어는 무언가 설명할 수 없이 모호한 경계에 걸쳐진 채 김 반장에게 그들의 상황을 털어놓았다.
지호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빠르게 전달받은 김 반장은 탄식했다. 그가 상황을 파악하기 무섭게, 도플갱어는 또 다른 의미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김 반장은 당황했다. 어떻게 타인의 머릿속에서 이런 대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마치 그가 지호의 기억을 읽을 것이란 사실을 짐작하기라도 하듯이, 그것을 지호가 알지도 못하는 와중에 전달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그 일은 일어나고 있었다. 지호는 마치 도플갱어의 정신을 김 반장에게 몰래 전달하기 위한 캐리어에 불과한 것처럼 얌전히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었고.
김 반장은 복잡한 심경으로 도플갱어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두 정신계 능력자의 정신이 밀접하게 얽혔다.
“김 반장님?”
그가 너무 오래 서 있던 탓에 지호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뭐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웅성거리는 다른 헌터들을 뒤로하고 보현이 먼저 둘의 상태를 확인했다. 세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 반장은 그제야 지호에게서 손을 떼었다.
“별일 있던 건 아니군. 찾으려던 걸 찾지 못해서 두고 간 거야. 용건에 우리 목숨이 없던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억을 전부 보았다는 건 도훈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인지도 이해했다는 의미가 되는 걸까? 꼼꼼히 확인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말에 모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이상했다.
도플갱어와의 유착 관계가 없음을 이해받은 지호는 이제 주리로부터 자신의 발언을 해명할 것을 전격적으로 요청받았다. 흥분해 눈이 뒤집힌 헌터를 제압하기 위해 뱉은 말이긴 했지만, 그간 충분히 생각했던 이야기였기에 정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아까 했던 말에 거짓은 하나도 없어요. 어떤 방식인지까진 아직 알 수 없지만, 놈은 염동력을 빼어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동 능력자에게 접근했죠. 다른 사람들이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 거로 봐서 이주원 각성자 개인에게 접촉했던 것 같거든요. 그게 도플갱어의 방법처럼 다른 개체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는 이제부터 알아봐야 해요. 하지만 아마 여왕의 짓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하는데, 그때 이주원 각성자의 눈이 파랗게 빛났었거든요. 여왕의 조종을 받는 것들은 눈이 빨갛게 빛나는데, 다른 것들은 파란색인 게 아닐까요? 혹은 괴물마다 특유의 빛깔이 있을 수도 있고요.”
온통 추측뿐이긴 해도 그렇게까지 어이없는 추론은 아니다. 지호는 자신이 겪은 것들을 생각하며 차근차근 일렀다.
“놈이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바깥의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고, 그래서 급성 균열이 열려 왔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 필요까진 없을 거예요. 사실 진짜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 아녜요. 바깥 괴물들 틈 어디에선가 발견된 퀸 패러사이트는 그의 강한 호위대 여럿을 데리고 있지만, 그 눈알 괴물 놈은 그렇지 않아요. 놈의 몸이 퀸 패러사이트보다 훨씬 약하다고 했어요.”
“도플갱어가 일러 준 정보인가?”
“맞아요. 어차피 악성 균열이잖아요. 우리는 괴물들을 사냥해야 하고, 그렇다면 좀 쉬운 놈을 미리 잡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겠죠. 게다가 놈이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저 마름모꼴 괴물들은 서로 싸우거나 하진 않아서 어찌 보면 우리한텐 대단히 불리하다고 할 수 있어요. 저것들끼리 싸워서 줄어드는 수가 없다는 말이고, 우리가 잡는 수가 끝이란 소리니까.”
김 반장은 지호가 알 리 없는 것에 관해 묻는 대신 입을 다물며 고심했다. 보현은 괴물들을 한참 노려보다 박수를 쳐 헌터들의 시선을 모았다.
“좋아. 이지호 헌터 말대로야. 악성 균열에서의 최우선 과제는 구조보다 사냥이다. 근접 거리의 최소 인원을 일부 구조했으니 이제부터 전투 태세로 들어갈 수 있어. 마음껏 날뛰어도 될 공간을 확보했으니까.”
보현은 냉정하게 발언하며 지도를 열었다. 구조 신호가 발산되지 않는 골목들을 짚은 그는 신중하게 헌터들을 훑었다.
“무작정 싸우지 마라. 정신 계통 괴물이 많아. 그 눈알 괴물인지 뭔지를 사냥하면 저 마름모 새끼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엔 이 상태가 유지될지도 몰라.”
“그땐 또 그때의 계획을 세워야죠.”
신다은 헌터는 한숨과 함께 어깨를 두드렸다. 곁에 선 세진이 걱정스럽게 그를 안마해 주고 있었다. 신체 계열 능력자가 아닌 이들에게는 휴식 없는 작전 강행이 무리가 될 터. 보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서 방어 태세 갖추고 있던 세 사람은 작전에 참여하지 않는다. 또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팀에 정신계 능력자가 필요하니 최세진 헌터가 남도록. 김 반장님은 가서 놈을 상대해야 할 것 같으니까.”
임의로 조가 재편성됐다. 주리는 어떻게 해서든 전투조에 끼고 싶어 했으나 신체 계열 퓨어 헌터가 뛸 수 있는 현장이 아니었다. 그는 가라앉은 눈으로 보현의 지적을 인정하면서도 속을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그 눈알을 터뜨려 밟아 버려. 다시는 죽은 사람들로 우릴 뒤흔들지 못하게.”